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포레스트>(2018)
혜원은 말한다. "배가 고파서 내려왔다"고. *사진 : 다음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배고파서 내려왔어.”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의 내용은 영화 런 타임 내내 혜원(김태리)이 고향집에 돌아와 시종일관 요리하고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대부분이다. 힐링을 기대하고 들어왔다가 건강식만 잔뜩 펼쳐지는 광경에 당황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녀가 보여주는 요리를 '일종의 대화'라 생각하고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혜원은 느닷없이 서울살이를 접고 고향에 내려와 친구들에게 "배가 고파" 내려왔다고 한다. 먹을 게 지천에 널린 서울에서 배가 고파 내려왔다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 돈이 없어 굶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는 배고프다고 말하는 혜원의 말이 그 의미 그대로 생물학적인 굶주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아에 대한 굶주림'을 말하는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살인적인 물가와 형편없는 수입이 빚은 고통 속의 서울 생활, 혜원은 취업 실패를 겪으면서 ‘꼭 시골을 벗어나겠다’던 다짐조차 물거품이 된다. 게다가 함께 공부하던 남자친구의 성공은 같은 처지로 미묘하게 유지되던 인간과 인간의 균형을 어그러뜨리고, 혜원은 거기서 비롯된 상실감과 좌절감 따위와 싸우느라 마음에 상처까지 입고 만다.
도심 속 무한경쟁과 살아남기 위한 발악, 뭐 거기까지는 모두 예상 했겠지만, 그 속에서 내가 원하던 삶과 이상조차도 덮으며 인간의 저열한 감정들을 쏟아내는 사람이 되돌아보면 자기 자신이었다는 점은 과연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건 마치 내가 싫어하는 감정과 모습들을 내가 스스로 생산하고 있는 꼴과 다를 게 없다.
분명 내가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인데, 정신 차려보면 내가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일하거나 공부하고, 보상을 받아 작은 유희에 만족하며 바보처럼 살아가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원하는 것과 내가 행하는 것의 괴리는 커지고, 이 둘 사이는 좁혀지지 않는다.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은 나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해 결국 굶주리고 허기지게 된다.
<리틀 포레스트>가 말하는 가장 맛있는 음식은 '내가 만든 음식'이다. *사진 : 다음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혜원이 도망치듯 고향으로 내려와 정신없이 요리하고 먹어대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도심의 삶이 주는 편의점 도시락 같은 것은 간편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맛이 아니다. 살기위해 먹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필요로 해서’ 자연에서 채취하고, 주어진 것으로 ‘자신만의 레시피-생각’을 담아 만들어낸 요리는 ‘내가 원하는 맛’이다. 내가 원했기 때문에 그럴만한 수고를 했고, 생각을 했고, 노력을 한 것이다. 그러니 혜원이 직접 만들어 먹는 요리는 편의점 도시락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 요리는 순전히 나의 영혼을 배불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가장 맛있는 요리’를 주문한 은숙(진기주)의 요청에 혜원이 요리를 해주지 않고 그 스스로가 직접 요리해 먹도록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가장 맛있는 요리는 ‘내가 원하는 맛’을 내는 요리다. 직장 스트레스에 가득 찬 은숙은 고추를 잔뜩 넣은 떡볶이를 만든다. 남들이 보기엔 맵지 않을까 우려스럽지만, 그 정도의 매움이 있어야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면, 그게 곧 최고의 요리다.
혜원은 요리에 얽힌 어머니의 기억들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삶의 허기'를 채워나간다. *사진 : 다음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혜원이 고향집에서 해먹는 요리는 그래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 요리들은 과거에 자신의 어머니(문소리)가 해주던 것들이며, 또 어머니에게 배운 요리들이다.
그 자신이 엄마가 된 딸들이 문득 엄마를 그리워해보는 일처럼, 혜원이 어머니의 레시피로 요리하는 과정은, 먼저 삶의 투쟁을 지나왔던 어머니에게 지혜를 묻는 과정이다. 이를 통해 혜원은 어머니의 요리와 음식들에 연관된 에피소드와 그동안은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들을 찬찬히 떠올리면서 내 영혼이 그토록 굶주려있던,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해결한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혜원이 어머니의 레시피에 자신의 ‘주석’을 다는 장면은 제법 감동적이다. 어머니의 지혜로 자신의 영혼을 채운 혜원이, 더 나아가 앞으로 내 영혼이 굶주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개척해낸 것이니까. 그로써 혜원은 더이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충만하고, 힘센 영혼을 가질 수 있게 됐으니까.
사계는 늘 반복된다. 삶도 반복된다. 이 반복되는 인생 속에서 우리는 계절에 따라, 주어진 재료에 따라 분명 ‘원하는 맛’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겨울에 수박을 먹을 수 없음을 슬퍼하지 말자. 매서운 바람이 불면 차라리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자. 거센 바람이 불면 불수록, 곶감은 더 달고 맛있게 익을 것이다.
낭만의 이면엔 '생활'이 있다. *사진 : 다음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귀농은 언제부턴가 도시인들의 환상이 되어버렸다. 땅, 바람, 물, 그리고 자연. 회색빛 콘크리트 냄새에서 벗어나 어디를 달려도 자유만 있을 것 같은, 청량한 햇살이 기다리는 그곳.
그러나 귀농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녹록치 않다. <리틀 포레스트>는 혹시나 자연 속에서 만끽하는 자유에 집중해 그곳에서의 ‘생활’을 생각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현실의 민낯도 보여준다. 이는 비단 귀농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영역에서 이상의 영역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도 객관화 해준다.
고향으로 돌아온 혜원과 그의 고향친구들이 보여주는 모습들은 순수한 ‘한여름 밤의 꿈’ 그리고 낭만적 삶도 분명 존재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은 ‘생활’해야 함을 보여준다. 무릇 생활이란 살아가기 위한 모든 활동을 뜻한다. 즉, 무한한 자유가 있는 시골 생활에서도 책임져야할 영역이 있고, 살아내기 위해 해결해야하는 과정이 있다.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찾아가서 식료품을 구하는 것도 힘든 일이고, 먹고 살려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 농사라는 게 모두 때가 있어서 한가로울 땐 한가롭지만, 때가 오면 기가 막힐 정도로 분주히 움직여야 한다. 그뿐인가, 자연재해라도 닥치면 기껏 공들여놓은 탑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도 봐야한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자유 속에서도 절망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좋다. 그러나 그 무엇에 대해서 책임질 각오는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에 돌입했을 때, 기존의 편의를 버린다는 것을 자각해야만 한다. 직장을 때려치우면 얼마간 모아둔 돈으로 먹고 살수는 있다. 하지만 통장잔고가 슬슬 허해질 쯤이면 다시 예전의 삶이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나의 인생에 있어서, 여러 방면의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마음은 안정적일지라도, 나의 겉을 감싸고 있는 외적인 모든 부분에 불편이 생길 수 있다.
단지 물질적인 제약에 그치지 않고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자유가 그리워 귀농을 했는데, 막상 살아보니 자유만큼이나 영화관, 치킨이 좋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자나 남자 생각도 난다면 그게 과연 좋은 일인가? 젊어서 놀기 좋아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인데, 그걸 애써 부인하려고 하면 그것도 문제다. 그러니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다.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는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아주심기를 준비하는 혜원과 아주심기를 끝낸 그의 친구들. *사진 : 다음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영화의 결말부에 혜원은 짧은 농촌 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남은 두 친구가 떠난 혜원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재하(류준열)는 이런 이야기를 남긴다.
“혜원이는 아마 ‘아주심기’ 하는 중일거야”
아주심기란, 다른 곳에 심어두었던 아직 온전하지 않은 묘목이나 종자 따위를 땅에 ‘완전히’ 옮겨 심는 것을 의미한다. 충분히 튼튼해지지 않은 묘목 등을 땅에 바로 심어버리면 병충해나 냉해 등을 입고 쉬이 죽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때심기와 같이 묘목을 튼튼하게 한 다음에 아주심기를 하게 되면,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도심을 살아가는 모두는 현실이라는 척박한 토양만을 가지고 있다. 아무것도 심지 못해 황량한 자신들의 빈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굶주린다. 나의 영혼도 결국 나다. 생물인 육체가 먹고 살아야하듯이, 나의 정신도 내 안에서 생활할 수 있는 양식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내 안에 ‘작은 숲’을 가꾸어 영혼의 양식을 많이 거두려면 먼저 ‘나’라는 묘목을 튼튼히 하는데 시간을 아끼지 말자. 떠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척박한 토양에 걸맞은 강한 묘목을 키워서 ‘아주심기’해도 나무가 되고 열매가 자라고 숲이 생겨날 것이다. 강한 묘목 만들기는 결국 나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되고, 나에 대한 정의, '나의 좋음' 좇기에서 시작된다.
누구에게나 원하는 삶이 있고, 누구에게나 현실이 있다. 꿈이 묘목이라면, 현실은 땅이다. 유약한 꿈을 현실이라는 땅에 바로 심어버리면 귀농에 실패한 이들처럼 금세 시들어버릴 것이다. 그런가하면 ‘나의 좋음’이 아니라, 단지 '지금이 싫어서' 도피하고자 한다면 그 묘목도 마찬가지로 땅에 심자마자 시들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나의 좋음’이 확정되고, 땅의 모짊까지도 견뎌낼 힘이 생긴다면 비로소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리틀 포레스트>는 허기진 도심의 영혼들에게 우선 자신을 돌아보고 '나'의 허기를 달랠 것을, '아주심기'에 돌입하기 전에 '나의 좋음'을 점검하는 시간을 만들 것을 권유한다. 과연 우리는 허기진 우리의 영혼을 달랠 강한 자아를 만들 준비가 됐는가. 준비 없이 섣불리 현실에 꿈을 들이박고 좌절하고 있지는 않는가. 해답은 우리의 삶 속에, 때로 어이없을 정도로 사소하고 일상적인 곳에 숨어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