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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운 Jul 08. 2021

[책] ART FEAR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

예술가에 대한 나만의 기준을 전제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술에 대한 나의 전제와 맞닿는 부분을 찾고 싶었고, 때론 나의 직관을 깨부수는 문장을 찾아내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가설 같은, 직관에 의한 정의(Definition)를 늘 최신으로 업데이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각각의 챕터 속 이야기는 깊은 생각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지만, 전체적으론 내용이 겉돌고 있음을 느낍니다. 예술에 대한 저자의 일반화를 찾아보기는 어려웠습니다. 한국어 번역의 책 제목은 저자의 통찰을 기대하게 만듭니다. 책 내용은 건조한 원문의 제목(ART FEAR)과 오히려 일치합니다. 나는 많은 예술가들이 겪고 있는 두려움에 대한 흩어진 이야기만을 듣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저자의 직관 혹은 통찰을 보고 싶었습니다. 7년에 걸친 토론과 집필 끝에 완성한 책이라고 책 날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인 경험의 소산이며, 예술가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예술의 세계를 정확히 보여준다.'라고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책은 통찰보다는 나타나는 현상 사례들의 모음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깊은 고민 속으로 어두운 곳을 끌고 들어가 나를 던져두고 "여기까지입니다."라고만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나의 전제를 기준으로 할 때는 논의할 가치가 없는 '기각' 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술가들이 느끼고 고민했던 흔적들의 모음집 같은 느낌입니다. 현상을 접할 순 있었지만, 저자의 철학적 줄기를 볼 수는 없었습니다. 나무통 없는 가지만으로 이루어진 잎이 무성한 나무 같았습니다. 그런 나무를 숲속에서 본다면 두려울 것 같습니다.


하나의 줄기를 찾는다면 제목에서 언급한 '두려움'입니다. 예술을 '자기표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책에서의 두려움은 상당히 외재적입니다. 그래서 책을 모두 다 읽고 나면 예술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느끼지 못했던 부문까지도 두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다분히 능동적인 읽기가 중요합니다. 세부 내용은 논의할 가치가 있는 사항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별 논점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어떤 정답 같은 진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면, 아니면 수동적으로 세부 지시사항에 따라서 안내하는 곳으로 생각 없이 따라다니기만 한다면, 무엇을 먹었는지 알지 못하는 뷔페 식사 후의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능동적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책의 숲속을 저자의 안내에 따라 함께 걸어가다 보면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선지자들의 통찰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그 역시도 크게 개입하지는 않습니다. 첨언을 하긴 하지만 이곳이 촬영 스폿이라고 알려주는 정도입니다. 이 책의 재미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읽는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읽지 않으면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느낌만 남게 됩니다. 인증숏만을 남기고 내 뒤에 찍힌 배경이 어느 곳인지도 잘 모릅니다. 7년 동안의 토론의 결과를 읽어내고 싶은 독자의 욕망을 충족 시켜주지는 못하지만, 오랜 경험의 든든한 관광 가이드의 안내는 독자의 관심도에 따라서 읽어낼 수 있는 이야기는 다양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예술이나 나쁜 예술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술만 있을 뿐이다. 물론 드물긴 하지만"

제임스 터버 (James Thurber, 1894~1961)


저자의 안내에 따라 길을 가던 중 내 눈에 들어온 문구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과 잘 맞는 문구라서 눈에 들어왔습니다. "드물긴 하지만" 이란 말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들은 종종 책 속에 등장합니다. 다만 하나의 문장으로 적혀있는 제임스 터버의 글에 끌려 소개합니다. 책에서 예술은 '자기표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죠. 그래서 다른 이의 것과 비교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다른 작품은 나를 표현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죠. 제임스 터버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죠. 예술의 좋고 나쁨은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예술일 수 있다는 것이죠. 다만 드물다고 말합니다. 진짜 예술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좋고 나쁨의 차원과는 다릅니다. 예술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인 만큼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게 나일뿐인데 좋고 나쁘고 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나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작가 자신만이 알 수 있죠. 저는 이것을 '작가적 양심'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도 스스로에게 속아서 그 작품이 나라고 착각하는 예술가도 있으니(많으니... ㅠ), 제임스 터버의 말대로 예술은 드물긴 한 것 같습니다. 진짜 예술은 드물죠!


저자가 비슷한 의미의 말을 합니다. "유일하고 순수한 의사소통은 창작자와 그의 작품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의 생각과도 일치합니다. 소통은 창작자와 관중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과 소통하는 것이고, 관중은 창작자와의 소통이 아니라 창작자가 만든 작품과 개별적으로 소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뉴요커지의 기자인 아담 고프닉은 다른 식으로 표현합니다. "포스트모던 예술은 무엇보다도 관중을 넘어선 예술로 특정 지어진다." 예술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다른 이를 의식한 보여주기 식의 예술은 생명력이 없고,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유명세를 얻어도 공허한 예술일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이 진짜 예술일 것이고, 제임스 터버는 그것을 '물론 드물긴 하지만'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평론가에게 예술은 하나의 명사에 불과하고, 예술가에게 예술은 하나의 동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나도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그 내용을 인용해 봅니다. 예술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를 적어둔 적이 있습니다.


평론가의 글과 예술가의 글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습니다. 평론가는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시 풍경을 이야기한다면 예술가는 그 도시 속을 걸어 다니면서 글을 씁니다. 전망대에선 도시의 매연도 재래시장의 비릿한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부딪힘도 없고, 강한 햇살에 눈이 부시 지도 땀이 나지도 않습니다. 세상을 올려다볼 수도 없습니다.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내려다보면서 그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패턴을 찾고 규칙화합니다. 대단한 법칙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내비게이션 역할을 자랑스러워하기도 합니다.
예술가는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기록합니다. 다른 장소에서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르게 기록합니다. 이정표를 무시하기도 하고, 놓치기도 합니다. 산발적인 기록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들은 직접 땅에 몸을 붙이고 느낀 기록들입니다. 그래서 예술가의 글을 좋아합니다."


책에서 저자는 예술은 '자기표현'이라는 말을 합니다. 개별적인 자아 표현으로서의 예술에 대해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 속에 있습니다. 186p에서 저자는 '자기표현'으로써의 예술을 이야기하면서, 모두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예술 창조라면 자아보다 더 큰 문제들을 안고 사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저자와의 접근이 조금은 다릅니다. 저가 말하는 더 큰 문제들을 포함하는 것 역시 예술가들의 자기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다르다고 보지 않습니다. 예술 창조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가를 표현하려는 요구로부터뿐 아니라, 외부 대상들과의 관계를 완성하려는 요구로부터도 나온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외부 대상들과 관계 역시 자아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스스로 의미하는 '자기표현'에 대한 범위를 정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럴듯하지만 기준이 모호합니다. 사실 이러한 모호함은 책 전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능동적으로 각각의 이야기에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예술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환자"


예술의 도구(미술, 사진, 음악, 시, 소설.. 등)를 이용해서 치유하는 이유는 비논리의 수단이 필요해서입니다. 언어를 벗어난 틀 밖의 영역과, 규칙화되고 문명화된 울타리 안의 논리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정형화할 수 없는 바깥 세계의 이야기를 건드리고, 그 바깥 세계로의 통로를 찾기 위해서 비논리의 수단을 동원합니다. 그것이 예술창작이고, 예술가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버티며 살아갑니다. 정말로 이렇게 하는 예술가는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임스 버터는 드물다고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당신이 예술작품을 이해했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고, 창작가가 스스로의 작품을 말로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고, 우리를 이해시켜 준다면, 그것은 거짓 예술일 수 있습니다. 화려한 작가노트일수록 작품에 대한 변명처럼 들립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을 건드리는 것이 예술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스스로 이렇게 실토합니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예술 창조의 난점들이 실제로 작업실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고찰해 봄으로써 그 어려움들에 직면해 보고자 하였다. 그 모든 실마리들을 하나로 꿰어 명확하고 간결하고 잘 다듬어진 근본적인 대답을 줌으로써 마무리를 하고 싶어지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데, 이는 매혹적이긴 하지만 쓸모가 없다. 대답이란 찾아 놓으면 안심되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유용한 대답도 물음의 형식을 띠게 될 것이니 말이다. 


나는 저자의 이말이 "난 생각(idea)이 없어요"라는 말로 들렸어요. 답을 구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저자만의 방식으로 꿰어서 만든 보배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고 싶었는데, 저자는 옥구슬을 방바닥에서 굴리기만 하는 모양새인 것은 아쉽습니다. 저자만의 통찰이 필요하고 가설이 있어야 수정 보완하면서 발전된 개념으로 나아간다고 봅니다. 물음표를 던지는 것은 노래의 클라이맥스를 듣고 싶어 기다렸는데 가수가 청중들에게 마이크를 돌렸을 때의 허탈감과 비슷합니다.


예술에 대한 나만의 '가설'로 맞서서 읽었습니다. 세부 내용보다는 나만의 가설에 대한 검증에 초점을 맞추어 읽었습니다. 내 틀을 깰 수 있을지, 아니면 수정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면서 읽었습니다. 다시 읽을 때는 저자가 이 책의 중심축이라고 말한, 이 책의 마지막에 던진 물음에 대해서 답을 달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예술가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예술가들은 어떻게 예술가가 되는가?"

"예술가들은 어떻게 작품 창작을 배우는가?"

"만족할 만한 작품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예술을 시작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중도에 그만두는가?"


나에게 예술에 대한 두려움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내 몸이 역겨움에 스스로 떨지 않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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