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인간과 도구

by 민경민
7.PNG
제2차 세계 대전



역사학자 윌 듀런트는 <역사의 교훈>에서 인류사 3500년 중에 전쟁이 없었던 해가 270년 밖에 되질 않는다고 말한다. 그나마도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서 자주 전쟁을 벌이기 힘든 고대와 중세시대까지 포함한 것이라 그런 숫자가 나올 수 있지만 역사의 시계를 현대로 돌려보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날은 더 드물다. 앨빈 토플러는 비교적 큰 전쟁이 뜸했던 1945년에서 1990년의 냉전 시기조차 전쟁이 없었던 적은 3주에 불과하다 하고, 년 단위로 끊었을 때 현대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적은 '없다'고 나온다.


역사만 돌이켜보면 인류라는 종족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종족 같다. 영화 <프레데터>에서 묘사된 전투종족 프레데터는 사실 창작의 허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몽둥이와 돌팔매질에서 시작된 최초의 전쟁은 곧 창과 방패가 됐고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 총, 탱크, 미사일 같은 첨단 무기에서 이제는 드론과 무인기 공격까지 전쟁의 방식도 기발해지고 있다.


중요한 건,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의지라는 점이다. 결국 어떤 첨단 도구를 이용하던지 간에, 어떤 이유에서 시작했던지 간에, 상대를 파괴하고 살육하는 결정을 내리는 건 몇몇 사람들의 생각에서 시작된다. 전쟁이 일단 시작되면 그 참혹한 상황에 사람들은 전쟁이 종식되기만을 기다리지만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의 의지가 없어지지 않는 한은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인간을 파멸시키는 어떤 종류의 해악이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떳떳지 못한 일들이 다 그러하듯, 전쟁도 그 자신을 정당화할 명분을 찾기 마련이고, 명분을 찾지 못하면 아예 음지로 숨어버리거나 의도 자체를 희석해버리기도 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을 파괴하는 최악의 악당들이 정체를 숨기거나 심지어 법의 비호를 받으며 '정당한 전쟁'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무슨 수로 그걸 막을 수 있을까.


6.PNG
소년병 출신의 세츠나 F 세이에이는 세계를 '뒤틀림'으로 몰아가는 숨은 악의 정체를 밝히고 끊고 싶어 한다


<건담 시드>(2002), <건담 시드 데스티니>(2005), <건담 더블오>(2009)에 이르기까지 비우주세기 건담 시리즈들의 공통점은 주인공이 영문도 모른 채 전쟁에 휘말렸다가 어떤 조직에 소속돼 전투를 벌이고, 나중에는 독립해서 전쟁의 진짜 원흉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진영과 진영과의 대결 혹은 국가와 국가와의 이권 다툼 같은 것을 내세우지만 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국가 단위의 체제를 막후에서 조종해 분쟁으로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다. 건담 시리즈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런 원흉들을 찾아다닌다.


건담 시리즈에서 특기할 만한 점이 또 있다면 도구의 소유 여부다. 건담은 항상 비밀리에 건조되었다가 누군가에게 탈취되기 일쑤다. 인류 최후의 병기 모빌 슈트는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하는 인간들의 손아귀에서는 사람들을 죽이는 살상 병기였다가, 주인공들의 손에 들어온 뒤에는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을 파괴하는 정화의 도구가 된다. 도구를 누가 쥐고 있느냐에 따라 도구의 성격이 완전히 바뀐다는 걸 보여주는 설정으로 종종 비슷한 부류의 영화들도 도구를 이용해 인간 의지의 방향을 이 편, 저 편으로 바꾸는 연출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건담 시리즈의 마지막은 항상 '소속을 떠나' 자유의지로 행동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에 방점이 찍히는데, 군에 있으면 결국 군을 통솔하는 국가의 부름이나 의지를 따를 수밖에 없고, 또 누군가의 조직에 소속돼 있으면 조직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굴레들을 벗어던지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 아닐까. 특히나 건담처럼 첨단의 병기를 다루고자 한다면 말이다.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턴 에이 건담>(1999)의 턴 에이 건담이 나노 머신으로 인류를 절멸시키고 봉인되었다가 중세시대로 돌아간 인간들에게 발견되어 빨래 건조대로 이용되기까지 하는데, 그런 모습들을 보면 어떤 도구라도 사람의 의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괏값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1.PNG
스승이자 은인인 해리 하트에게 킹스맨 에이전트의 기원을 듣는 에그시


싸우려는 인간들이 뒤에 숨어 도구를 조작하고, 인류를 파국 직전으로 몰아갈 때 그들의 의중을 간파하고 같은 도구라도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다.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2015)를 보면 해리 하트에게 발탁된 에그시가 킹스맨 본부로 가는 비밀 엘리베이터에서 킹스맨 에이전트가 왜 만들어졌는지 그 기원에 대한 설명을 듣는 장면이 나온다.


"1849년 이후 킹스맨 재단사들은 전 세계 권력자들의 옷을 만들어왔는데 그중 상당수가 1차 세계 대전 때 후계자를 잃었다. 즉, 엄청난 돈이 주인을 잃었고 많은 권력자들은 평화를 지키길 원했지. (중략) 세계 각지에서 독립적이고 비밀리에 활동하는 국제 정보기구. 여느 정부기구처럼 정치나 관료주의에 발목 잡힐 일도 없지. 수트는 젠틀맨의 갑옷이고, 킹스맨 에이전트는 현대판 기사다."


그릇된 명분이어도 대의를 핑계로 잔혹을 일삼는 무리들에게 철퇴를 내리기란 과연 쉽지 않다. 이들은 교묘히 정체를 숨긴 채 눈에 띄지 않으면서 심지어 대중들의 지지를 받기까지 하는데, <킹스맨>의 빌런 발렌타인이 전형적으로 그렇다.


발렌타인은 극중 사람들에게 자신의 막대한 부를 이용해 평생 인터넷과 통신을 무료로 쓸 수 있는 유심칩을 나눠준다고 하지만 실은 이 유심칩이란 뇌파를 조종해서 서로를 살인하게 만드는 장치였다. 킹스맨 요원들이 이를 알아채고 손을 쓰려고 하지만 이미 각국 정부의 고위관료를 구워삶은 발렌타인을 처단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 세계를 이어주는 위성통신과 소형 컴퓨터로 무장한 정보단말이 아무리 유용하다고 한들 발렌타인 같은 빌런의 손에 들어갔을 때는 그저 인류를 파괴하는 하나의 재앙이나 다름없다.


건담 시리즈가 그러했던 것처럼 <킹스맨>의 등장인물들 역시 온갖 첨단 무기로 서로를 겨누지만 발렌타인과 킹스맨 요원들은 현대와 과거의 전통을 기준으로 완전히 다른 의미로 도구를 사용하게 된다. 발렌타인의 효율 그리고 킹스맨의 젠틀맨 정신이 깃든 도구들은 같은 기술을 공유하더라도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의지에 따라 용처가 바뀌게 되는 것이다.


그런 파멸의 도구와 구원의 도구가 대립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킹스맨>의 결말이 지시하는 방향도 건담 시리즈와 크게 다르지 않다. 킹스맨 본부의 수장조차도 발렌타인의 수중에 떨어진 판국에, 결국 세상을 구원할 요원은 아이러니하게도 킹스맨 최종시험에 탈락한 주인공 에그시다. 정치나 관료주의에 발목 잡히지 않는, 킹스맨 조직에게서조차 자유로운 에그시가 암막에 숨은 진정한 악과 대적한다는 전개는 분명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ezgif-2-97e35fb245.gif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2011)에서 IMF의 국장은 사망하고 대통령은 그들의 존재를 부인할 수 있는 권한인 '고스트 프로토콜'을 발동해 IMF 조직을 없애버린다. 그러나 에단은 미션을 중단하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게 '최첨단 첩보물'이다. 기존 첩보 영화에서 상상하기 힘든 온갖 아이디어로 무장한 첩보 도구들이 등장하고, 악당들은 그런 도구를 쓰지 않으면 도저히 실마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일들을 벌여댄다.


그런데 항상 이 '불가능한 미션'을 성공케 하는 에단 헌트의 비결이 있다면 다름 아닌 '정치나 관료주의에 발목 잡힐 일 없는' 정신과, 그 정신 아래에서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첨단 장비들의 방향이다.


에단은 IMF라는 미 정부의 비밀 조직에 소속된 요원이지만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2011)에서는 직속 상사인 국장이 눈앞에서 죽기도 하고 대통령이 조직 자체를 와해하는 '고스트 프로토콜'을 실행하는 바람에 세상에서 그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경험도 한다. 본래 IMF라는 조직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쟁을 해결하는 조직으로 한없이 자유롭기는 했지만 어쨌든 에단은 그런 조직조차 사라지면서 완전히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몸으로 미션을 해결해 나가게 된다.


결국 <미션 임파서블 : 로그네이션>(2015)에서 IMF가 재건되긴 하지만, 에단은 더 이상 IMF라는 조직에 100% 기대어 미션을 수행하지 않는다. 완벽한 미션을 위해서 때로는 동료에게 과거를 숨기기도 하고, 조직에 몸담고 있지만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믿지 않는다. <미션 임파서블 : 폴 아웃>(2018)에서는 아예 조직 내에 배신자가 나오게 되는데 이때 에단은 이미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행동할 완전한 자유를 얻은 상태이기에 자신의 사명과 신념에 따라 IMF의 본질을 추구한다.


우리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확답을 내놓으라 한다면 그때그때 바뀌는 '정의' 때문에 곤경에 처하고 말겠지만, 적어도 인간 문명을 일구고 어느새 우리의 삶을 정의하고 있는 도구의 사용 방법을 묻는다면, 에단 헌트의 입을 빌려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옳은 일을 할 때는 그저 옳은 일의 당위성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당위성에만 기대어 도구를 사용하는 것. 사익이나 자존심, 체면 따위의 문제로 마땅히 옳은 일에 대하여 궤변을 늘어놓거나 이상한 명분을 만드는 모든 일로부터 거리를 둔 채, '정치나 관료주의에 얽매이지 않는' 정신으로 도구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2.PNG
포경선을 포위한 씨 셰퍼드의 선박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나는 가끔씩 '씨 셰퍼드(Sea Shepherd)'라는 환경 단체를 떠올리곤 한다.


해양생태계를 엄청난 규모로 파괴하는 저인망 어선, 생태계의 핵심종으로 여겨지는 고래와 상어의 무분별한 포획을 일삼는 포경선, 그 외 해양생태계를 경쟁적으로 파괴하고 있는 수많은 상업적 어업에 관하여 이 단체는 조금 특별한 방법을 쓴다.


씨 셰퍼드는 아예 전투함을 만들어서 포경선에 말 그대로 들이받는다. '환경을 보호합시다'라는 캠페인을 벌이거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북극곰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한 이들은 같은 '배'라는 도구라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서 대양에 나간다.


인간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행동을 하고, 또한 같은 도구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타인의 간섭 없는 단단한 영역으로 두어야 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 아닌가.


현대 문명에서 '나' 이외의 것은 모두 도구라고 할 수 있고 그 도구들은 매우 효율적이며 전례 없이 강력하다. 그리고 그 도구들은 잠자코 '어떤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망치를 돌을 깎는 석공에게 쥐어줄 것인가, 아니면 정체를 숨긴 연쇄 살인마의 손에 쥐어줄 것인가. 우리가 망치를 파는 상인이라면, 석공과 연쇄살인마가 섞인 기나긴 줄에 누구에게 망치를 쥐어줄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일단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사실은 내가 뛰어난 조각을 만들려는 사람입니다'라는 감언이설을 내뱉은 살인마의 말보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힌 석공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지혜를 기르면서 말이다.






*본문 사진

-브리태니카 사전,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이미지

-<건담 더블오>(2009) 1기 중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2015) 중

-<미션 임파서블 : 고스트 프로토콜>(2011) 중

-유튜브 채널 'Animal Planet', 'Ships Collide in Final Confrontation | Whale Wars' 중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이상주의자는 패권주의와 결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