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드레스덴
1945년 2월 13일 연합군은 독일의 문화 수도라 불리는 드레스덴에 융단폭격을 가했다. 흡사 지옥불을 연상케 하는 소이탄이 도시 곳곳에 터지자 도시의 사람들은 살기 위해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엄청나게 뜨겁게 달궈진 화염 폭풍이 이미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폐에 화상을 입었고, 열기를 참지 못해 물에 뛰어든 사람들은 익사가 아니라 펄펄 끓는 물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이미 패색이 짙은 정권에 이런 대규모 살상 폭격을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연합군 내에서도 말이 많았으나 어쨌든 폭격은 효과적이었다. 문화가 발달했다는 이유로 폭격을 면하고 있던 드레스덴이 잿더미가 되자 독일인들이 받은 충격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 앞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며 팔짱을 끼고 있던 시민들도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불타버린 가족과 친우들 앞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허나 독일인들이 받은 충격과는 별개로 연합군 사령부는 드레스덴 폭격으로부터 이제 막 개발되기 시작한 장거리 폭격에 대한 실증 능력을 입증함과 동시에 적성국의 의지를 단번에 꺾는 방법이 생각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것도 깨닫게 됐다.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마다 반발에 직면해야 하는 지도부로서는 병사들을 참혹한 상륙작전에 내몰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은 분명 달가운 것이었으며, 그리고 이것은 곧 힘의 불균형을 유지하면 패권을 쟁취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제국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영화 <오펜하이머>(2023)를 봐도 드레스덴 폭격과 같은 딜레마가 종종 묘사된다. 본래 나치 독일에게 원폭 기술을 선점당하지 않기 위해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였고, 오펜하이머 역시 그의 지적 갈증 못지않게 반인륜적인 사태를 종식하려는 욕구도 컸으므로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프로젝트를 독려했다. 그러나 프로젝트 진행 도중 나치 독일은 패망했고, 미드웨이 해전으로 해군전력 대부분을 상실한 일본은 더 이상 압도적 군비를 갖춘 미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일찍이 드레스덴에서 했던 것처럼 미군은 도쿄 대공습을 벌여 10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을 불태웠으나 오펜하이머와 지도부는 더 강력한 의지로 일본의 빠른 항복을 받아내길 원했다. 그것이 직접 일본 본토에 천천히 폭탄을 투하하거나 상륙 작전을 감행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은 희생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군부는 핵공격을 받기 직전까지 항복의사를 전혀 내비치지 않고 있어서 더 큰 희생이 예고돼있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했다.
'어느 것이 가장 옳은 일인가'에 관한 오펜하이머의 철학과 미국의 야심이 의기투합하는 순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강력한 섬광이 터져 나와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일왕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미일 태평양 전쟁도 14만에 달하는 일본 측 추가 희생자를 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지만 이후의 상황은 오펜하이머가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이라는 흉악한 무리들이 있을 때는 잠깐 오월동주할 수밖에 없던 소련과 공산주의였으나 실은 나치 패전 이전부터 미국은 자국 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과 공산권과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 역시 핵프로그램을 성공시켰으며, 더 이상 핵무기가 미국만의 비밀 병기일 수 없는 노릇이 되자 미국은 맨해튼 프로그램에서 에드워드 텔러가 주장한 핵융합 무기에 관심을 가진다.
비록 자신을 죽음이자 파괴자라고 지칭한 원자폭탄의 아버지 오펜하이머였지만 그는 필요 이상으로 강력한 수소폭탄의 개발까지 원하지는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정도로도 세상은 전쟁과 무기 발전의 공포에 휩싸여 더는 무의미한 살상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패권을 다투는 지도자들의 야심까지는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킬로톤으로 표시되던 핵무기의 위력은 수소폭탄으로 넘어가면서 그 위력의 천배에 육박하는 메가톤급이 된다. 이쯤 하면 전쟁의 승패가 문제가 아니라 인류 존속의 문제가 벌어지고 만다. 애국자라는 포장지보다는 그 자신의 신념에 따라 원폭 개발에 뛰어든 오펜하이머로서는 당연히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선 안될 것이었다.
애초에 일본에 투하한 핵폭탄도 '더 큰 희생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밀어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는 패권주의 앞에서 각자 고군분투 했으나 결국은 같은 길을 가게 된다
이상주의자와 패권주의는 결국 결별을 고한다. 그러나 오펜하이머는 핵물리학에 해박할 뿐만 아니라 처세술에도 그 뛰어난 두뇌를 쓸 줄 알았기 때문에 세계대전이 끝나고도 일부러 권력에 접근해 텔러의 수소폭탄 연구를 방해하는가 하면 핵 프로그램의 막후에서 모든 걸 지휘하던 루이스 스트로스와도 척을 지게 된다.
그 이후는 관객들 대부분이 지쳐 쓰러진 극의 1/3 가량을 차지하는 지루하고 기나긴 청문회와 설전이 영화 내내 오갈 뿐이다. 애초에 '흑막'으로 표시된 스트로스 제독의 시점은 현재에 머물고, 컬러 화면으로 등장하는 오펜하이머의 시점은 과거에서부터 회상되는데, 실은 패권주의와 이상주의자의 세계가 하나로 합일할 수 없음을 놀란 감독은 이미 이미지 자체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극중에서 묘사되듯이 스트로스의 계략에 빠져 명예가 실추되는 비공식 청문회에 끌려가 일방적인 난도질을 당하고 종래엔 과거 공산주의 활동과 진 태들록과의 추문까지 들춰지면서 불명예 퇴진을 하게 된다. 그러나 훗날 실제 역사에서 핵무기에 결연한 반대의지를 내비쳤던 아인슈타인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오펜하이머는 결국 이상주의가 패권주의에게 이용당해 인류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고백을 내려놓는다.
사실 그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스타일을 쭉 따라갔던 팬이라면 이번에 등장한 <오펜하이머>의 방식이 다소 심심하고 그의 철학과는 이어지지 않는 면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전작 <테넷>(2020)과의 괴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미 '정보 추격자' 단계에 접어든 놀란 감독에게 오펜하이머에 대한 애도는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양자단계의 초에너지 상태를 인류 최초로 현실에 구현한 자, 혹은 리얼리즘을 추종하는 아이디얼리스트로서 그 타이틀 만으로도 놀란 감독에게 오펜하이머는 비록 '죽음의 신'일지라도 신의 반열에 있는 인간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미 죽음의 치킨 게임을 시작한 세계가 아직도 국가 간의 알력으로 언제 터질지 모를 핵전쟁의 위험까지 안고 있는데 대해 놀란 감독은 아마도, '실천하는 이상주의자'들이 각성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극중에서 결국엔 오펜하이머를 무너뜨리려고 설치해 둔 덫에서도 그를 지지하려고 나서는 사람들의 증언이 잇따랐던 것처럼, 패권에 휘둘리지 않고 올곧게 해야할 일을 할 줄 아는 인간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무언의 격려도 얹은 채 말이다.
*본문 사진
-위키 백과, "드레스덴 폭격" 이미지
-영화 <오펜하이머>(2023) 메인 예고편 중
-영화 <오펜하이머>(2023) 스틸 컷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