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의 신작 영화 <로기완>(2024)을 보다가 들었던 생각은 시종일관 하나였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주인공 로기완의 막막하고 암울한 인생을 전반부까지 잘 그려낸 것까진 좋았으나 브뤼셀에 도착해 마리에게 지갑을 털린 순간부터 슬슬 위화감이 들기 시작한다.
내게 모질게 대했던 사람과 미운 정이 들어 갑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는, 로맨스물의 일반적인 서사쯤은 눈 감아 줄 수 있다고 쳐도, 마리에 대한 묘사는 그냥 넘어가기엔 낯선 것들 투성이다. 로기완 못지않게 망가진 삶을 담으려고 한 것 같지만 그러기엔 너무 편안한 인생이 아닌가.
모시고 있는 지하세계 보스는 그렇게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면서 수백만 달러를 날린 시점에선 털끝 하나 건들지 않는다. 마치 주인공만 봤다 하면 헛발질을 시작하는 괴수 영화의 괴물들처럼 말이다. 거기다 그런 사람이 로기완 같은 부랑아가 덤벼드는데 팔다리 성하게 내보내는 것도 이상하질 않나(기자한테는 석궁을 쐈다). 보스의 여자와 관계 됐다면 더더욱 묵사발을 만들어놨어야 할 테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슈퍼맨처럼 떡하니 나타나 모든 걸 해결해 주고 쿨하게 사라지는 아버지의 행적도 쉽게 납득이 되진 않는다. 상처받은 딸에게 무한대의 지원을 아낌없이 퍼붓는 것까진 이해가 되지만 로기완에게까지 그럴 이유가 있을까. 젊잖은 사람이고 평소 봉사와 헌신으로 평판을 쌓던 사람이라 차마 내칠 수 없었다고 하기에는 이유가 부족하다. '살아남는 것 말고는 사치'라는 독설을 내뱉던 사람은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건가.
설령 모든 걸 다 납득하고 넘어간다고 한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척척박사처럼 다 해결해 주는 상냥한 아버지가 있는 마리가 무슨 고뇌를 갖고 있던지 간에 피폐한 인생을 운운할 자격이 있느냐는 말이다. 좋은 가정에서 자랐지만 가족과 연을 끊고 나쁜 남자들을 거치는 바람에 갈수록 인생의 수렁에 빠져든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2007)과 같은 서사 정돈 얽혀야 로기완과 함께 '상처의 균형'이 맞는 게 아닐까.
탈북해 어머니도 국적도 잃고 쓰레기통 뒤지며 살던 사람과 어머니의 안락사에 충격받아 혼자서 삐딱선을 탄 사람을 같은 시선에 두는 게 영 이상해 보인다. 같은 상처를 극복하고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기엔 상처의 수위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아니면 애초에 철부지 아가씨가 인생 산전수전 다 겪은 '로기완 아저씨'한테 한 수 배우는 설정을 갖든지.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그냥 이상한 영화를 봤네' 하고 넘어갈 것을, 이 영화는 자꾸만 뭔가 중요한 걸 버스에 두고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통 그런 경우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작품의 재료는 좋으나 각색에 오류가 난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의 원작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2011)
좋다가도 나쁘기도 하고, 나쁘다가도 좋기도 하고. 영화가 원체 오락가락 하다보니 결국 원작 소설을 찾아 읽어봤다.
역시나 이상하다고 여긴 부분만 모두 새롭게 각색된 것이었다. 원작에서 그럭저럭 형체를 유지한 채 영화로 넘어온 것은 로기완 그 자신의 이야기들이다. 그 밖의 것은 실제로 도움받은 조력자들도 모두 다르고, 로기완이 벨기에에서 겪은 수모도 다르게 묘사된다. 물론 로기완의 연인도 원작 소설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나온다.
로기완이 죽을 고비와 수모를 견디며 겨우 얻었던 난민 자격과 그 모든 혜택을 버리고 사랑을 택한 채 떠난 원작 소설의 연인 라이카는, 작중에서 만료된 비자로 불법 취업해 함께 식당에서 일하던 필리핀인 여종업원이었다. 존재가 소멸된 두 추방자가 난생처음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하는지가 소설 속에 처연하게 그려질 뿐. 소설을 읽으니 그제야 톤이 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반면 영화 <로기완> 속 인물들은 원작 인물들의 면면이 조금씩 뒤섞여있는 또 다른 가상의 인물들이다. 원작에 충실한 각색을 했다면 로기완의 연인은 지갑을 훔친 마리가 아니라 차라리 그를 도운 조선족이었어야 할 테고, 마리의 아버지는 대뜸 '딸한테 붙은 거지를 떼어내려' 호의를 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의 난민 신청 과정을 도왔던 통역사여야 한다.
아무래도『로기완을 만났다』(2011)에서 가장 낭만적인 부분인 라이카와의 애정이 짧게 서술돼 있는 까닭에 이 부분을 좀 더 살리기 위해 마리라는 새로운 연인을 창작해 낸 것이 아닐까 싶지만, 그 창조의 방법이 앞서 상술한 대로 너무 허술한 까닭에 원작을 그대로 재연하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
<유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영화배우 최민식이 <올드 보이> 제작 과정 당시를 회상하는 모습
재창조의 영역, 각색에 대해서 창작자가 취할 태도는 두 가지로 나뉜다. 원작에 충실할 것인가, 아니면 모티프를 따오되 새로운 시각으로 재창조할 것인가. 두 가지가 잘못 뒤섞이면 원작의 좋은 느낌은 사라지면서 문장을 억지로 늘인 괴랄한 글처럼, 알맹이와 따로 노는 곁가지만 잔뜩 떠안게 된다. 욕심이 과해 화를 부르는 셈이다.
최민식 배우는 과거 박찬욱 감독의 <올드 보이>(2003)에 출연할 당시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가 건넨 원작 '올드 보이' 만화를 집어 들고 몇 권 읽지도 않고 팽개쳤단다. 다들 대단하다고는 하는데 당최 재미가 없었다고 한다. 임 대표가 같은 만화를 박찬욱 감독에게도 권하고, 이내 세 사람이 모여 '주인공이 알 수 없는 이유로 15년 간 갇혀있다'는 설정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재창작해보자 한 데서 비로소 명작이 탄생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원작 만화의 내용 중 '세상이 얼어붙고 설국열차만이 살아남았다'는 모티프만을 가져온 채 내용은 한토막의 영화 호흡에 어울리는 다른 이야기로 채워 넣는다.
원작을 충실히 재해석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긴 호흡을 감당할 수 있는 드라마에서 이뤄지고, 그보다 짧은 호흡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영화는 일부분의 서사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거나 시리즈로 이어내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오바 츠구미의「데스 노트」를 영화화한 <데스 노트> 시리즈, 국내에서는 <신과 함께> 시리즈처럼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들이 그런 경향을 띤다.
어떤 방법을 차용하든지 간에, 원작의 재해석에 충실할 것이었으면 로기완도 새로운 인물로 분장했어야 맞지 않나 싶다. 혹은 원작에 충실하려면 마리라는 러닝 메이트보다는 로기완의 일기로 삶을 조금씩 추적해 나가는 원작의 추적극 형태를 띠었다면 차라리 더 감동이 진했을 것 같다.
영화의 이상한 점을 파고들다가 원작까지 들춰본 나의 경우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삶에 대한 의문을 저버리지 않은 한 남자가 어머니의 시체값을 들고 이역만리를 떠도는 이야기엔 분명 그냥 두고 가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버려진 사람이 다시 모든 걸 버릴 수 있다는 그 믿을 수 없는 용기가, 큰 감동을 주었기에 영화 <로기완>은 더욱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아무래도 매체의 특성상 소설보다는 영화가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결국 영화 <로기완>은 여기서 끝나지만 세상이 끝나다 못해 나를 부수려 드는 곳에서 다 잃어버려도 좋으니 함께할 사람이 있다는 건 역시 낭만적이지 않은가. 언젠가 실력 좋은 각색가가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들춰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본문 사진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2024) 중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2024) 포스터
-조해진 장편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표지
-유튜브 채널, 디글 :Diggle, '[#유퀴즈온더블럭] 최민식이 말아주는 〈올드보이〉 비하인드 SSUL 한국 영화에 대한 평가를 뒤집은 올 타임 레전드 명작ㄷㄷ #최민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