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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는 티찰라가 될 수 있을까

by 민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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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팬서' 채드윅 보드만 *사진 : <블랙 팬서>(2018) 스틸 컷



2020년 8월 20일에 대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블랙 팬서' 채드윅 보드만을 애도하며 시작하는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이하 '블랙 팬서 2')는 결과적으로 동생인 슈리가 어떻게 티찰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블랙 팬서', 나아가 '와칸다'가 계속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 되묻는 작품이기도 하다.


전통을 소중히 여기고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국가인 '와칸다'를 고립 상태에서 전 세계의 탐욕으로부터 지켜내야 했던 '블랙 팬서' 티찰라와는 다르게 그의 동생 슈리는 전통을 무시하고 과학을 중시하며 유행을 따르는 자유분방한 젊은이다. 왕가에서 적통으로 왕위를 계승해야 할 세자의 신분과 왕권과는 거리가 멀어 부귀영화 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지내는 왕자나 공주의 차이점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어쨌거나 티찰라와 슈리는 정반대의 캐릭터로 서로의 장점을 나누고 단점을 보완하면서 와칸다를 파국적인 침공에서도 구해내는 좋은 팀워크를 보여주곤 했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나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두 사람이 협력할 때의 이야기지, 한 사람이 사라지면 그 중심은 급격하게 무너진다.


작중 캐릭터뿐만 아니라 제작진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갑자기 사라진 티찰라에게서 슈리가 빠르게 쟁취해야 할 유산은 막대한 양의 비브라늄도 아니었고, 왕위도 아니었고, 다름 아닌 티찰라의 왕도와 포용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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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칸다로 돌아온 킬몽거와 대립하는 티찰라 *사진 : <블랙 팬서>(2018) 스틸 컷



<블랙 팬서> 시리즈를 관통하는 중요한 담론은 제국주의와 그 속에서 희생된 토착민의 관계를 재조명하는 데 있다. 영화 속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값비싼 금속인 비브라늄을 상징적으로 내놓고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도 제국주의가 팽창할 때 아프리카를 탐하던 유럽 열강들의 최우선 목표는 아프리카 대륙의 막대한 지하자원과 더불어 인적 자원을 수탈하는 것이었다.


숨겨진 강국 '와칸다'와 그 수호자 '블랙 팬서'는 완전한 허구지만 또한 허구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만약 제국의 수탈이 없었다면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그런 강국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존재할 뻔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물론 대국의 탄생에는 보다 복잡한 인과관계가 필요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 자체는 직접적 피해자인 아프리카 민족들과 더불어 제국주의 아래에서 처절한 희생을 겪었던 식민 경험이 있는 국가와 국민들에게는 상처 입은 자긍심을 회복할 여지를 준다. 실제로 흑인 사회에서는 <블랙 팬서>에서 보여준 와칸다식 인사가 유행하기도 했고, 와칸다를 고향처럼 생각하는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비록 가상이기는 하지만 그런 막강한 힘과 부를 지닌 국가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했을 때, 과연 피해를 겪은 민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블랙 팬서>에서 던진 화두도 바로 그런 점에서 출발한다. 외세와 철저히 고립된다는 고립주의를 무력화하려는 킬몽거의 아버지를 티찰라의 아버지가 국익을 위해 처단하면서 복수의 칼날을 간 킬몽거가 성인이 되어 와칸다로 돌아오면서 갈등이 전개된다.


티찰라의 첫 번째 시련은 너무도 강력한 명분을 가진 킬몽거와의 대결에서 시작된다. 개인의 복수와 더불어 핍박받은 민족의 복수를 수행한다는 아버지의 유지를 물려받은 킬몽거는 심지어 와칸다 내부에서도 지지를 얻는다. 이는 언뜻 누가 봐도 킬몽거의 투쟁이 정당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티찰라나 그의 아버지나 모순을 짊어지면서까지 왕위를, 아니 와칸다의 정신을 지켜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런 강한 힘의 팽창은, 결국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키고 착취하는 제국주의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사실 <블랙 팬서> 이전에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에서 티찰라는 이미 그 자신도 아버지의 복수 때문에 정도를 벗어났다가 다시 이성을 찾고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정신을 계승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더더욱 킬몽거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으며, 자신이 선택한 '당한 것으로 보복하지 않는다'는 와칸다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 '킬몽거'로 대표되는 '보복파'들까지 포용하지 않으면 안 됐다.


<블랙 팬서 2>에 짤막하게 언급되지만 이전 편에서 킬몽거의 편에서 서서 반역을 일으킨 오코예의 남편 와카비 역시 티찰라의 치세 아래 처단되지 않았으며, 킬몽거가 패배한 직후 티찰라는 자기를 죽이려던 사촌에게 불명예를 안겨주는 게 아닌, 최후를 함께하며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까지 한다.


온전히 왕위를 계승한 티찰라가 이후에 보여준 행보는 더 파격적인 것으로, 타노스의 지구 침공이 시작되는 가운데 어쩌면 통치하는 국가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벤저스 팀의 요청에 흔쾌히 국경을 열고 자국 영토로 타노스의 군대를 끌어들인다. 비록 오코예는 국경 개방에 스타벅스를 기대했지만(?) 국가 단위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대목에서 티찰라의 와칸다 정신과 포용력은 그가 단순히 국익을 위해 고립주의와 비밀주의라는 와칸다의 국론을 승계함이 아님을, 나아가 와칸다가 편협한 이익으로 돌아가는 국가가 아님을 밝혀둔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슈리가 왕위 계승자가 되었을 때, 그녀의 눈앞에 닥쳐온 것은 가족을 잃은 개인의 슬픔과 더불어 비브라늄을 노리는 외세의 탐욕, 일찍이 티찰라가 마주했던 '킬몽거'와 같은 사상을 가진 또 다른 비브라늄 제국 탈로칸과 그 수장 네이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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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중 왕국 탈로칸의 왕 네이머 *사진 : <블랙 팬서 : 와칸다 포에버>(2022) 스틸 컷



<블랙 팬서 2>에서는 전전대 왕이었던 티찰라의 고난과 역경을 슈리가 그대로 물려받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일찍이 티찰라가 겪었던 개인의 복수, 그리고 와칸다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행했던 과정들 모두를 그대로 답습한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개인대 개인의 갈등이었던 티찰라의 그것과는 달리 슈리의 경우는 세력과 세력이라는 보다 더 큰 범주의 갈등 속에서 고군분투하다는 점이 다르다. 그건 앞으로 슈리가 짊어져야 할 와칸다 정신의 크기와 포용 범위가 더 넓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세세하게 풀어나갈 시간이 있었던 티찰라와는 달리 영화 한 편에 그 모든 과정을 빠르게 물려받아야 할 슈리의 부족한 시간 때문에 비유적으로 표현되던 것들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정반대의 위치에 있던 슈리가 티찰라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뭔가 큰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데 복잡한 국제정세는 오빠나 부모님에게 맡기고 과학 연구에 전념했던 어린 날의 슈리가 직접 두 눈으로 국가 간의 탐욕과 위협을 마주하고 내적 각성을 겪게 된다는 건 내러티브 요소로서도 그럴듯하고 꽤 세련된 방식으로 티찰라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슈리가 와칸다의 정당한 왕으로 군림하면서 진정 와칸다 정신을 계승할 자격이 있는지가 문제일 것이다. <블랙 팬서 2>의 엔딩 시퀀스 부분에서 슈리가 보여주는 전투신은 얼핏 티찰라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 이전에 슈리가 재생에 성공한 심장 모양 허브를 삼키며 보게 된 환영은 또한 슈리에게 불완전함을 내포한다.


결국 킬몽거의 내면을 가진 채 티찰라의 유산을 받은 슈리와 와칸다 왕국의 노블리스 오블리주가 지속 가능할지는 앞으로 다가올 속편에서 두고 볼 일이지만, 마블 세계관에서 중요한 기둥인 이 시리즈가 멈출 이유는 없으며, 특히나 <블랙 팬서>가 가진 담론은 두고두고 추구할 만한 것이기에 설령 슈리가 티찰라가 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와칸다 포에버'가 계속 마블 유니버스에 울렸으면, 그리고 전 세계에 울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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