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이 있었던 때를 생각해본다. 아니, 그 전에 낭만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마치 너무 오래되어 모서리 끝이 뭉툭하니 실오라기를 피어올린 낡은 사진과 같은 기억의 편린 같은 느낌. 한때는 아름다웠던, 삶의 훈증 속에서 질식해버린 과거의 찬란한 순간이 기억날 때면 우리는 으레 여행을 떠올린다. 인간이 아무리 낡았어도 변치 않는 것이 있다고 믿고, 또한 그것을 찾기 위해서다.
<트립 투 이탈리아>는 바로 그런 순간이 찾아왔을 때 찾아보기 좋은 영화다. 죽어버린 두 낭만파 시인의 궤적을 따라 이탈리아 서부의 아름다운 풍광과 풍성한 음식까지 곁들인 이 영화는 두 주연배우가 요리하는 ‘낭만 스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표면적인 영화의 내용 자체는 정말 재미없고 산만할 수 있다. 조직된 내러티브와 깔끔함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어쨌든 다시 영화의 내용으로 돌아가면, 주인공인 스티브 쿠건(스티브 쿠건 분)과 롭 브라이든(롭 브라이든 분)은 ‘미니쿠퍼’ 차량을 타고서 이탈리아 북서부 피에몬테의 포도밭에서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그들은 영국 낭만파 시인이었던 바이런과 셸리가 머물렀던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나폴리의 카프리 섬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만의 낭만을 쌓아나간다.
영화 자체는 단순한 편이다. 잡지사의 의뢰를 받은 두 배우가 시인들의 자취를 따라가며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도착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또 새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다. 수다스럽게 느껴질 만큼 영화는 끊임없는 대화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대화들은 말하자면 ‘불’이다. 요리에서 불은, 다양한 재료가 하나의 음식이 될 때까지 힘을 제공하는 존재다.
이들이 대화를 나눌 때는 반드시 주인공들이 주문한 음식 조리과정이 씬에 함께 등장한다. 즉 이들의 대화는 무엇인가를 ‘조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수다스러운 경향마저 있는 두 주인공의 뜨거운 ‘불’은 그들이 들르는 장소마다 어떤 열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영화 런-타임 동안 무언가 조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그렇게 뜨겁게 요리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말하기 위해서 그들은 끊임없는 수다로 영화를 꾸며내는 것일까?
먼저 롭과 쿠건이 쫓아다니는 두 시인 바이런(Baron Byron, 1788~1824) 과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에 대해 잠깐 살펴볼 수밖에 없다. 바이런과 셸리는 18세기 경 영국을 대표하는 낭만주의 시인이었으며, 마치 어울리지 않는 듯 비슷한 공통점을 가진 주인공들처럼 이 시인들도 묘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이런과 셸리는 모두 귀족출신으로 부유하고 성격도 비슷했지만 그들의 생애는 조금 달랐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앳 선샛(At Sunset)'의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친퀘테레의 해안을 주인공들이 요트를 타고 항해할 때 나온 곳이 바로 셸리가 요트사고로 요절한 장소다. 바이런도 불과 2년 뒤에 말라리아로 사망하게 되는데, 이처럼 죽음의 시기까지 비슷한 두 시인이었으나 그들의 죽음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바이런과 셸리는 낭만주의 시인답게 사교성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바이런은 대학을 마치고 나서 본격적으로 영국 사교계에 진출해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셸리도 그 특유의 천성 때문에 ‘미치광이 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망나니 기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롭과 쿠건처럼 바이런과 셸리도 교우관계를 맺었으며, 이 둘은 스위스와 이탈리아 등지를 함께 여행하며 많은 작품들을 써내려갔다. 공교롭게도 두 시인이 친분관계를 맺고 여행을 마친 뒤에 모두 죽음을 향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주인공들이 이들의 자취에서 받는 운명적 힘은 꽤나 강렬해 보인다.
주인공들이 구태여 ‘낭만’의 대표인 두 탕아를 쫓아다닌 까닭은 자신들도 배우이기 때문일 터. 방향은 다르지만 타인의 삶을 써내려간다는 것은 배우나 시인이나 모두 같은 일이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타인의 삶에 집중하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올수도 있음을 말한다.
바이런의 결혼생활은 썩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가정을 버리고 훌쩍 스위스와 이탈리아로 떠나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셸리의 결혼 생활은 역시 두말할 나위 없이 불행했다. 셸리는 그에게 많은 힘을 준 아내 해리엇과 정식 결혼했지만, 이후 메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해리엇이 자살하는 비극적인 결혼 생활을 보여준다. 정확히는 셸리보다는 그의 아내 해리엇이 더 불행해 보이긴 하지만 정상적인 결혼 생활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인 롭과 쿠건의 결혼 생활도 썩 좋은 냄새는 나지 않는다. 영화 중간마다 나오는 그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이를 증명해준다. 롭은 친퀘테레에서 만난 항해사와 하룻밤을 보내기도하고, 그는 토스카나에서 머문 호텔의 호텔리어와 대본 연습을 하며 실제로 키스까지 한다.
이처럼 롭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일종의 권태기 내지는 회의를 느끼고 있으며, 4살배기 딸아이의 사진을 종종 확인하지만 그에 대해 열정적인 희열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영화 내내 발견한다. 이는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훌쩍 떠나버린 바이런의 행적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쿠건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기러기 아빠’ 신세다. 자식과 종종 화상통화를 하며,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가 가족과 함께이지 않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그의 결혼 생활은 만족보다는 불행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쿠건의 행적은 아무래도 셸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러한 사실들이, 그들이 굳이 바이런과 셸리를 선택한 까닭을 짐작하게 한다. 화려함 속에 감춰진 불행한 내면을 가진 두 시인처럼 두 배우도 일종의 동병상련을 느낀 것이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종종(어쩌면 자주) ‘대화’로 요리를 할 때, 이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이는 남녀 간의 사랑이 제법 낭만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이 잃어버린 낭만의 세월 속에는 결혼이라는 책임의 굴레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입에선 종종 <로마의 휴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잃어버린 낭만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싫증난 것, 지루한 일상, 탈출이 불가능해 보이는 어떤 것들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몸부림은 책임의 탈을 쓴 굴레들 속에 어쩔 수 없이 갇히곤 한다.
낭만은 기본적으로 자유를 동반한다. 우리가 흔히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들에게는 낭만을 꿈꿀만한 여지가 충분치 않다. 여행이 낭만적일 수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유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보고, 듣고, 느낀 대로, 마음가는대로 행하여도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는 것이 여행이다. 그러나 두 주인공을 보라, ‘일’ 때문에 떠나는 일정에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들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롭이 항해사와 하룻밤을 보내고 난 뒤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거나, 주인공들이 젊은 남녀를 보고 그저 수군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구나 이들은 배우다. 타인의 삶을 살면서, 자신의 인생을 잃어버린 두 사나이다. 수많은 성대모사들 속의 주인공처럼, 그들도 많은 배역을 소화했겠지만(그들의 해박한 영화지식만큼) 정작 그들의 인생을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들은 일주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이탈리아의 풍경과 남이 차려준 먹음직스런 이탈리아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인생을 다시 조리하는 과정인 것이다.
친퀘테레의 해안에서 롭은 타인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한다. ‘타인의 시를 낭송하는 것은 어렵다’고. 제아무리 심도 있게 타인의 시를 연구하고 읽었어도, 시를 쓴 장본인의 생각을 온전히 읽어낼 수는 없다.
타인의 입을 빌린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자신’이 나설 곳이 없을 때이다. 영화에서 두 주인공은 수많은 영화(<다크나이트>에서 <대부>에 이르기까지)들의 캐릭터들과 혹은 이들이 쫓는 바이런과 셸리, 다른 시인들의 입을 빌려 말한다. 심지어 폼페이에서는 죽어 화석이 되어버린 사람의 입을 대신 빌리기도 한다. 허나 이는 모두 잘 알듯이 허상에 불과하다.
배우는 때때로 자신보다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의 잔상이 더 오래 남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보다, 캐릭터의 잔상이 더 강한 배우는 어떤 의미로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히스 레저의 ‘조커’ 연기나 조니 뎁의 ‘잭 스패로우’ 연기는 과연 멋졌지만, 우리는 그 캐릭터보다 배우들의 강한 인상을 기억한다. 즉 캐릭터가 자신을 부양할 수 있어야하지, 자신이 캐릭터에 함몰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오래 무너지지 않을 성과 같다. ‘나’를 정의하고 꾸밀 수 있는 것들은 많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본질을 흐려서는 안 된다.
주인공들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보여주는 아름다운 풍광과 유서 깊은 건물들의 ‘정직한 낡음’을 보라. 로마의 거리와 토스카나의 한적한 시골도 오직 그 지역만의 풍경이 있다. 주인공들이 먹은 지역 고유의 음식이나 와인을 보라. 다른 지역에서는 흉내 낼 수 없고, 그 식당만이 만들어내는 맛이다.
영화 속에서는 바뀔 수 없는 고유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인공들의 애마 ‘미니쿠퍼’는 첨단의 차량이지만, 그것이 달리는 길의 의미는 옛 로마 시절의 마차가 달리던 길과 큰 차이가 있을까? 그 때의 맛과 사람이 현대에 이르러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얼마나 달라졌을 것인가? 쿠건은 최신의 아이패드로 화상통화를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보편적이면서 낡은 고민일 따름이다. 1995년을 풍미했던 가수의 목소리와 2008년의 에이브릴 라빈의 목소리는 비슷하지만, 그들이 각 세대들에게 남기는 감흥은 같지 않은가.
시대를 씌우는 껍데기들은 날로 늘어나겠지만(그것이 첨단의 탈이든, 편의의 탈이든) 바뀌지 않는 고유의 것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찾는 일이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것. 오직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것. ‘이탈리아로의 여행’이라는 영화 제목은 결국 ‘고유한 것으로의 여행’이라는 말과 같다.
영화의 말미에서 쿠건은 아들을 만나 보트에서 조심스럽게 타인에 의사에 휘둘려야했던 ‘기러기 인생’을 청산할 것을 말한다. 이 역시 온전치는 않다. 단지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지근거리에 집을 새로 얻겠다는 것이지만, 아들과 쿠건에게는 대단한 진보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게 한 발짝씩 자신을 되찾아 가는 것이다.
한 편 롭은, 엠마와 함께 카프리의 바다를 보면서 <로마의 휴일>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그런 사랑은 하지 마세요.” 엠마는 “그래도 (로마의 휴일의) 이 결말이 좋다”고 한다. 앤 공주는 결국 낭만의 나날들을 뒤로 한 채 공주의 신분으로 되돌아간다.
롭은 주체적인 앤의 삶을, 엠마는 사회적 약속을 중시한 앤의 삶을 존중한 것이겠지만, 각자의 의견에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방향은 주어지지만 거기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인 롭의 크기를 생각했을 때, 감독의 메시지는 ‘타인의 시’를 읽지 않고, ‘자신의 시’를 낭송하라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