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by 민경민

*2024.1.19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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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기도, 얼떨떨하기도 했던 신춘문예 당선 여파가 한바탕 몰아친 후에 나는 다시 현실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축하 인사를 건네받으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 혹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느냐' 같은 것이었다. 그래, 앞으로는 뭘 할까.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막상 말하려고 보니 말문이 막혔다(2년 뒤 지금도 딱히 뭐 힘주어 하는 건 없다-필자주).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를 보면 인류를 침공한 외계 생물체의 피를 뒤집어쓴 주인공이 매일 삶이 리셋되는 능력을 얻고, 실전 경험을 무한대로 쌓으며 최강의 전사로 거듭난다. 그런데 적의 중추를 제거할 핵심적인 수단을 얻은 지점에서 "다음은 어떻게 해야 돼?"라는 동료의 질문에 주인공 케이지는 "처음 와 본 지점이라 잘 모르겠다"라고 한다. 사실 그전부터도 이미 케이지는 계속해서 '처음 와 본 지점'에서 무수한 죽음을 겪기는 했을 터이다. 하지만 상황이 누적될수록 멀리 간 지점의 경험은 점점 희귀해진다. 이를테면 오락실에서 동전 하나로 끝판왕을 깰 수 있는 '원 코인 클리어'가 챕터를 넘길수록 더더욱 힘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처럼 내게도 지금 이 시점의 경험은 예고도 없이 찾아온 상황이며 그다음의 일을 예측하기 힘든 최초의 지점이기도 하다.


등단을 꿈꾸며 분명 어렴풋이 그려온 것들도 있다. 나는 사람에 관한 글을 쓰면서 정작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독서 모임이나 문화 살롱 같은 걸 운영해보려고도 했다. 그러면서 또 한 편으론 이전에 생각만 해두었던 원고를 갈무리해서 책을 내고자 하는 의욕도 있었고, 반대로 한 석 달 동안 모든 활동을 잠정 중단하고 미뤄두었던 독서만 주야장천 하고 싶기도 했다. 어떤 것은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고, 또 어떤 것은 내 의지와는 관련이 없는 일도 있다. 혹은 두 가지가 동시에 겹쳐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다. 좌우지간, 무엇을 선택하든 나는 그 '계획'이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있는 게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한결같이 대답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하던 일이나 하면서 일 벌이지 말고 상황을 보겠다고 말이다.


회사원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기업에 입사 면접을 보러 간 신입은 '회사에서 어떤 인재로 거듭나겠냐'는 질문을 꼭 듣지만, 기실 기억도 잘 안 나는 그 다짐을 10년 차 '짬 바이브'가 생길 때에도 한결같이 지키고 있거나 이룬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은 주어진 업무를 어떻게든 쳐내다 보니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됐을 게다. 그게 과연 치밀한 계획의 일부였을까. 계획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계획을 잘 하는 사람치고 계획이 계획대로 된다는 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내 경험상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문 초인이거나 흔한 사기꾼이거나 둘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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