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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로 읽는 영화 <반도>

by 민경민
*사진 : 영화 <반도>(2020) 스틸



니힐리즘의 세계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서양의 역사가 초감성적인 요소들로 점철돼왔다고 여겼다. 또한 그는 서양에 팽배한 플라톤주의와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감각과 감성을 초월하는 세계가 있다고 믿고 형이상학적 세계에 권위를 부여해왔다고 보았다.


니체가 호기롭게 선언한 '신은 죽었다'는 말은 종교적 유일신의 배제가 아니라 인간 전체를 이합집산시키고 있었던 모든 권위의 멸망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가 될 수도 있고, 국가가 될 수도 있으며, 어떤 특정 집단과 주장일 수도 있다. 좌우지간 니체는, 인간이 자기 존재의 각성을 통해 그러한 형이상학적 가치들이 무의미하게 바뀌는 지점이 온다고 보았다.


그런데 인간이 초감성적인 가치와 이념을 벗어났다는 것은 권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삶의 방향과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기도 하다. '신의 죽음' 이전까지는 비록 인간이 자유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저 초감성적인 이념들에 기대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인간에게는 그저 반복될 뿐인 일상과 무엇인가 끊임없이 태어나고 변화하기만 할 뿐인 세계만이 주어지고 만다.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그저 살아내야 하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지만 그 속에 정착하지도 못하는 중간상태(Zwischenstand)에 처한 인간들이 느끼는 허무와 공포가 바로 니힐리즘(Nihilism)인 것이다.


연상호 감독의 <반도> 역시 니힐의 세계를 주목한다. 전편 <부산행>에서 좀비는 철저히 인간 이성의 산물인 돈과 주식 때문에 창궐하게 된다. 인간의 이성이 지배하던 세계는 그들 스스로의 욕망으로 파탄이 나버렸다. 그래도 마지막 방어선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부산조차도 무너지면서 한반도 남쪽에는 도시와 국가의 의미를 완전히 잃어버린 공허의 세계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찬란했던 문명도 그 의미를 상실한 때에는 그야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세계가 된다. 들끓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 세계는 철저히 고립무원의 지경에 놓이지만 놀랍게도 그 속에서조차 살아있는 인간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니힐리즘의 핵심이 바로 그것이다. 최고로 불리던 가치가 무의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인간들은 그 속에 놓여있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러나 자신들이 의지하던 가치가 무너진 때에는 어디서 삶의 목표와 방향을 찾는가? <반도>에서 국가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군 조직을 유지하며 약탈을 일삼는 631부대처럼 이념의 권위에 편하게 삶의 방향과 목표를 기대왔던 인간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의 상실과 동시에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낸다. 설령 이념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다해도 이미 인간은 뼛속까지 이념의 권위에 물들어 있는 것이다.


*사진 : 영화 <반도>(2020) 스틸



황혼이 깔린 반도와 '우상의 황혼'


인간이 그러한 세계를 구성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형이상학적 세계를 불신하면서 소위 참된 세계에 대한 신앙을 금하는 니힐리즘의 마지막 형태가 나타난다. (중략) 그런데 인간은 이러한 생성의 세계를 이제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견디지는 못한다.

니체, 『힘에의 의지』중


이념을 벗어난 인간이 또 다른 이념으로 새로운 우상을 만드는 과정은 작품 속에서 색채로 드러난다. 온통 누르스름한 이 영화의 색채는 해가 저물어갈 무렵의 황혼 빛을 띠는데, 이 황혼 빛은 니체가 1888년에 저술한 <우상의 황혼>을 의미하기도 한다. 니체는 니힐리즘의 세계에 처한 인간들이 그 스스로 이념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극한 숭배의 습관 때문에 자꾸만 새로운 우상을 낳는다고 보았다.


마치 은은한 잔열을 내며 꺼져가는 숯불처럼 초월적 가치가 바스라진 세계 속에서도 인간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그 가치가 남아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빛은 인간의 인위로 거절할 수 없을 만큼 강했던 한낯의 빛과는 달리 쉽사리 위상을 바꿀 수 있을 만큼 약해서 인간의 나약함(이상에 기대려는 마음)을 만나 더 위험한 지경의 우상을 낳기에 이른다.


실로 니힐리즘의 세계 속에서 황혼의 빛을 되살린 인간들은 영화에서 묘사되듯이 인간을 한갓 장난감으로 만들어버리는 '숨바꼭질 경기장'처럼 통제되지 않는 광기의 극단을 보여준다. 더구나 그것은 이념의 빛이 완전히 사라진 밤중에도 인위적인 조명탄으로 터져나오면서 다시 좁은 세상을 비춘다. 여기서 좀비들은 자아의지를 잃고 맹목적으로 우상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상의 빛과 소리를 따라다니며 또다시 인간에 의한 거대한 위험을 만들어낸다.


이념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도 더 무서운 일은 그것이 무너진 뒤에 니힐리즘이 닥쳐왔음에도 끝까지 숭배하는 일이다. 이때 이념은 각 개인의 사정과 현실에 비추어 더 왜곡되고 변질된다. 니체가 이념의 빛이 사그라드는 황혼조차도 '망치'로 깨부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상이 무너진 세계에서 다시 우상을 불러들이는 그것은 분명히 니힐리즘의 극복이 아니다. 또 다른 환상일 뿐, 니체는 언제나 인간이 그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초극하기를 원한다.


"네가 앞서서 달리고 있다고?-목자로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또는 예외로서? 세 번째 경우는 아마도 도주자일 것이다. 양심에 관한 첫 번째 질문."
"너는 방관자인가? 아니면 관련자인가?-또는 외면하는 자, 떠나버리는 자인가? ... ... 양심에 관한 세 번째 질문."
"너는 함께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앞서 가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홀로 가기를 원하는가? ... ...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원하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양심에 관한 네 번째 질문."

니체, 『우상의 황혼』중


니체는 니힐리즘에 처한 인간들에게 말한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모든 상황에 안주하고 나 자신을 내버려 둘 것인지, 아니면 내 존재 의미를 바꿀 수 있을 만큼 나를 강하게 만들 것인지. 그런 점에서 <반도>는 니힐리즘에 처한 한 인간을 중심에 두면서 니체가 제시한 인간의 길을 살핀다.


영화의 주인공인 한정석(강동원) 역시 니힐리즘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무화되는 경험을 한다. 그는 군인으로서 국가라는 소속을 잃고, 가족들을 눈 앞에서 잃음으로써 존재 목적도 함께 상실한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린 채 그저 연명하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모두 죽었을 것'이라며 자기 존재의 이유를 애써 합리화한다. 그러나 그가 머릿속에서 빚어낸 생각은 현실을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고 바꿔주지도 못한다.


결국 현실을 외면할 뿐인 정석에게 매형 철민(김도윤)은 반도로 돌아가 달러를 회수하는 작전에 대해 그 당위성을 주장하면서 '시도는 해보았는가?'라는 말로 그가 갖고 있던 굴레를 벗겨버린다. 물론 이미 멸망한 세계에는 멸망을 야기한 욕망들(좀비)보다도 더 무서운 우상들(살아남은 인간들)이 기다리고 있다. 정석 일행은 새로이 피어오르는 우상의 빛에 질식해 하나둘 쓰러지지만, 그는 반도 내의 또 다른 초월자들을 만남으로써 자신을 엄습하는 포기의 질문과 덧없는 허무를 조금씩 이겨낸다.


"그날 우리를 지나친 차만 31대였어요."


영화 중반부에서 정석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이 과거 자신이 외면했던 일가족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괴로워하면서 끝내 고백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민정(이정현)은 덤덤히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책망하거나 상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흔쾌히 수긍하면서, 그 사건의 죄의식을 흐지부지 흩트리지 말고 당당히 돌파할 것을 요구한다. 니체가 요구하는 인간상도 바로 그것이다. 현실의 무상함과 고통을 긍정하면서 오히려 그것들을 즐기며 자신을 강화하는 인간들.


고통에 침식받지 않고 오히려 고통의 존재를 인정해 그렇다면 극복해서 더 이상 초감성적인 이성에 기대지 않는, 자기 자신이 직접 지상에서 극복하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아가는 인간의 힘을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힘에의 의지로 고양된 인간들은 최고 선이 지시하는 가치가 아닌 자기 자신의 행적 하나하나가 모두 삶의 의미로 전환된다. 이때 고양된 개인을 속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에게는 세상을 또렷히 직시할 눈이 있으며, 어떤 현혹된 말에도 휘둘리지 않고 현재하는 세계를 헤처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


나의 의지로 삶의 의미가 개척되는 지경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니체가 보기에 해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정석은 더 이상 지난날의 죄의식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인지하고 나아간다. 지난날의 회한으로 닥쳐오는 고통을 피하지 않고 그를 야기한 행동의 정반대의 선택을 함으로써 무의미했던 자신의 존재를 의미 있는 존재로 만들고 고통을 극복하기에 이른다.


*사진 : 영화 <반도>(2020) 스틸



인간성의 회복만이 답이다


절대적인 윤리와 실천을 강조했던 이마누엘 칸트도 사회와 지성의 실체를 비판하던 루소를 접하고는 다음과 같은 반성을 남긴다.

"나는 천성이 학자이고 지식에 목마른 사람이다. 한때 나는 이것만이 인류에게 영광스런 일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루소가 내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내 멋대로 지식에 부여했던 우위는 사라졌다. 이제 나는 인간을 존중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성적인 생각, 합리적인 방법은 심지어 인간의 목숨마저 희생시켜도 좋다고 한다. 니체는 이 부분에서 인간이 심각한 위험에 직면했다고 판단했다. <반도>의 결말부에서도 민정은 상처 입은 채 가족과 정석의 퇴로를 봐주다 끝내 좀비들 속에 고립되지만, 이내 자살을 시도하는 그녀를 보면서 UN군 지휘관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일'이라고 평가하며 그녀의 자식들을 헬기에 태우려 노력한다.


그러나 이미 니힐리즘을 극복한 정석은 또다시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뜯어먹는 지옥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외면하는 것이 아닌, 본인의 의지로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투신한다.


이는 언제부턴가 해피 엔딩을 기대하기 어려운 영화 속에서 인간 존재가 부정되고 말살되는 우리의 현실에 비춰봐도 지나치게 이성에 함몰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이것은 눈물샘을 자극하려는 의도적인 신파가 아니라 지극한 이성에 기대어 인간의 몰살을 방관하는 우리 이성에 대한 니체다운 경고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반도>의 결말로부터 인간성의 회복을 주문받는다. 이 세상이 지옥이라고 그저 방관하고 어쩔 수 없다며 회피할 것인가. 이념의 권위를 신봉하고 차가운 이성의 계산기를 돌려가며 우리 삶을 재단질 할 것인가. 그러한 생각은 확실히 위험하다. 나 자신에게도,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말이다.


헬기 탑승 후에 준이(이레)가 지옥을 벗어나 자유로운 세상으로 떠난다는 지휘관에 말에 '이 세상도 나쁘지 않았다'고 하는 말의 저의는 이념이 권위를 갖는 세계 속에서 죽음조차 합리화하는 것보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인간을 먼저 생각하는 세계가 더 낫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준이와 그 일행들은 물리적으로 생존이 불가능한 세계를 탈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시 이성적인 가치가 권위를 갖는 세계로 돌아가지만은 인간성이 중심이 되는 세계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이는 단지 극 중의 마지막 장면에 국한되지 않고 실로 작품 속에서 니힐리즘의 세계에 빠졌다가 다시 극장 밖으로 나와 이념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돌아가는 우리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떠한가. 지옥을 외치는 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좀비처럼 서로를 물어뜯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럼에도 이성의 끈 위에서 개인의 죽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합리화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를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지켜보고 있는가, 아니면 무엇인가 내 의지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있다고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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