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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건>이 전설을 소환하는 방법

<탑건 : 매버릭> 리뷰

by 민경민
영화 '탑건'의 상징이 된 항공모함 이착륙 신과 F-14 톰캣. *사진 <탑건>(1987)



'멋'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린 오락 영화 1987 <탑건>


1987년에 개봉한 영화 <탑건>은 최정예 전투기 파일럿 프로그램에 소집된 주인공의 성장기를 그리는 영화로, 당시 상업영화의 표본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다. 물론 여기서 표본이라고 한다고 '원조'나 '대표' 같은 좋은 뜻만 품고 있는 건 아니다. 그저 톰 크루즈라는 배우의 멋을 한껏 끌어올리기 위해 영화의 기본적인 요소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 그대로 '멋의, 멋에 의한, 멋을 위한' 영화기 때문이다.


영화의 맥락을 벗어나 시도 때도 없이 틀어대는 케니 로긴스의 'Danger Zone'이나 멋있는 장면을 빨리 보여주려고 플롯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진행되는 극의 전개,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오락가락하는 캐릭터의 감정선, 주인공이 멋지게 임무를 성공하자마자 돌아온 애인과 악수를 청하는 깐족이 동료까지, 상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들이 가득해 요즘 영화 문법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35년 전 <탑건>이 충격의 도가니일 수 있다.


'그때 영화는 다 그런 것 아닌가요?'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도 그렇듯이 그 당시 영화가 다 상업주의 영화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해 개봉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재킷>(1987) 역시 군 관련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들춰내는 탁월한 수작이었음을 상기하면 <탑건>의 작품성은 그 당시에도 시네필들에게 호평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시의 <탑건>이 영화사에 한 획을 그을만한 놀라운 신들을 만들어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당시 미 해군 항공모함의 주력기인 F-14 톰캣을 활용한 공중전 연출은 지금 만들라고 해도 쉬운 게 아니다. 애초에 10만 톤 급 니미츠 항모를 보유한 국가가 미국 뿐이니, 할리우드와 미국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도 없는 실사 장면들로 가득하다. 거기에 요즘처럼 드론이 있는 것도 아니며, 촬영감독이 직접 헬기에 올라 항공 촬영을 해야 하는 어려움, 부족한 부분을 CG로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탑건>은 비록 영화의 내용은 졸렬할지언정 스크린 안에 담긴 이미지 그 자체는 인간의 시선을 무한한 시각장으로 안내하는, 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놀라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중요한 건, 이러쿵저러쿵 영화에 대해 논하지 않아도 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멋' 그 자체 집중해도 매력은 충분했다.


<탑건 : 매버릭>(2022)에서도 등장한 톰 크루즈의 전투기 라이딩 신. 까만 공군 점퍼에 검은 선글라스, 바이크 라이딩과 노을 진 하늘을 이륙하는 전투기까지 그야말로 남자들을 뛰쳐나가게 만드는 '멋짐이라는 게 폭발'한다. *사진 : <탑건>(1987) 중


단지 소련의 미그기에 대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인데도 묘하게 상대를 흡입하는 찰리의 표정은 그 시절 감성에서만 볼 수 있는 뇌쇄 그 자체다. *사진 : <탑건>(1987) 중



일본의 버블 경제 시기에 빚어진 세기말 분위기가 '시티 팝' 그 자체가 되었듯, <탑건>이 표방하고 있는 시대의 멋도 당시의 표본이라 불릴 만한 것이었다. <탑건>의 사운드트랙은 모두 대히트를 쳤고, 사람들은 잘 생긴 톰 크루즈와 관능적인 켈리 맥길리스에 열광했다. 더구나 소련과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최첨단 무기로 겨루며 승리하는 영화의 내용 상 '아메리카 퍼스트'라는 국수주의를 자극하기에도 이만한 영화가 없었다.(하필 매버릭이 미그기를 격추할 그즈음 소련은 체르노빌 사고가 터지면서 미국에 결정적인 승기를 빼앗기게 된다. 이 무슨 우연인가)


어쨌거나 <탑건>은 그저 '멋있는 영화'라거나, '대단한 영화' 쯤으로 치부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줄 알았지만, 35년이 지난 지금 <탑건 : 매버릭>으로 부활하면서 이번에는 전작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영화적 매력까지 곁들이게 됐다.


패기 넘치고 자유분방했던 매버릭은 어느덧 원숙한 중년의 사내가 되어 혈기왕성한 젊은 파일럿들을 가르치러 돌아온다. *사진 : <탑건 : 매버릭>(2022)



<탑건>이 전설을 소환하는 방법


2022년에 개봉한 <탑건 : 매버릭>은 단순한 멋 부리기용 오락 영화였던 전편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인물의 입체성은 더 깊어지고 사건의 인과관계, 각 등장인물의 대립구도 역시 잘 짜여있다. 더구나 관객들이 전투기의 성능이나 전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극 중에서 매버릭의 입을 빌려 충분히 설명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실제 전투기를 배우들이 직접 몰고 촬영에 임하는 만큼 고증 문제가 불거질 수 있었지만 고증도 잘 이루어졌다. 일례로 전작인 <탑건>에서는 냉전 체제 하에서 적기인 미그기를 공수할 방법이 없어 우리에게는 '제공호'로 잘 알려진 'F-4 팬텀' 전투기에 검은 도색을 해서 가상의 적기로 활용했지만, <탑건 : 매버릭>에서는 현재 러시아가 보유 중인 5세대 전투기 PAK-FA를 구현해 실감 나는 공중전을 연출했다. 대공 레이더를 피하기 위한 초저고도 비행, 적진의 계곡 침투로 인한 전투기의 급선회 및 배면 비행에 따른 조종사들의 부담을 내러티브의 요소로 잘 활용한 것 등도 전작에서는 볼 수 없는 뛰어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전작과 완전히 차별을 둔 것도 아니어서, 항공모함 이륙 신이나 활주로 바이크 라이딩 신과 같은 전작의 명장면을 적극적으로 끌어오며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관객들을 노스탤지어로 이끈다.


하지만 무엇보다 <탑건 : 매버릭>의 가장 좋은 점은 역시 주인공 매버릭의 내적 고뇌와 이를 극복하는 매력적인 서사, 이 영화가 한때 전설이었던 남자를 부르는 방식에 있을 것이다.


<탑건> 시리즈의 주인공 매버릭은 본래 규율과 관습을 벗어나 자유롭게 모험을 추구하는 캐릭터다. 정해진 비행경로를 벗어나 독창적인 전술로 적기를 물리치는가 하면, 모함의 관제탑을 아슬아슬하게 곡예비행하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무모하면서도 대담한 비행 기술을 구사한다. 하지만 그는 그만의 독창적인 방식을 고집하다 무기 관제사이자 절친한 동료인 구스를 작전에서 잃게 되면서 그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일련의 죄책감을 지니며 살아가게 된다.


이후 <탑건 : 매버릭>에서 다시 등장한 매버릭에게도 이런 점들이 잘 묘사돼있다. 극 초반부에 그는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일선에서 비행 테스트를 하며 대령 계급을 단 채 '벌써 제독은 되었어야 하지 않나'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이는 젊은 시절 구스와의 마지막 작전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한 것을 마음의 한으로 담아둔 매버릭이 백의종군하며 완벽한 작전을 수행할 날 만을 기다렸다는 걸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그의 앞에 마침 완벽한 비행 기술과 노련미가 필요한 작전 임무가 나타나고, 그는 작전 교관으로 '탑건' 프로그램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매버릭이 작전의 주인공으로 멋있게 마무리 짓는 그림을 이 영화가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탑건 : 매버릭>은 매버릭을 교관으로 불러들이면서 직접 작전에 참가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중압감을 안긴다. 편대 비행이 필수적인 작전에서,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젊은이들이 과거에 자신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타인의 의지를 제 것인양 이끌 수 있는 리더십과 부하들이 진정으로 납득할 수 있는 실력을 보여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매버릭이 가장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대상, 옛 동료 구스의 아들을 탑건 프로그램에 등장시킴으로써 그에게 고난도의 작전 성공이라는 압박과 더불어 한 인간으로서 시험에 들게 만든다.


과거 매버릭의 절친한 동료였던 구스는 사고로 죽고, 그의 아들이 다시 '탑건' 프로그램에 합류한다.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라며 매버릭을 원망하는 구스. *사진 : <탑건 : 매버릭>(2022)



매버릭은 젊어서는 자신의 비행 기술로 동료 구스의 목숨을 책임져야 했고, 나이가 들어서는 자신의 비행 기술을 '가르쳐서' 젊은 '탑건'들을 지켜야만 하는 숙명에 놓이고 만다. 거기에 자신이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던 일을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면서 후속작이 35년이라는 세월을 거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한 캐릭터의 숙명을 만드는 일은 가히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런 점 때문에 매버릭은 마치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탑건 : 매버릭>에서 비행 교관을 맡은 매버릭은 과거 자신의 실수 때문에 신념을 버리거나 자기만의 색깔을 놓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작전에 참여한 에이스들에게 정석을 벗어난 임기응변을 가르치고, 군이 요구하는 교습 방식을 거부한 채 자기만의 방식으로 훈련생들을 가르친다. 교장에 들어서자마자 F-18 매뉴얼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모습이나, 팀을 만들라는 지시에 훈련생들에게 미식축구를 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실수를 회피하지 않고 좌절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힘과 실력을 키운 채 결과적으로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죄책감을 스스로가 용서하기 위해 어떤 책임을 지는 일. <탑건 : 매버릭>의 매버릭이 다시 돌아와 보여준 게 바로 이것이다. 전작에서 단지 젊은 톰 크루즈가 잘생겨서, 혹은 탑승기인 F-14 톰캣이 멋있어서 매버릭에게 열광했다면 이제는 매버릭이라는 한 인간에게서 멋을 느낀다. 그렇게 성숙한 어른이 되어 돌아온 매버릭이 있기에 오히려 전작의 서툰 모습마저 장대한 서사시의 계획된 부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탑건>의 매버릭이 <탑건 : 매버릭>의 매버릭이 되기까지의 기나긴 여정은 우리의 인생 그 자체를 닮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용기 있게 밀어붙이고 있는가. 혹은 그 때문에 때때로 큰 실수를 하고 좌절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럼에도 분연히 일어나 과오를 떨치고 자기 자신을 끌어안을 준비가 되어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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