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상대를 믿지 않는데 과연 목숨이 걸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사진 : <분노의 질주 : 홉스&쇼>(2019)
<분노의 질주 : 홉스&쇼>를 보면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을 꼽으라 한다면 홉스(드웨인 존슨)와 쇼(제이슨 스타뎀)가 CIA 지부에서 납치당한 해티(바네사 커비)를 구하러 뛰어내리는 장면을 들고 싶다.
함께 해티를 구하자는 홉스의 말에 의기투합하는가 싶다가도 중요한 순간에 발을 빼고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쇼에게는 아이러니 하게도 어떤 비열한 느낌보다는 상대를 향한 강한 신뢰가 느껴진다.
일전에 필자가 '영화 속 명장면 철학 읽기 - 편견을 넘어서는 방법' 편에서 언급한 드리스의 태도처럼, 한 인간을 인정하는 것은 때로 그에게 무례할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뭔가를 부탁할 때 드러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과하면 과신(過信, 지나치게 믿음)이라는 무례로 이이지기도 하지만, 한 인간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길은 그 자신의 능력이 충분히 작동할 수 있다는 무언의 신뢰로도 이어져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홉스와 쇼는 영화 런 타임 내내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폄하하지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알게모르게 서로에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일을 맡긴다. 과학신봉단체 '에테온'의 본거지로 쳐들어갈 때도 입구에서 둘은 서로가 얼마나 적을 빨리 처치할지에만 관심이 있지 두 사람이 그곳에서 당할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즉, 두 사람은 서로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 능력 또한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호시탐탐 이익을 독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교묘히 곤란에 빠뜨리며 그 과정을 들키지 않고자 수많은 겉치레와 가면들을 쓰는 행태에 질려버린 현대인들에게는 홉스와 쇼처럼 서로를 '신랄하게 믿어버릴' 기회가 없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그저 말뿐인 아름다운 언어와 형식이 지배하는 현실보다 유독 크게 감명을 준다.
두 사람은 분명 자기 자신을 높이기 위해 타인을 무시하는 방법이 아닌, 그 스스로 자신을 극복하는 방식을 택한다. 홉스와 쇼가 서로를 비난하며 티격태격하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이 성장할 기회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나칠 정도의 자기중심적인 해결방식을 추구하는 것 또한 그 모든 과정에서 도래되는 책임을 누구에게도 전가하지 않고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뜻이 반영돼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건의 해결이라는 본질적 문제에만 집중하지, 벌어진 일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지도 않는다.
책임을 회피하느라 사건의 본질을 잊어버리는 모습들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서로를 굳게 믿은 채로 사건 해결에만 골몰하는 홉스와 쇼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가슴 깊숙한 곳에서 근질거리던 답답한 뭔가가 깨진듯 통쾌함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서로에 대한 비난과 불신만이 가득한 이 사회 속에서 홉스와 쇼 같은 굳건한 신뢰 관계를 이룰 수 있을까. <분노의 질주 : 홉스 앤 쇼>가 보여주는 브로맨스가 탐나는 까닭은 어쩌면 점점 희미해지는 인간 존재가치에 대한 향수이자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