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시픽 림>(2013)에서 카이주를 잡으러 출동하는 예거 로봇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SF 영화 <퍼시픽 림>(2013)을 예술적인 작품이라고 표현할 관객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용만 놓고 보자면 그저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을 격퇴하자는 단순한 내용에 여주인공 마코의 서사는 두 눈 뜨기 보기 어려울 만큼 손발이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이 괴수 로봇영화를 10번은 넘게 돌려본 것 같다. <트랜스포머>(2007)나 <아이언 맨>(2008)에서 그러했듯이 그 후속 편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구나' 하고 말았지만 건물만 한 집시 데인저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걸어 들어갈 때의 전율만은 잊을 수가 없다.
때로 영화는, 우리가 현실에서 상상할 수 없거나 상상만 하던 것을 눈앞에 펼쳐놓았을 때의 위용만으로 관객을 압도할 때가 있다. 그런 부분에서는 단순한 게 최고다. 이게 어떤 이유로 어쨌니, 저쨌니 하느니 시각을 초과하는 거대함이나 웅장함을 동공 깊숙한 곳까지 욱여넣어버리는 게 영화가 할 수 있는 장점 중의 장점이니까.
물론 기왕이면 작품 속에서 건져낼 수 있는 특별한 의미나 독창적인 시각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긴 하겠으나 그런 완전한 육각형의 작품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일례로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너무 좋은 작품이지만 나는 극장에서 한 번 보고 난 뒤에 그 작품을 다시 본 적이 없다. 예술성이 있으면 흥미가 떨어지고, 흥미가 있으면 예술성이 떨어지는 제로섬게임에서 양가를 모두 충족하는 논제로섬게임을 하고 있는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이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2010) 정도일까?
하지만 <퍼시픽 림>이 그러했듯, 주어진 역할에 100% 충실하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작품은 다시 돌려보고 싶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 내 생각에는 넷플릭스의 <피지컬 100 : 언더그라운드> 시리즈 역시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고 본다.
넷플릭스 <피지컬 100>의 시즌2 사전 퀘스트
<피지컬 100>의 장점은 힘자랑 이외의 것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업이나 성별이 소개되기는 하지만 퀘스트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어떤 이점이나 페널티도 부여되지 않으며 참가자들은 사전 퀘스트의 성적을 보고 상대의 호불호를 정할 뿐이다.
승부에 윤리적,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으며 순수하게 누가 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지, 목표를 극복해 내는지 중계될 뿐이다.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명 연예인들이 MC로 등장해 추임새를 넣는 그림도 없다.
패자에 대한 아름다운 격려나 찬사, 미화 없이 깔끔하게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고 토르소를 박살내고 떠나는 연출도 <피지컬 100>만의 담백함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부분에서는 남성 출연진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는 여성 출연자들에 대한 묘사도 깔끔하다는 게 눈에 띈다. 힘의 대결이라는 본연의 취지에 맞게 특별히 성별에 따라 배려를 받아야 된다는 것도 없고, 그들이 한계에 봉착해 패배하더라도 그걸 포장하거나 이유를 갖다 붙이지 않는다. 남성 출연자들에게도 적용되듯 단순히 신체적 유불리를 따질 뿐, 그렇기에 오히려 여성출연자들이 선전했을 때 그 성과가 더 돋보이기도 하고, 패자로 떠날 때에도 '완력을 증명하러 온 자'로 비칠 뿐이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건 인간의 본성을 폭로하고자 애써 참가자들의 반목을 조장하고 갈등을 만들려고 하던 몇몇 프로그램의 노력을 <피지컬 100>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그걸 쉽게 얻어낸다는 점이다. 팀전이 시작되고부터는 이기심과 이타심의 사이에서 인간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날것으로 보여준다.
명성을 떨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든, 세계 최강자로 파이터들 사이에서 전설이 된 인물이든, 승부 앞에서 체면도 몽땅 내다버리고 이기기 위해 암수도 마다하지 않거나 의리도 저버릴 수 있는 건 <피지컬 100>이 만들어놓은 승부의 장이 그 목표를 명확하게 지시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넷플릭스 <피지컬 100>에 출연한 김동현 전 격투기 선수가 1:1 매치에서 상대를 찾고 있다
흥미로운 액션 영화를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갑자기 사회, 윤리적 메시지가 그득한 장면이 나열되거나 웃긴 코미디 영화라면서 진지한 철학을 이야기하고 있으면 그게 아무리 옳은 이야기이고 새겨들을만한 내용이라도 맥이 풀리기 마련이다. 최근까지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주의와 반PC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싶다. 일단은 '파인애플 피자'를 만들더라도 피자 도우가 제대로 갖춰져야 할 것 아닌가.
다시 찾게 되는 작품들의 공통점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확실하게 밀어붙인다는 데 있다. 기본기가 탄탄한 가운데 예상치 못한 감동이나 울림까지 자아내면 걸작이라는 평을 듣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한 가지 질문일지언정 주제를 완전히 밀어붙일 수 있으면 꽤 괜찮은 작품이 된다.
그런고로 <피지컬 100> 역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게 할 한 방은 없어도 어쩐지 계속 찾아보게 되는 <퍼시픽 림> 같은 든든함이 있다. 최소한 기대하고 있는 그 근육에 관해서는 뭔가를 보여줄 게 확실하다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닭가슴살과 프로틴 냄새가 자욱한 이 끈기의 대결은 항상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것 같다. 이번 시즌에 누가 이 담백한 경쟁의 장에서 우승할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나는 이번 시즌뿐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피지컬 100> 시리즈를 기다리게 될 것 같다.
*본문 사진
-영화 <퍼시픽 림>(2013) 중
-넷플릭스 오리지널 <피지컬 100 : 언더그라운드>(2024)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