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Austria | 커피의 유럽 정복의 시작
아침에 갓 구운 빵을 손님에게 제공해야 하는 제빵업자의 하루 일과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새벽부터 부산함을 떨어야 한다. 빈(Wein)에서 빵집을 경영하는 피터 벤더(Peter Wender)씨는 성밖에 오스만투르크 병사의 포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빵을 만들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지하실 재빵실에서 준비중이었다. 밀가루가 고루 반죽되어야 찰진 빵이 나오니 구슬땀을 흘리며 반죽을 힘껏 내려쳐가며 반죽을 하고 있었다.
‘탁’,’탁’,’텅’
밀가루 반죽을 떨어트리는 소리 사이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텅’
깜짝 놀란 피터 밴더씨는 기이하게 여겨 주의깊게 들었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 소리인데…?”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텅’,’텅’…
피터 밴더씨는 아침에 관청문이 열리자 마자 달려가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을 신고했다.
13세기 말 아나톨리아(Anatolia, 터키어: Anadolu) 서북부에 등장한 부족장 오스만 1세(عثمان بن أرطغرل)가 성스러운 전쟁에 종사하는 무슬림 가지(Ghāzī, 성역에 종사하는 전사)를 이끌고 시작된 오스만 투르크는 1326년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 1세(اورخان غازی)의 동로마 제국의 변방 부르사(Bursa) 점령을 시작으로 유럽 정복을 시작했다. 당시 유럽의 크고 작은 전쟁들은 약탈을 위한 전쟁이었지만 오스만투르크는 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 종교적 명분으로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벌인 전쟁이었기 때문에 군사들의 목표와 신념이 강했다.
1453년 메흐메트 2세(محمد ثانى)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를 점령하고 유럽 정복의 확대를 위한 거점이자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정하고 본격적인 유럽 정복을 단행한다. 하지만 헝가리라는 벽앞에서 유럽 정복은 지지부진한 결과만 있었을 뿐이었다.
26살의 젊은 나이에 군주가 된 10대 군주 슐레이만 1세(سليمان,)는 안으로는 법전을 편찬하여 제국의 제도를 정비했고 밖으로는 13차례 대외원정을 통해 국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인물로 서양인들은 그의 이름 앞에 the Magnificent(위대한) Süleyman 이라 부를 정도로 치세를 펼쳤다. 슐레이만 1세와 2세의 치세를 거치면서 오스만 투르크는 1500년대와 160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야 말로 16세기와 17세기는 오스만 투르크의 세상이었다.
슐레이만 1세는 베오그라드(Beograd)를 점령하면서 헝가리를 무너뜨리고 계속해서 유럽전쟁의 목표인 유럽 전지역의 이슬람화를 위한 성전은 계속되었다.
이 후 메흐메트 4세에 이르러 동유럽을 통째로 지배하게 된 오스만은 1683년 유럽에서 가장 큰 정치세력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Habsburgerreich)의 본거지 오스트리아 빈까지 진격하여 1529년에 이어 다시 한 번 진을 친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30만명의 터키군이 친 천막만 약 2만 5천개였고 빈의 성을 중심으로 빈을 포위하고 있었다. 1683년 진을 치고 있던 오스만은 공성전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비밀스러운 작전에 돌입했다. 제빵사가 들은 바로 그 소리가 그들의 작전이었다.
1683년 7월 14일 오스만투르크의 병사들은 칼렌베르크 구릉지에 군막사를 짓기 시작했다. 군막사를 짓는 경이로운 기술을 지켜보며 살을 떤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 어디에도 빈을 위한 원군은 보이지 않는다. 독일과 폴란드의 연합군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성안은 점점 민심이 사나워져 가고 있었고, 두 달이 되가도록 이어진 대치 상태는 성안 군사의 사기만 떨어뜨리고 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에게 연락을 취하여 하시바삐라도 연락을 하는 것이다.
이 때 한 남자가 연락병에 자원하고 나섰다. 그는 상인들과 터키어 통역관을 지낸 시절 때문에 터키어에 능통한 폴란드 인 게오르그 프란츠 콜시츠키(Georg Franz Kolschitzky)라는 남자였다. 콜시츠키는 적군을 만나면 터키인처럼 행세하며 적진을 지나 연합군의 칼 폰 로트링겐 대공과 조우하고 일촉즉발의 상황을 설명하였다. 적진영의 정보도 함께 설명들은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 5만은 콜시츠키의 안내로 오스트리아를 향해 군기를 날리며 출발했다.
성의 주인 레오폴드(Leopold Ignaz Joseph Balthasar Felician) 국왕은 사태가 일어나자 마자 린츠(Linz)로 피신하고, 국왕이 없는 성엔 턱없이 부족한 병사와 시민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치하고 있는 오스만투르크 병사에 수적으로 열세인 빈은 이제 풍전등화의 상태였고,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갇혀있던 성에 먹을 것이라곤 남아나지 않았다. 게다가 역병이 돌기도 하여 성안의 인구수는 줄어들대로 줄어있었다.
이 때 한 쪽 성벽으로 의외의 기쁜 소식이 날아든다. 연합군 5만 명이 도착한 것이다.
아침에 부랴부랴 찾아와서 고변한 피터 벤더의 지하 제빵실에서 나는 ‘텅’,’텅’ 하는 이상한 소리의 출처에 대해서 조사한 결과 오스만투르크의 땅굴을 파는 소리였고 그 굴을 시작으로 모든 작전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런 정보를 이미 알고 있던 오스트리와 폴란드 군은 소리가 났던 곳을 중심으로 땅굴을 파고 들어올 것으로 짐작되는 성벽에 병력을 집중 배치했다.
9월 20일…
느닷없이 땅 속에서 지축을 울리는 ‘뻥’ 소리와 함께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뽀얀 먼지를 뿜으며 무너진 성벽 사이로 오스만투르크 병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미 준비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와 연합군은 오스만투르크 병사가 들어오기가 무섭게 오스만 병사들을 하나씩 무너뜨린다. 아비규환 속에 오스만투르크의 병사들은 겹겹이 자신의 진로방향으로 막고 있는 적군을 도저히 뚫을 수 없어 뒤로 물러서려 해도 앞의 상황을 모르고 퇴로쪽에서 밀려들어오는 병사에 밀려 수만의 병사가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결국 오스만투르크 군은 퇴각하기에 이른다.
1529년 벌어진 이 날의 전투에서 오스만투르크는 모든 짐을 내팽겨치고 도망가는 것으로 끝을 맺고 만다. 몇 십년간 계속된 오스만투르크의 유럽으로의 진출은 이 날을 끝으로 모두 끝나게 된다.
이 후 오스만투르크는 쇠퇴의 길을 맞이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빈의 이 날 전투는 오스만투르크의 운명을 결정짓게되는 사건이지만 커피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이기도 하다.
전투에서 진 오스만투르크의 병사는 처참한 모습으로 본국으로 도망가기 시작했지만, 대승을 거둔 합스부르크의 군사에게는 엄청난 양의 전리품이 드넓은 벌판에 펼쳐져 있었다. 전리품 중 우리가 주목할 것은 낙타 2만 5천여 마리에 걸린 자루 안에서 발견된 초록색의 커피 콩이다. 대상을 따라 다니며 통역을 맡았던 콜시츠키는 이 콩이 어떤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콩이 어떤 콩인가… 이슬람의 모든 사람들이 술을 대신하여 마시며 종교제의에 쓰고, 내로라 할 유럽과 아시아의 거상들은 아무리 많은 금액을 지불해도 없어서 못 파는 제품아닌가?
다른 사람들이 금과 돈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때 콜 시츠키는 전투에 세운 공을 치하해 달라 요청하고 자신은 그 자루 안에 물건과 건물 하나 만을 달라고 하였다. 콜시츠키는 오스만투르크와의 전투에서 승리 후 전공으로 받은 커피와 건물을 이용하여 빈의 중심가에 오스트리아 최초의 ‘블루보틀’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1년 전에 이미 최초의 카페가 생겼었다는 기록도 있다.)
제빵사 피터 벤더 씨도 전공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았다. 피터 벤더씨는 자신의 제빵 기술을 이용해서 오스만투르크의 깃발에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어 자신의 공적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 빵 이름은 피처…
이 후 이 빵은 무용담과 더불어 합스부르크 세력권의 모든 나라에서 먹는 빵이 되었다.
두 달간의 치욕과 공포를 이겨내고 오스만투르크를 씹듯 그들의 상징 모양의 이 빵을 씹으며 새로이 소개된 음료 커피와 함께 아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딸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1755~1793)는 17세의 어린 나이로 프랑스의 루이 16세(1754~1793)와 정략결혼을 한다.
자신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린 시절 향수에 젖어 우울함을 견디며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향수를 달랠 수 있는 길은 고향에서 먹던 음식을 먹으며 달래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왕실요리사에게 피처라는 빵을 설명하며 가르쳤다. 왕실요리사 들은 이 빵이 프랑스 왕실의 다른 음식에 비해 수준이 낮다고 생각해 여기에 버터와 이스트를 첨가하여 모양은 같지만 다른 빵을 만들게 된다. 그리고, 그 빵의 이름에 불어로 초승달을 뜻하는 르 크루아상(Le Croissant)이라 이름을 붙인다.
이때부터 마리아 앙투아네트는 아침마다 그 빵을 먹으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 커피와 함께 아침을 시작하곤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프랑스 전역의 귀족들은 평소 주목하고 바라보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침식사를 먹고 싶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아침식사는 귀족을 지나 평민으로 그리고, 유럽 전역으로 점점 퍼져갔다.
이 때부터 르 크루아상과 한잔의 커피는 유럽대륙식 아침식사 문화로 자리메김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