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시트>(2019)
"뭐만 하면 다 잘될거라고 하냐!"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영화는 청년문제를 재난 영화라는 틀로 포장하고 있다. 암운이 드리운 도시. 청년들이 기거할 자리는 점점 사라져가는 가는 가운데 아등바등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가는 두 주인공의 모습은 작금의 청년들을 너무도 잘 은유하고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진다.
청년 문제를 성공적으로 이미지화 한 것에 대해서도 박수를 보내고 싶지만 무엇보다 <엑시트>를 보면서 감명 깊었던 것은 청년이 무엇을 갈급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짚어낸 데 있다. 이 영화는 청년이 겪는 고통을 이미지로 잘 치환해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지만, 청년들이 그 스스로의 존재의미로부터 겪는 상실감을 짚어냈다는 점에서 '그저 다독이다가 끝나는' 평범한 영화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둔다.
일찍이 헤겔은 "인간은 노동으로 자기자신을 산출"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같은 과정은 '자기외화'라고 할 수 있는데, 자기외화는 쉽게 말해 그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파생된 어떤 활동의 결과물로 그것이 자신을 정의하지만 그 자신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실체를 말한다. 자기외화를 자신의 본질에 비추어 통합시켰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내귀환'을 맞아 자기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서 활약할 수 있게 된다. 헤겔이 언급한 자기외화는 정신적인 수준의 자기수양에 그쳤지만 마르크스는 이에 덧붙여 현실적인 모습, 예컨대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써, 자기외화가 본질을 해치는 과정은 분쇄하고 인간이 마음껏 자신에게 탐닉하여 스스로의 가치를 세울 수 있게 자유로워질 것을 주문했다.
그런 점에서 <엑시트>는 자기외화의 과정조차도 실패한 인간과 자기외화의 과정 속에서 자기 귀환에 실패한 두 인간을 제시한다. 바로 용남(조정석)과 의주(윤아)다.
*영화 <엑시트>(2019)
용남은 전형적인 취준생으로 제때 취업에 실패하고 가족들에게 들러리 취급이나 받으며 어린 조카에게까지 무시당한다. 청년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역할의 부재다. 인간은 그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든, 살아갈 이유를 준거하기 위해서든 어떤 역할을 맡아야만 한다.
그런데 취준생의 역할은 무엇인가? 생활을 영위하고자 무엇인가를 부지런히 준비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분명히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정의할 수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준비하고 있는 역할이란 장차 이루어질-그나마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의 것이지 지금 현재 기능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프닝시퀀스에서 용남이 보여준 철봉신처럼, 그들은 마치 준비운동을 하느라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선수와도 같다. 반면 준비가 됐든 안됐든 일단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은 벌써 수 킬로미터를 전진해있다. '사실 준비 운동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의심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준비운동을 탄탄히 다진 이들이 쏜살같이 나아가는 것을 보면 또 쉽게 관두지도 못한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정의해야할지 모르는 자기효능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가 '취준생'들이 피부로 느끼는 실태다.
*영화 <엑시트>(2019)
그렇다면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의주는 어떤가. 그녀는 비록 역할은 부여받았으나 역할에 잠식당해 그 자신의 자유의지와 가치를 잃어버린 상태에 놓여버렸다. 용남이 헤겔이 언급한 자기외화 그 자체에 실패한 인간인 반면에 의주는 마르크스가 우려한 인간의 외적 강압, 사회적 요소로 인해 자기외화에 함몰된 인간이다. 가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노동은 그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발휘되어야 한다(여기서 의미하는 노동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수행해야하는 활동 그 모든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원치 않는 노동, 단지 살아남기 위해 수행하는 노동은 오히려 자신의 본모습을 억압한다. 문제는 대개 원치 않는 노동을 할때 노동의 속성뿐만 아니라 노동의 과정 속에서도 본성의 억제를 받는다는데 있다. 의주에게 작업을 거는 점장처럼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노동자를 이용하는 작태는 흔하디 흔하다.
대부분의 청년들은 약자다. 가진 것이 없고 권한도 제한적이다. 그런 가운데 위계를 앞세워 원치않는 것을 강권한 결과 때로 취업한 젊은이들은 직장내외에서 자기 자신을 수양할 기회를 잃고 만다. 그런가하면 직장 내에서의 능력을 기준으로 인간이 평가되고 그로써 철저히 폄하된다. 의주가 클라이밍 여제인 것과는 별개로 직장 내에서는 행사를 잘 진행했을 때만 인정받는 사람일 뿐이다. 그것은 <풀 메탈 자켓>(1987)의 강렬한 훈련소 시퀀스처럼 밖에서 무엇을 했건, 갓 입영한 해병들이 '구더기'로 불리며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과도 같다.
*영화 <엑시트>(2019)
자신의 본질을 찾지 못한 채 그 존재의미를 잃어버린 인간들. 그것이 <엑시트>가 말하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이다. 살아남기 위해 종량제봉투를 둘둘 감은 용남과 의주는 스스로를 쓰레기라 칭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모습 그 자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그러나 청년층을 대표하는 두 주인공 의주와 용남은 그럼에도 아랑곳않고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온힘을 다해 노인과 어린아이들을 구한다. 실로 한 국가의 성장동력이자 주요 경제활동인구인 청년들은 그 위아래 세대를 부양해야하는 짐까지 짊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끔찍한 고통을 겪어가면서 다른 인간들에게 도움 주는 일을 찾아야하는"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이 적확하게 들어맞는다.
희생만을 강요받는 그들. 이 세계에 가장 필요한 존재임에도 끝내 그들을 주저앉힌 건 그들이 구해낸 세상의 단념이었다. 그런가운데 출구 없는 절망 속에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희망의 끈을 이어준 것도 결국은 똑같은 처지에 놓인 청년들이다. 드론과 인터넷 방송,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그들만의 창의적인 방법과 일견 쓸모없어 보였던 젊은이들의 특화된 전문성이 순수한 열정과 삶을 향한 의지를 만나 난국을 헤쳐나간다. 젊은이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자기자신을 구하는 이과정은 참된 자기외화-자기회귀로서 진정한 주체적 인간의 탄생을 그리고, <엑시트>는 사회 속에서 젊은이들의 역할이 어떻게 주어져야하는지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말로만 잘될거라 다독이며 젊다는 이유로 국밥 한 그릇 살 돈도 쥐어주지 않는(갈취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이 세상의 방식은 오만하고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고 청년 문제에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응당 젊은이들에게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낡은 방식을 고수할 것이 아닌, 그들만의 방식을 스스로 채택할 수 있는 길을 많이 만들어 줘야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묵묵히 제 갈길을 달리는 청년들에게, 필자도 같은 청년으로서 <엑시트>의 방식대로 '쓸모없음의 쓸모있음'을 외치며 또래의 청춘들을 응원하고 싶다.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자네가 하는 말은 쓸모없어."
그러자 장자가 대답했다.
"쓸모없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쓸모 있는 것에 대하여 말할 수 있어. 하늘과 땅은 넓고 또 크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걸어갈 때는 발을 디딜 만한 넓이의 땅만 필요할 뿐이야. 그렇다고 만약 땅을 디디고 있는 부분을 재서 그 부분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은 땅속까지 파 없애버린다면, 그래도 발을 딛고 있는 부분의 땅이 사람들에게 쓸모가 있겠어?"
혜자가 말했다.
"쓸모없지"
장자가 말했다.
"그러니까 쓸모없는 것도 쓸모 있다는 게 분명하지."
장자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