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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보다 강한 침묵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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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테이블>(2017)

‘짐작’을 밝히는 영화적 사유


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2017)은 배경이 오직 하나다. 서울 소재의 어느 카페 안 창가 자리. 하루 동안 이 창가 자리에는 네 쌍의 손님이 드나들고, 영화는 이 네 쌍의 손님들이 나누는 대화로 채워진다.


단순한 영화의 구조와는 다르게, <더 테이블>의 서사를 한 눈에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발화하지만, 이 발화된 내용만으로는 주인공들의 과거를 모두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영화 속 인물들만이 알고 있으며, 때로는 표정으로, 때로는 미묘한 분위기 그 자체로, 우리는 표면에 드러난 인물들의 서브텍스트를 통해 그 내용을 ‘짐작’할 따름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이르는 짐작은 모두 비슷하도록 인물들의 대화 속에 ‘힌트’는 주어지지만, 그게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다.


이 작품이 첫 번째 에피소드를 왜곡으로 점철된 ‘증권가 찌라시’와 관련된 내용으로 갈등의 첫 포문을 열어둔 것도 이 때문이다. 짐작하는 것. 어떤 때는 사실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완벽한 사실은 아니거나 변질된 것. 어쩌면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우리 역시 이 작품을 보면서 인물들의 과거를 ‘추리’할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들은 제 입으로 지난 일을 밝혀주지 않는다. 불분명하기 때문에 우리는 극중 인물들의 내막을 자동적으로 짐작한다. 그런 까닭에 관객은 첫 에피소드에서 과시욕을 채우고자 ‘짐작’으로 유진(김유미)에게 큰 상처를 안기고 마는 ‘눈치 없는(어쩌면 의도된)’ 옛 남자친구 창석(정준원)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스스로도 짐작하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에 빠진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에서도 묘사됐듯 어떤 기억들이란 각자가 유리한 대로 해석될 따름인데도, 우리는 냉철한 판단을 유보하고 주관에 의지한 채 흐릿한 내용을 섣불리 ‘이해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설령 이 작품에서 ‘자동적 짐작’을 눈치 챘다하더라도 우리가 이를 거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더 테이블>이 심어놓은 영화적 장치가 인물들의 정보를 통째로 쥐락펴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의 정보통제는,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극중 인물들은 모르기 때문에 긴장을 발생시킨다. 예컨대 살인마가 뒤따라오는지도 모르고 귀에 이어폰을 꽃은 채 밤거리를 활보하는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쇼트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모든 정보는 극중의 인물들이 쥐고 있고, 관객들이 그것을 모른다. 스릴러의 정보통제는 극중 인물들에게 향하는 반면 <더 테이블>에서 정보통제는 관객들에게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이 폭로될 때마다 긴장된 수치만큼의 충격을 받게 된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가 이 같은 효과의 절정을 이루는데, 관객들은 에피소드 초반의 정보로는 은희(한예리)가 자신의 결혼식에 친정엄마 역할의 ‘배우’를 고용하는 줄은 쉬이 알지만 그 목적이 ‘사기결혼’에 있다는 건 예상치 못한다. 그런 까닭에 은희의 입에서 사실이 폭로된 후에야 모든 짐작이 무너져 내리면서 ‘짐작’과 ‘사실’ 사이의 낙차로 충격을 받게 된다.


이렇게 <더 테이블>은 한 인물에게 정보를 배제하는 통제 방법 자체는 여느 영화들과 같지만, 주체가 뒤바뀌어 있다. 이런 정보통제 방식은 ‘자동적 짐작’을 유도해 서사적 효과를 넘어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짐작’하는 상황에 빠지게 만듦으로써, 영상을 받아들이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객의 주체성까지 흔들어 버린다. 영화를 보는 우리는 마치 재판관처럼 영상을 보고 어떤 견해든 입장이든 내놓게 되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했듯이, 첫 에피소드의 창석이 ‘짐작’을 통해 유진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짐작’의 본질이 악한 것이라고 정의해버린다면, 우리 스스로도 그렇게 행하고 있는 꼴이며, 결국 판결문을 읽을 자격은 사라지니까. 그리고 자격의 문제를 넘어 관객은 정보의 소유권을 잃어 객관성을 박탈당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더 이상 심판자로 있지 못한다. 극중 인물과 같은 선상에서 상대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고, 이 영화에서 던지는 화두는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대상이 된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짐작한다’는 사실 자체를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본격적으로 작품 읽기에 돌입하기 전에 짐작의 속성을 살펴보고, 관객들로 하여금 이를 체험하게 한다. 파솔리니가 영화는 현실의 연장선에 있다고 말했듯, 영화는 단순히 현실을 복제하는 것뿐만 아니라 ‘복제한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과 영화가 동시에 작동하게 한다. <더 테이블>의 정문을 열면서 우리는 짐작의 부정한 면모를 온몸으로 체감하게 되고, 동시에 마음 한편에 ‘진심’을 알고자 하는 욕구가 치솟는 걸 느낀다.


실로 거짓투성이의 외연들 속에서 우리는 분명 아는 게 없다. 실제 삶에서도 그렇다. 의도를 감춘 행위와 발화를 해석하느라 현대인들은 지쳐버렸다. 소위 인간관계의 권태기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 아는 것이다’는 논어 위정편의 구절처럼,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모름’ 자체를 깨닫기도 한다. 단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실은 한발 앞으로 다가온다. 모른다는 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니까. 고로 거짓에 질식해 진실은 없다고, ‘짐작’해버릴 것이 아니라, 밝혀내지 않았을 뿐, 아마도 ‘그것’은 있다고 거짓들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도 세상을 “질식할 것 같은” 곳이라 여기면서도 “믿기, 또 다른 세계가 아니라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사랑 혹은 삶을 믿기, 불가능함을 믿듯 단지 사유될 수만 있을 뿐인 ‘사유할 수 없음’을 믿듯, 그 모든 것을” 믿을 것을 주문한다. 이는 영화를 읽는 행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영화 읽기란 영화 속 시청각 요소들로부터 의미를 유추해내는 과정이다. 여기서 짐작은 필연적이다. 짐작은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짐작이 주어진 현상의 이면을 밝히는 지적 고찰에 그치지 않고 껍데기에만 주목해 적절한 증명조차 없는 ‘찌라시’를 양산한다면 마침내 위험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된 외연탐구를 그치고, 현상 이면에 숨겨진 ‘진실 내지는 진심을 꺼낼 방법’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더 테이블>은 짐작의 부정과 불완전함을 체험케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돌파하기 위한 자신만의 비기를 꺼낸다. 그것은 바로 ‘알지만 알지 못함’을 집요하게 포착하는 영화 본연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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