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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은 뒤에야, 대의도 명분도 있는 것이옵니다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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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큰 굴욕을 당한 왕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남한산성>에는 세 명의 중요한 인물이 있다. 역사의 당사자인 인조와, 옆에서 정반대의 의견으로 그를 보필하는 신하 김상헌과 최명길이다.


먼저 영화의 시작부터 운명의 굴레로 내몰리는 김상헌은, 전날 얼음길 위에서 어가를 안내했던 노인을 만나 안내를 받는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는 청군에게 길을 안내해 주고 삯을 챙기겠다는 노인의 말을 듣고 칼을 뽑아드는데, 그 노인은 후에 인조의 앞에 등장할 아이의 유일한 혈육임이 밝혀지고, 김상헌은 유일한 혈육을 죽인 원수이면서도 나루를 거둬야 하는 운명의 장난에 놓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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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를 안내했던 뱃사공을 회유하다 죽여버린 김상헌


극 전체를 아우르면 낭비되는 신처럼 보이는 이 장면은, 사실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다. 김상헌은 주전론(검)으로써 현실주의자(나루터의 노인)를 죽이게 되고, 그 결과 삶에 홀로 내던져진 아이(인조)를 거둔다. 그리고 아이의 보호자를 죽인 죄업(신하로서 왕을 보필하지 못함)은 감당할 수 없는 양심의 가책(자신의 이상으로 왕을 모실 수 없었던)이 되어 스스로를 죽여야만 하는 운명에 놓이게 한다.


굴욕 후에 아이(인조)는 살아남아 꽃 피는 봄에 달고 고소한 고기를 잡아 계속해서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결국 이상은 무너지고 현실이 지배할 ‘삶’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이상의 검을 놓을 수는 없었던 김상헌의 운명적 굴레가 영화의 서사를 무겁게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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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주의자이면서 이상주의자의 탈을 써야 했던 김상헌


재미있는 건 타협 따위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김상헌이 실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란 점이다. 영화 속에서도 명분을 중요시하는 이상주의자로 그려지긴 하지만 원래 김상헌은 지극한 현실주의자다.


극중 김상헌의 현실주의자적 면모는 서날쇠(고수)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한 신분의 날쇠의 계책을 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며, 전령 임무를 맡기는 등 국운이 걸린 일을 귀천을 따지지 않고 맡기는 것 또한 그의 현실주의자적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명분을 중시하는 이상주의자적인 그의 모습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처럼 본디 현실주의자인 김상헌은 왜 대의명분을 중시한 이상주의자가 되었을까.


그것은 김상헌이 난세에 굴욕을 겪고 살아남은 왕이 궁에 돌아간 뒤에도 조선을 통치할 명분을 줘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최명길과 김상헌 모두가 주화론을 주장해 쉬이 청에 굴복했다면, 인조는 어떤 상황에서도 싸워볼 생각조차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애쓴 왕이 되어버린다. 적이 왔다고 홀랑 나라를 갖다 바치는 왕을 누가 진심으로 따르겠는가. 그러나 누군가는 척화를 주장해 왕이 ‘최선의 노력은 했으나 어쩔 수 없이 굴욕을 겪은 것’이 되게 한다면 역사에서 왕의 굴욕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 아니라 운명의 준엄한 심판에 따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김상헌은 청과 대결하는 일이 무모한 줄 알면서도, 그 자신이 지극한 현실주의자면서도, 주전론을 펼쳐 왕에게 자신을 죽여 ‘삶의 명분’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김상헌이 자기 자신이 가진 이상과 정반대의 탈을 쓰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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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으로 인조를 옹립한 이상주의자이면서 현실주의자의 탈을 써야 했던 최명길


한편 최명길은 김상헌과는 정반대의 길로 왕을 지키려고 한다. 최명길 역시 김상헌이 현실주의자이면서 이상주의자의 탈을 쓸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으며, 그 역시 인조 옹립으로 말미암아 인조를 지키기 위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자신이 ‘삶의 길’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그로 인한 비난을 몰아 쓰고자 했다.


그래서 최명길은 ‘저는 역사에 길이 역적으로 남게 될 것’이라면서도 스스로 그 멍에를 쓰게 된다. 극중에서 그는 조선이라는 이상을 지키기 위해 현실주의자의 태도를 취하고 선비들의 비난을 온몸으로 감당하지만 실은 그도 김상헌이 그랬던 것처럼 본래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이상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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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 왕이 된 남자>에서 하선이 처음 광해군을 만나는 장면


단순한 오마주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어쨌거나 <남한산성>에서 최명길 역을 맡은 이병헌이 <광해 : 왕이 된 남자>에서 광해군과 하선의 역할을 맡았던 걸 생각해 보면 흥미진진한 점이 보인다. 공교롭게도 <남한산성>의 초반부 인조가 최명길에게 계책을 묻자 최명길이 ‘아뢰옵기 황송하오나’를 말하며 쇼트가 전환된 부분은 <광해>에서 광해군을 처음 만난 하선의 모습과 중첩되기도 한다.


명분보다 실리를 택했던 역사적 인물의 단순한 나열이라고 하기엔 이 오마주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다. 광해군을 폐위시킨 일등공신이 최명길이니까. 두 역사적 인물은 같은 사상을 가지고 나라의 실리를 위해 정사를 논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서는 절대 공존할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이 현실주의를 대변하는 노인을 이상의 검으로 찔렀던 은유처럼, 이병헌이라는 배우를 통해 광해군과 최명길을 잇는 감독의 연출은 결국 광해를 폐위시킨 최명길이 자기 자신을 찌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을 만들어낸다.


명분을 내세워 인조를 옹립했지만 막상 인조가 청의 황제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상 따위는 버리고 일단 살아남으라고 하는 최명길의 모습은 말과 신념을 목숨처럼 여기는 조선 사회에서 자기 자신이 했던 말과 신념까지 모순으로 밀어넣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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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최명길과 김상헌은 인조와 나라를 살린다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서로 대척점에 서서 각자 모순된 이상을 주장하게 되고, 비참한 운명 속에서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일들을 정반대의 입장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소신료들 앞에서 왕이 더 큰 명분을 쌓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비록 왕에게 삶의 명분을 주려고 이런저런 말들을 꺼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김상헌과 최명길이 그 자신의 본질을 아주 지워버린 것도 아니다. 명분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면서도 정작 오랑캐에게 세찬을 보내거나 외교 사절로 예를 운운하는 등의 예법을 지키는 건 최명길이었고, 내내 군사를 불러 청과 싸우자고 하면서도 남한산성 안의 자질구레한 잡무를 살뜰히 챙기는 살림꾼 노릇을 도맡아 하면서 풍전등화의 외로운 성을 지키는데 온 힘을 쏟는 건 김상헌이었다. 최명길은 어쨌거나 이상주의자고, 김상헌도 어쨌거나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건, 누가 어떤 입장에 섰고 누가 정반대의 논리로 왕을 설득하느냐가 아니다. 서로 주장의 방향이 다르다곤 하나 결국은 김상헌과 최명길이 바라는 건 처음부터 하나였다. 자신들이 옹립한 왕을 어떻게든 살려보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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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저들이 말하는 대의와 명분은 대체 무엇을 위함입니까.
먼저 삶이 있어야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 아니옵니까."


김상헌이 '그래도 싸우려고는 했다'는 명분을 왕에게 줘서 그의 정신을 살린다면, 최명길은 청과의 화친으로 왕이 죽음을 면할 수 있도록 육체를 살린다. 복잡한 입장과 그 입장을 다시 꼬아서 어떤 식의 논의로 왕을 설득하든지 간에 그 목적은 한결같이 '살아남으라'는 데 있다.


'내 몸이 있어야 세상도 있는 것'이라는, 어찌 보면 노장사상과도 통하는 둘의 생각은 사실 왕이 아니어도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생각이고, 그게 그저 인조의 치욕이라는 뻔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뻔한 이야기로 만들지 않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또한 이 이야기는 그저 살기 위해서 뭐든 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상헌이 물러서지 않는 이상을 인조에게 주입하듯 비록 어떤 현실에 굴복해서 삶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게 되더라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가치가 있음을, 결국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건 그런 이상이 있어야 함을 '진정한 현실주의자'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러므로 다시 이 작품을 되돌아보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 앞이라도 한 인간이 살아갈 길이란 먼저 육체를 살리고, 그러면서도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을 잊지 않는 데 있다.


비록 땅에 아홉 번 머리를 찧고 세 번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무작정 상황에 이끌려 원치도 않는 수모를 겪는 사람과 자신이 수모를 겪는 이유와 해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다. 거기에 더해 때에 따라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탈을 바꿔쓰며 간언할 수 있는 마음속의 충직한 신하까지 품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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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진

-영화 <남한산성>(2017) 중

-영화 <광해 : 왕이 된 남자>(2012)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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