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테넷>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인버전'이다. 미래와 과거가 공존한다는 부류의 영화는 일찍이 많이 있었고 특히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할아버지 역설'을 극한으로 끌어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방향으로 흐르는 시간의 순서를 바꾸는 일이었다.
그런데 <테넷> 속 인버전은 시간을 역행하는 걸 넘어 아예 순행하는 시간 속에 역행하는 존재를 함께 담아낸다. 그것도 별개의 사건이 아닌, 순행하는 존재와 역행하는 존재가 얽혀 하나의 완전한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극 중 인버전 기계와 시간 역행은 공간의 극단적인 회전 혹은 왜곡에 의한 CTC(닫힌 시간 곡선, closed timelike curve) 가설을 바탕으로 하지만 처음부터 인버전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은가, 그런 논의는 무용하다. 정작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가 시간축이 어긋났음에도 자연스럽게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시간의 흐름이 정확하지 않다고 가정할 때, 어떤 존재가 시간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방법은 그 존재의 모든 것이 일단 정해져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어떤 시간과 공간에 있어도,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든 순행하든 그 무엇도 상관없는 일이 된다.
1시간 동안의 인생이 있다고 하자. 그 인생의 23분쯤을 5분간 되돌려보든, 혹은 5분간 재생하든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어떤 식으로 돌려도 그 범위 안에는 존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우리의 인생은 이미 정해져 있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죽음이다. 당장 내일은 모르지만 우리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 죽음으로써 인생이 끝이 나고, 우리의 죽음이 확실시된다면 지금 현재와 우리의 죽음 사이에 있는 나의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미 채워져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닐에게 되물었듯, 그것은 어찌 보면 운명과도 같다. 그렇다면 이미 정해진 일을 다시 바꿀 수도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해진 사건의 범위'란 운명과는 다르다.
Memento mori
먼저 우리는 우리가 죽는다는 걸 어떻게 아는가. 그건 내 의식 밖의 정보에 근거한다. 나와 같은 의식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외부의 존재들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나의 죽음을 추측한다. 그런데 그런 추측을 믿기 이전에 추측하는 과정이 옳은지를 살펴야 한다. 감각과 지각이 모두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나의 존재만큼이나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는 정보들이 있다. 예를 들어 '1+1=2'라거나 평면 위에서 삼각형 내각의 합은 언제나 180도라는 것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 오는 정보이지만 늘 타당하다. 데카르트적 의심과 유추를 통해서 우리는 외부에 대한 신뢰를 근거하고, 관찰과 경험을 통해 비로소 죽음이라는 현상 또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과정이 나의 정신 속에서 가능하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나의 정신 활동이 추구하는 사유의 결과물이 사실이라는 것 까지 믿을 수 있게 된다.
같은 이치로 우리의 삶이 지속된다는 사실 또한 불분명한 근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존재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증명되는 하나의 이치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게 된다는 것, 죽기 전까지 살아간다는 건 사실이다.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는 경험하지 못한 미래가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죽음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그전까지 우리의 미래는 있다. 그 말인 즉,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이 이미 나라는 존재의 한 결인 것이다. '벌어진 일은 이미 벌어진 일' 이듯이 무엇인가 바꾸고 교정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정해져 있는 '나들'의 자아를 정립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일이다. 즉 나는 나라는 존재의 현 시각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며,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다.
? x Protagonist = Tenet
영화 <테넷>의 'Tenet'은 근원이 되는 사상이나 이념 따위를 뜻한다. 그런데 이 단어는 거꾸로 읽어도 'Tenet' 그대로다. 시간이나 방향은 중요하지 않다. 'Tenet'이라는 단어가 차지하고 있는 만큼의 공간과 시간의 양만이 필요할 뿐,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들어있는 존재의 의미다. 이 세계에서 가장 위협적인 것이 인버전 된 핵무기나 신무기도 아닌, 정보를 담은 물질인 '알고리즘'이었다는 것처럼, 시간의 결을 관통하는 가장 위협적인 것은 존재를 정의하는 정보 그 자체다.
<테넷>에서 주인공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에 '프로타고니스트(주도자)'로 표시될 뿐이다. 프로타고니스트는 극에 등장하는 주연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지만 주체적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리포트 비행기 폭발 신에서 주인공은 인버전 된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흥미롭게도 주인공 그 자신이 인버전 하여 온 것으로 그 자신의 안타고니스트가 된다.
우리 자신의 가장 큰 대적자는 자신이다. 과거나 미래에 어떤 책임을 떠넘기고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일들은 과거나 미래라는 절대적 시간이 있어서 내가 개별적인 존재로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이미 현재의 나와 이어져있다. 영화에서는 인버전 기계가 등장하지만 실은 인버전은 매 순간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로 분리되고 있으며, 인식을 갖고 있는 내 자아가 양방향으로 흩어지는 '나들'을 맞이한다. 지금의 나는 미래와 과거의 나로부터 분리된 게 아니다. 나라는 존재 전체의 현재에 있을 뿐이다.
'테넷'을 설립한 이가 결국은 주인공이었고, 그 모든 것들이 미래와 과거, 그리고 현재의 내가 '합동작전'을 벌인 것이라면, 현재 나의 존재는 이미 결과물이다. 마치 어떤 글 한 편을 완성할 때, 첫 문장을 과거의 내가 썼고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미래의 나이듯이 말이다. 글 한 편은 글 전체를 일컫는 것이지, 매 문단에 속해있는 단어를 지칭하는 게 아니다.
다만 우리는 과거와 미래가 흩어져가는 현재에서 단 하나, '행동을 믿을 권한'을 가진다. 닐은 알고리즘 탈취 작전에서 역행하는 시간과 순행하는 시간이 교차하는 현재, '5분'에서 주인공이 위기에 빠질 것을 안다. 할아버지 역설의 인버전 형태인 그 결단에서 닐은 죽을 예정인 사람을 살리고 테넷을 완성한다.
극 중 인버전 터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선택에도 반대편에서도 나의 모습이 보인다는 것, 즉 내가 살아있기에 어떤 식으로든 미래가 완결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 현재의 행동을 근거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조커의 '마지막 장난'에서 서로의 기폭장치를 들고 망설이는 시민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살아있는 건 그들이 버튼을 누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이것을 매 순간 인버전 중인 나에게 적용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내가 살아 있는 건 내가 (나의 의지로) 죽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나는 왜 죽지 않고 살아있는가. 나를 정의하는 무엇인가 나의 죽음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그러므로 시간이나 타자의 정보 따위는 애당초 필요 없는 것이다. 나의 존재는, 나의 의지로만 완성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