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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이 상실된 시대 속에서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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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스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살인마 안톤이 보여주는 광기는 탐욕이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자신만의 규칙과 신념을 따른다는 점에서 끝 모를 공포를 낳는다. 동전 던지기 하나로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그는 범죄조직의 수장은 파리 목숨 다루듯이 하면서도 구멍가게의 주인은 살려준다. 종잡을 수 없지만 자기 생각에 따라 확고한, 타협의 여지조차 없는 그의 살인행각은 처음부터 설득이나 회유가 불가능하기에 마주하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역시 안톤을 답습한 레이(이정재)가 등장한다. 자기를 건드린 인간은 반드시 피를 봐야 한다는 의지 아래 어떤 이익이나 입장을 희석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루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 죽을 위기조차 마다하지 않고 인남(황정민)을 쫓기에 이른다.


인간이 인간을 팔아먹는 일이 일상화된 세계 속에서 주검을 파는 두 킬러는 그렇게 서로 대적하게 되지만 인남은 안톤과는 다르게 또 다른 형태의 킬러, '레옹'을 답습하면서 갈 때까지 가버린 세계 속에 미약하나마 희망의 이정표를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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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레옹>(1994) 스틸



인남이 답습한 레옹과 레이가 답습한 안톤의 분명한 차이는 그 스스로의 행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레옹 역시 무자비한 킬러인 것은 안톤과 다름없지만 그는 지난날에 대한 회의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그 자신을 체벌하고 있는 인간에 가깝다. 행복이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스스로 불행을 불러들인 그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불행이라는 채찍을 가하고 있는 종류의 인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옹은 비록 죄악을 업으로 삼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것으로 되돌아갈 여지가 있다. 끝내 그가 마틸다를 탈출시키며 다시 잊어버린 생의 의지를 다졌듯 인간으로서 마땅히 추구할 행복에 대해 그 본질을 완전히 잊어버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넘어선 (승화나 초월이 아닌 범주 밖의) 임의의 사상과 규칙들로 인해 무자비한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세상이라면, 그 와중에 인간성을 되새길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엉망진창인 세계라도 회복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모든 일에 동전을 튀기며 각자의 속사정을 무시하는 세계의 '섬뜩한 시선들' 속에서 인간이 완전한 파멸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인간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도로 튕겨져 나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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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스틸



무엇을 위해 이런 행동과 일들을 벌이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해서 행복 내지는 삶을 말할 수 있는 인간은 결국 그것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삶이 목적인 보통의 인간들은 삶을 담보로 결과를 요구하는 일에는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옥도가 벌어진 세계 속에서 뜻 없이 떠돌지언정 그게 무슨 일이든 벌어져도 좋다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삶을 갈구하는 인간에게 궁극적인 목표란 '규칙'이 아니라 바로 행복한 삶 그 자체이다. 가질 수 없었을 뿐,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 아닌 레옹이 안톤과 같은 킬러이면서도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발버둥 쳐봐야 인간을 담보로 한 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렇게 될 거란 걸 알고 있었잖아."라는 안톤의 대사에 레옹의 최후로 맞받아치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결말은 인간을 한낱 소모품으로 전락시키는 세계의 이성과 수많은 기치들을 파괴한다.


인남이 본래 가고자 했던 '중립국', 어떤 의도나 입장을 둘러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곳엔 끝내 그의 마틸다와 화분인 유이(박정민)와 유민(박소이)이 다다르고, 마틸다가 레옹의 화분을 공원에 심은 것처럼 유이는 인남의 뜻에 따라 온갖 투쟁과 주장이 뒤섞여 맞서거나 도망칠 수밖에 없는 세계가 아닌, 드넓은 포용력으로 가득한 해변에 유민을 데려다준다.


서로의 입장을 무시하며 사람을 도구로만 활용하는 세상이라지만 아직까지 세계가 피바다로 물들지 않았다면 그건 삶의 이유를 아는 이들이 도를 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1차 세계대전의 영국군과 독일군이 전선에서 암암리에 의도적인 오조준을 하면서 서로를 살린 것처럼 말이다. 닥쳐온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인간적으로 돌아가는 삶 속에 뛰어들게 됐다하더라도 모두가 그 스스로 인간임을 저버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안톤이나 레이 같은 인간들은 탄생하겠지만, 삶의 이유를 아는 이들이 있는 한 그들이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대로를 활보하는 일 만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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