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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Apr 05. 2024

portraiture

그땐 이렇게 찍었었네요.

인물사진에 비겁해졌습니다.

오늘 눈에 밟힌 두 장의 사진입니다. 프랑스 요리를 하는 셰프의 개인 프로필 촬영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찍었습니다. 요즘 난 이렇게 잘 촬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낯설기도 했고, 신선하기도, 풋풋하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날것의 인물촬영을 하지 않습니다. 틀 안에서만 촬영합니다. 대비를 줄여 세부표현을 살려서 촬영하고, 깊은 심도를 확보하여 후반작업을 용이하게 합니다. 얕은 깊이의 초점영역에 모험하지 않습니다. 그땐 그 얕고 좁은 영역에서 어떻게든 눈빛을 교환하려 애를 썼습니다. 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의 눈을 보고 그렇게 눈빛을 찍었습니다. 뷰파인더에서 서로 눈빛이 부딪혔을 때 셔터를 눌렀습니다. 짜릿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그냥 감각에 의존했습니다. 지금 그 감각 신경은 다 죽었습니다. 경력 많은 프로 사진가답게 철저히 계산된 프리셋으로 촬영하고, 기계적으로 완성합니다. 더 이상 눈을 보지 않습니다. 나의 프리셋 속에서 모델의 눈빛은 어차피 초점영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진은 눈빛 대신 흐릿한 분위기만 멋지게 담아냅니다. 템플릿처럼 누구나 같은 분위기로 촬영할 수 있고, 다른 분위기로 옷을 갈아입힐 수도 있습니다.


비겁함을 강의합니다.

얕은 심도를 즐기는 촬영법은 초심자일 때나 하는 거라고 강의합니다. 프로사진가는 순간의 우연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안정적인 질 좋은 데이터를 촬영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의합니다. 사진에서 우연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상업사진은 우연을 가장해야 하고 그 우연한 결과물을 반복적으로 의도해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바로 대체가능한 방법을 강의하고 있는 셈이죠. 프로사진가답게 나의 모든 촬영은 데이터로 전환가능합니다. 학습에 매우 용이합니다. 학습하면 누구나 완성도 있는 촬영을 하게 되죠. 초심자여도 말이죠. 상업사진은 효율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알면 찍히고 모르면 안 찍힌다고 강조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거쳐간 작가들은 초심자에서 시작해서 돈을 받고 촬영할 수 있는 프로작가로 수료와 동시에 도약하게 되죠. 기가 막힌 커리큘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Portraiture를 배웠지만, 사진을 배우진 못했습니다. 그 얕은 곳으로 시선을 이끄는 길을 안내하지 않고, 갈 곳 잃은 시선을 방임하는 기술적인 방법을 비겁하게 가르쳤습니다. 촬영자 자신만의 리듬을 느껴봐야하고 그 미지수를 찾아야하는데 말이죠.


계산 없이 그때처럼,

똑똑한 카메라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너무 계산합니다. 그냥 찍지를 못합니다. 형광등이어도 좋고, 백열등, 아니 전문 텅스텐 조명이어도 좋습니다. 물론 대단한 밝기를 자랑하는 스트로브 섬광 조명이어도 상관없습니다.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어떤 빛이든 상관없습니다. 스위치를 켜고 서로 마주 앉아 뷰파인더 속에서 눈빛만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눈빛, 눈짓, 눈동자, 눈물, 찡긋, 눈웃음... 모든 눈으로 할 수 있는 말이 참 많습니다. 상업적으로 실패한 사진들 속엔 그 눈빛이 살아 남아 있고, 여전히 나는 그 사진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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