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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 수 있을까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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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겸 감독 이정재와 감독 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



배우이면서 감독인 영화인을 꼽으라면 누가 있을까. 몇몇 사람들이 퍼뜩 떠오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사람은 단연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닐까 싶다. 1930년생인 이 대배우이자 거장은 1955년에 영화계에 데뷔해 지금까지 수십 편의 작품을 찍으면서 감독이자 주연배우로 나선 것만도 26편이나 된다.


배우와 감독이 같은 장소에서 함께 하니 언뜻 비슷한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 배우와 감독처럼 이질적인 직업도 또 없다. 연출을 잘한다는 건 이성의 영역이고, 연기를 잘한다는 건 감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감독은 '영화'를 이해해야 하고, 배우는 '인간'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경지에 오른 거장이나 뛰어난 대배우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이 평생에 걸쳐 몰두할만한 어떤 가치를 끊임없이 탐구한다는 점이다.


예컨대 박찬욱 감독은 인간 내면의 심리와 욕망을 주된 관심사로 삼고, 봉준호 감독은 인간의 지리멸렬한 본성을 탐구하는데 주안점을 둔다. 송강호 배우는 작은 이익에 오락가락하는 평범한 소시민에게서 비범함을 꺼내는데 탁월하며, 최민식 배우는 비밀을 간직한 인간을 묘사하는데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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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세계는 늘 어둡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만든 세계 속에서 무슨 일이든 만족하지 못하는 괄괄한 늙은이로 등장하곤 한다. *사진 : 영화 <라스트 미션>(2018) 중



클린트 이스트우드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감독뿐만 아니라 배우로서도 같은 철학을 공유한다는 게 다를 뿐이다. 먼저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망가진 세계'를 지향한다. 눈살 찌푸려지는 인간들의 추악한 작태와 어딘가 망가진 인간들의 모습은 그의 영화에서 거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자주 등장하는 요소다. 거기에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고집 세며 완강하지만 속은 무딘 고슴도치형 캐릭터들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둔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페르소나를 바꿔가며 설정한 '망가진 세계'와 '고슴도치 캐릭터'는 꽤나 잘 어울린다. 세계가 망가져버렸으니 내 몸에 날카로운 가시 바늘이라도 둘러야 하겠지만, 그 속에는 연약하고 삶을 갈망하는 작은 생명이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때로 구역질 나지만 우리가 구역질하려고 살아가는 게 아니고, 마찬가지로 거친 세상 속에서 스스로 방어하고자 날을 세운 게 결코 내가 나쁜 인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의도치 않게 그런 상황 속에 놓이긴 했지만 인간으로서 마땅히 추구하고 있는 단 하나의 목적,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배우를 오가며 발굴해낸 가치는 결국 행복이다.


감독과 배우의 경계를 허문다는 건 그런 것이다. 연출과 연기가 또 다른 몽타주가 되어 새로운 영화적 의미를 부여하는 세계. 아무나 할 수 없고, 또한 너무 어렵기에 영화인에게는 과연 꿈과 같은 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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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가 탄로 나자 본격적으로 '흑화'한 이자성. *사진 : 영화 <신세계>(2013) 중



그런데 최근 개봉한 영화 <헌트>(2022)의 이정재에게도 미약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냄새가 배어 나온다. 물론 그의 감독 데뷔작인 <헌트>만 놓고 보자면 눈이 뒤집힐 만한 걸작은 분명 아니다. 극의 로케이션이나 출연진, 시나리오의 구성 등 스케일만 보자면 화려하지만 뭔가를 보여주려는 마음이 급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의 짜임새가 정밀하지 못해 내실은 좀 부족한 편이다. 다만 '이정재 감독'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서 '배우 이정재'의 족적을 느꼈다면 그건 틀리지 않았다. 영화가 어떻든 간에, <헌트>가 배우 이정재가 감독 이정재로 세계를 확장하는 데 있어서 성공적인 이정표가 되었음은 틀림없다.


배우 이정재의 지난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 같이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 든 마다하지 않는 모습의 인물로 등장했다. 그는 영화 <신세계>(2013)에서는 잠입 경찰로 깡패 생활을 시작했다가 신분이 탄로 날 위기에서 조직의 보스로 전향한 이자성 역할을, 영화 <관상>(2013)에서는 왕이 되기 위해 어리숙한 조카를 폐위까지 시키는 수양대군을, <암살>(2015)에서는 처형될 위기에서 독립군을 배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된 염석진을 연기했다. 이들 캐릭터의 공통점이 또 있다면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비천하며 생사의 기로 앞에서 존엄까지도 버릴 수 있는 비열한 인간 군상이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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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인 순간에 태도를 바꾸는 박평호. 그리고 그는 살고 싶었냐는 질문을 받는다. *사진 : <헌트>(2022)



영화 <헌트>에서 배우 이정재의 철학을 가장 잘 정의하는 장면은, 정체가 탄로 난 박평호가 대통령 암살을 막고 본의 아니게 오월동주하고 있던 김정도를 죽음으로 내몰았을 때 김 차장의 "살고 싶었나"라고 묻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무언의 수긍을 하는 순간이다. 군사 정권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의 중추에서 상관까지 협박하며 쫓아낸 능력자가, 죽음의 기로에서 한없이 작고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 묘사된 굵직한 대서사시 같은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더더욱 초라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런 점에서 감독과 배우, 두 영역을 한데 품은 이정재가 장차 스크린에 그리려고 하는 지점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힌다. 어떤 역사의 흐름, 권력과 집단에의 소속, 개인의 삶을 의지와는 무관하게 몰아가는 인간 이성의 산물들 속에 한 인간을 놓는 것이 '감독 이정재'의 몫이고, 화려하고 대단하지만 존재의 의미를 뒤집는 사건 속에서 한없이 작아질 뿐인 한 개인의 속내를 들추는 것이 '배우 이정재'의 몫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합쳐졌을 때, 마침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짜 놓은 판 속에서 허수아비처럼 움직이는 한 인간과 갑갑한 삶의 궤적에서 탈주하려는 인간의 본성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배우 이정재가 지나온 궤적이 그러하다면, 감독 이정재가 보여줄 미래가 그러하다면, 남는 질문은 하나다. 과연 이정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 수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아직 그 질문은 이르다. 우연히 벌인 시도가 적절하게 들어맞았던 건지, 아니면 배우와 감독을 오가는 거장의 시작일지는 결국 시간이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길이 계속된다면, 또한 감독이자 배우인 이정재가 그 자신을 보다 더 뛰어난 영화적 경지에 올리기 위해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꾸준히 세계를 확장해나간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그 가능성만큼은 활짝 열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헌트>를 내놓은 지금 시점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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