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영화를 평가할 목적으로 보게 되면 한 가지 고민이 생긴다. 어째 영화 요소로는 영 언급할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 재미있는 영화들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태식 밈’을 낳은 강석범 감독의 영화 <해바라기>(2006)는 조폭 영화가 한창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의 보편적인 장르 특성을 띠며 서사도 어찌 보면 진부하다고 할 수 있다. 조폭의 배신, 비리 같은 것을 다루고 있지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게 된다. 어째서일까?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 영화가 한때의 잘못을 뉘우치고 갱생하려는 한 인간의 고민과 현실적인 문제를 잘 담고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2003)에서 키도는 죽음의 경계를 넘어 곧바로 복수의 칼날을 꺼내 들지만 오태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에게 쏟아지는 굴욕을 참고 또 참는다. 팔의 힘줄을 끊어서라도 폭력과 절연하려는 그의 진심이 결국 무너졌을 때의 슬픔은, 견디는 데 이골이 난 사람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준다. 모두에게 훌륭한 영화가 될 순 없겠지만, 깊이 공감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연상호 감독은 내놓는 작품들마다 시네필들의 혹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연상호 감독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K-좀비’의 고전이 되어버린 <부산행>(2014)도 처음에는 부성애를 강조한 신파극이라며 혹평이 있었다. 눈물샘을 노리고 억지 감동을 자아내는 영화는 필자 역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부산행>은 대단히 영화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좀비로 쑥대밭이 된 서울, 부산행 KTX 탑승객 중에 좀비가 숨어있다’라고 하는 설정 자체가 극심한 위기감을 자아내지 않는가. 소재나 설정 자체만으로도 흥미진진해서 계속 찾아보게 되는 영화는, 사실 크게 미학적인 기준을 가지고 잴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재미있기’ 때문이다.
마이클 베이 감독의 <트랜스포머>(2008)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영화관에서 ‘우와’하고 함성을 질렀다. <아이언 맨>(2008)을 처음 봤을 때는 이보다 더 멋진 히어로 무비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 장담했다. 두 영화 모두 전형적인 서사에 유치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장면이 종종 나오기도 했지만, 세계관을 밀어붙이는 힘이 강렬했다. 예술적인 미장센, 강렬한 서사, 매혹적인 의미 등을 전혀 갖추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이 영화들도 20번씩은 봤다. 그저 ‘흥미’라는 요소 하나만 가지고 말이다.
아카데미를 석권하고 칸과 베를린을 오가는 멋진 작가주의 영화들 역시 몇 번이고 다시 보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지만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다. 내가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3)을 딱 두 번 봤는데,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2012)이나 한재림 감독의 <관상>(2013) 같은 작품은 20번을 넘게 봤다. 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5관왕을 차지한 션베이커 감독의 <아노라>(2024)는 딱 한 번 관람했지만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퍼시픽 림>(2013)을 10번은 봤다. 서사만 놓고 보면 <퍼시픽 림>은 <아노라>의 적수가 되진 못한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아노라>보다 <퍼시픽 림>을 더 많이 보지 않았는가. 작품의 수준이 애호를 결정하는 것이라면, 이런 관람 행태는 분명히 이상하지 않은가?
영화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 기준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찾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들이 손뼉 치는 영화가 실제로도 좋을 확률이 있다. 거기서 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영화 보기에 익숙해지면 남들이 혹평을 남겼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너무나 멋진 영화가 생긴다. 가슴에 품고 있는 나만의 인생 걸작이 저마다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물론 더 좋은 작품을 아직 만나지 못해서 그게 최고의 걸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히 내가 <아노라>보다 <퍼시픽 림>을 더 많이 봤던 것처럼 각자의 애호가 반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성해나 소설가의 단편소설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의 초반부엔 주인공의 흥미로운 독백이 등장한다.
“나는 예술에 도취된 사람들이 불편했다. 자칭 시네필이었던 전 애인에 대한 반감 때문이었다. 어떻게 구로사와 아키라를 몰라? 다른 건 몰라도 <란>은 꼭 봐. 명작이니까. 타인에게 자신의 예술적 취향을 강요하던 사람. (중략) 어떻게 <퐁네프의 연인들> 보면서 조냐? 너는 진짜…… 심미안이 없다며 면박을 주던 사람” 성해나,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 중
매체에 널리 퍼진 영화평론이나 리뷰를 보고 있으면 기시감이 든다. 그리고 평범한 ‘영화감상인’의 기준에서는 뭔가 엄청난 벽이 느껴진다. 개뿔 졸려서 1시간도 못 보겠는 영화를 극찬하며 이걸 찬양하지 않으면 어쩐지 무지한 사람처럼 비치게 하는 그런 글들에 질린 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영화평론가로서 그런 글을 쓸 때가 있지만 그런 현학적인 글이 작금의 영화 담론 붕괴를 가속화 한 면도 적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은 영화’라고 해서 그게 곧 ‘좋지 않은 영화’가 되는 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할 수 있다. 나는 스스로 영화 속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는 요소를 마련하고 각자가 자기 취향에 맞게 인생 역작을 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전문가처럼 미식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허접한 음식을 뒤적이지는 않는, 맛집을 찾는 애호가의 수준에서 평가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찾는 방법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은 ‘아, 이게 이래서 좋은 거지’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제시하고 나아가 영화에 대한 자기 기준을 바탕으로 감상까지 남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내서가 될 것이다. 어려운 영화와 이론 없이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본격적으로 ‘표준 영화 해석’을 시작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