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흑화'한 고르. *사진 : 영화 <토르 : 러브 앤 썬더>(2022)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의 제자로,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기 직전 최후의 만찬에서 "나를 배신할 사람이 여기 있다"라고 지목한 배신자이다. 유다가 왜 예수를 배신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회계담당이었던 유다가 늘 베풀며 사는 예수의 뒤에서 온갖 난처한 일을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면박을 당하는 등 크게 인정받지 못하자 벌인 일이라는 설이 가장 와닿는다.
결국 그는 노예 한 명의 값으로 예수를 팔아넘기고 크게 후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예수의 제자보다는 배신자라는 경멸과 욕을 들으며 영원히 지옥 속에 갇히는 형벌을 받게 됐다. 예수는 그런 유다의 운명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유다를 향해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배신자에게조차 연민 어린 말을 남겼다.
유다가 그러했듯, 때로 어떤 깊은 사랑은 그 파국의 끝에서 사랑의 깊이만큼 지독한 증오가 되기 쉽다. 어째서 그런 걸까.
기본적으로 사랑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마음을 쓰는 걸 넘어 행동으로 실천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지칠 때가 온다. 그런 위기의 순간에 사랑이 돌아오지 않으면 어떨까. 그저 모르는 사람이 무관심한 것보다도 더 큰 공허함과 배신감이 밀려올 터. 그건 짝사랑이든, 오랫동안 사랑한 사이이든 그 종류와 기간을 가리지 않는다.
영화 <토르 : 러브 앤 썬더>(2022)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딸과 함께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죽음만을 기다리던 고르의 모습을 보면 꼭 깊은 사랑의 끝에서 절망하고 복수의 화신이 된 자를 보는 듯하다. 고르는 사막에서 메말라 죽어 가면서 신에게 자비를 간청하지만 끝내 딸을 살리지 못하고, 그 자신도 신에게 농락을 당하자 그 자리에서 신을 죽이고 신 도살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겁날 것도 없고, 억울할 것도 없다. 어차피 내가 아는 사람은 다 죽거나 다쳤다." *사진 : 영화 <타짜> 중
고르의 경우는 깊은 사랑의 일그러진 모습으로 대표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정작 잘 들여다봐야 하는 건 영화의 주인공인 토르다. 작중에서 토르는 스스로 되뇌었듯이 다섯 번이나 짝을 놓치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까지 모두 잃었다.
천 년을 살면서 그가 사랑하며 겪은 일이라곤 이별과 죽음, 그로 인한 고통뿐이다. <타짜>의 고니가 아귀와 일전을 앞두고 기차에서 되뇐 독백처럼 그런 지경에 이르러서는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 편이 낫다며 자기 자신을 가두는 선택을 하게 된다.
더구나 토르는 그 자신이 신이며 스스로 '어벤저스에서 가장 센' 히어로로 여기고 있기에 사랑에 대한 상실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세계를 몇 번이나 구했지만 정작 자기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도 구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지경에서는 자신의 능력이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감마저 들게 뻔하다.
그래서 깊은 사랑의 끝에서 어긋나 버린 이들의 말로는 고르처럼 파멸적인 모습도 존재하지만 토르가 그러했듯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경우도 있다. 자부심 넘치는 존재로 늘 자기가 가치 있는 자인지 끊임없이 묠니르에게 묻던 토르는 <어벤저스 : 엔드 게임>에서 뱃살이 튀어나온 배불뚝이 아저씨가 되어 밤낮없이 술을 퍼마시고 코르그, 마이크와 온라인 게임 속에서 허송세월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어벤저스 : 엔드 게임>에서 배불뚝이가 된 토르 *사진 : 마크 버팔로(헐크) 트위터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고 그나마 자신을 지탱하던 고귀함마저 타노스를 제때 처치하지 못해 의미를 상실하자 토르는 더는 스스로에게 존재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어떤 지극한 사랑이 그 대상을 향한 증오로 쉽게 변질되듯이, 때로 그 방향은 타자가 아닌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타자인가 자신인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향한 증오는 스스로 헤쳐 나오지 않으면 극복할 수 없기에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토르가 <어벤저스 : 엔드 게임>에서 과거로 돌아가 자신의 어머니를 만난 그 장면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었던 그는 배불뚝이인 상태로 돌아간 과거가 어머니의 죽음이 임박한 날임을 깨닫고 어떻게든 그 사실을 알려보려고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한사코 사실을 듣길 거부하면서 아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안다. 하지만 네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며 아들을 다시 타임머신으로 돌려보낸다.
토르의 어머니는 미래에서 모든 걸 다 겪고 돌아온 아들의 태도에서 자신이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불운한 운명조차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한다. 죽음이라는 가장 위협적인 사건조차도 방해할 수 없는 견고한 자아 앞에서 토르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향한 증오가 실은 '고귀한 행위를 실천하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해내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실망 때문에 생긴 감정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스스로 자랑스럽다고 여긴 자신의 모습을 갖지 못했을 때 사람들은 그 애틋함의 크기만큼이나 빠르고 무섭게 자기 자신을 증오할 수 있지만, 그 증오의 시작이 결국은 그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빚어졌다는 걸 깨달으면 오히려 무너져 내린 자아의 파편까지 살뜰히 돌볼 수 있는 강한 자아를 갖게 된다.
결점 하나 없는 '완벽한 신'에서 어쩔 수 없는 부족함이 있다는 걸 인정해 버린 토르는, 부족하고 해낼 수 없어서 모든 걸 체념해서는 그 자신이 바라던 모습이 될 수 없음을 알고 다만 이 부족함을 껴안은 채 어떻게 자신이 추구하던 삶을 되찾을 것인지를 모색한다. 결국 강한 번개도 완벽한 묠니르의 힘도 아닌, 그런 힘이 토르에게 제인의 죽음도 품 안에서 받아낼 힘을 주고, 흑화 한 고르가 진실로 원한 것도 파멸이 아니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게 만든다.
그래서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망가진 모습에 더욱 실망해서 그 자신을 차디찬 증오의 방에 스스로 걸어 잠근 뒤라면, 그 증오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되묻는 일로도 금방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비록 신에 필적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영원히 가질 수 없다고 하더라도, 어설프고 어기적댈지언정 내가 바라는 길 위에서 걸을 수 있기를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게 사랑이든, 간절히 염원하는 어떤 일이든 간에. 그 모든 일의 시작은 세상의 멸망과 나의 붕괴를 바라고서 시작한 게 아니라 실은 지극히 아끼는 나 자신이 행복하기를 염원한 데서 시작한 것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