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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우리를 성장시킨다

<너의 결혼식>(2018)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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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역시 어린 여자에 불과했다. '나'보다는 나았을 뿐. *사진 : 다음 영화, <너의 결혼식> 스틸



첫사랑 그녀도 어린애였을 뿐.


남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첫사랑 영화다보니 이 작품을 보면 아무래도 <건축학개론>(2012)이 떠오른다. <너의 결혼식>이 <건축학개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건축학개론>이 첫사랑의 실패와 이를 대하는 보편적인 남자의 태도를 ‘설명’한다면, <너의 결혼식>은 그 남자들에게 사랑의 실패를 ‘이해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녀’를 한번 생각해보자. 사랑이라는 환희를 벗겨내면 그녀 또한 별 볼일 없는 동일선상의 한 인간일 뿐이다. 말하지 못할 가정사가 있을 수 있고, 생계를 걱정하며, 미래를 걱정한다. 그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고, 슬퍼하기도, 우울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첫사랑을 상대하는 남자들은 때로 자신의 감정에 몰두해 상대방 여자가 ‘인간적으로’ 받는 괴로움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그녀의 과장된 아름다움만큼이나 어떤 인격적인 성숙함도 있으리란 기대처럼. 그러나 우리가 첫사랑을 하던 나이에 그녀 역시 어린 여자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에게 사랑의 실패나 배신 같은 무거운 인생의 짐을 떠넘기기엔 너무하지 않은가?


<너의 결혼식>은 시종일관 이런 사실들을 승희(박보영)를 통해 묘사해낸다. 조성모의 ‘가시나무’ 노래 가사처럼,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서 당신의 쉴 곳 하나 없는” 그런 상태 말이다. 뭐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그 똑똑한 승희도 겉모습에만 혹해 ‘쓰레기 같은 놈’을 만났듯이 그녀들이라고 늘 ‘성스럽고’ ‘지혜로운’ 것만은 아닌 게다. 그러니까 남자들이여, 첫사랑을 너무 미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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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을 넣으려면 일단 달려봐야하는 거다. *사진 : 다음 영화, <너의 결혼식> 스틸



사랑은 터치다운할 때까지 달려보는 것


<건축학개론>의 승민이 지레짐작으로 단 한 번에 서연을 내친 것과는 대조적으로 <너의 결혼식>에 등장하는 우연(김영광)은 첫사랑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과연 어느 누구도 첫 시도에 3점 슛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만약 해냈다면 그건 ‘운’이 따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연의 이름이 ‘우연’이면서 체육학도인 것은 의미심장한데, 정말 사랑은 ‘우연처럼’ 올 수 있겠지만, 그 사랑을 쟁취하고 싶다면 우연의 삶처럼 그 마음속에 ‘터치다운’할 때까지 시도라도 해봐야하는 것이다. 정말 열심히 해보고도 안 된다면 인연이 아니겠지만, 기회가 있었는데도 하지 않는다면 그 후회를 잊기 위해서라도 자기합리화에 빠지게 되는 게 사람 심리다.


아무래도 첫사랑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게다가 첫사랑은 일생의 가장 강렬한 사랑의 기억이어서, 이는 결국 나중에 이어질 사랑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니까 첫사랑을 대하는 남자들, 아니, 사랑을 대하는 남자들은 반드시 두 가지를 기억해야할 것이다. 그녀 역시 한 인간일 뿐이란 사실과, 시도조차 하지 않고 사랑을 저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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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꿈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사진 : 다음 영화, <너의 결혼식> 스틸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발전을 기원하고 안녕을 바라는 것이다.


사랑은 다른 행복들과는 다르게 반드시 대상을 필요로 한다. 식사의 기쁨, 사색의 기쁨, 자유의 기쁨 따위는 혼자서도 만끽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랑의 기쁨만큼은 이를 나눌 상대가 없으면 느껴볼 수도 없다. 그러니까, 사랑은 온전한 상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사랑은 상대의 존재가 나를 기쁘게 하므로, 상대방의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상대방이 계속해서 절망의 나락에 빠지고 병에 걸린다면 그 존재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더 오래 좋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낫다는 건 굳이 더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이 역경에 처하면 이 역경조차도 나누어 지려고하고, 위기에 처하면 내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돕는 건 마땅히 그래야하는 일이다. 또한 반대로, 내가 역경에 처해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내 역경에 닿지 못하게 노력하려는 것도 사랑의 모습이다. 결국 어떤 방식이든 사랑의 목표는 한결 같다. 사랑하는 상대방의 상황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더 나아져서 오래도록 나와 그 기쁨을 나눴으면 하는 거다.


그런 점에서 진짜 사랑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도 않는다. 다만 우연이 승희의 직장상사에게 쌍욕을 퍼붓듯이, 서로의 성장이나 안녕에 해가되는 것들에게 때로 욕을 퍼부을 뿐, 상대를 힘들게 하기위해 노력하지는 않는다. 만약 이를 거꾸로 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되고, ‘나의 결혼식’이 아닌 ‘너의 결혼식’이 되어버린 것도 이 기본적이고도 치명적인 사랑의 규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당신도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할 방법이 아니라, 행복할 방법을 궁리해야한다.


그렇다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건 역시 ‘머리론 이해해도 가슴은 움직이지 않는’ 일 아닌가. 그러니까 그런 슬픈 사연을 만들기 전에, ‘나의 결혼식’을 만들고 싶으면 잘하자. 사랑하는 사람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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