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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LTNG DWN Feb 16. 2021

살아남은 것과 떠밀려가는 것

스와 노부히로. 바람의 목소리. 2020

 간신히 죽음을 견딘 삶은 위태롭다. 제아무리 긴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무너진 그 날의 폐허 위에 아슬하게 쌓아 올린 삶은 언제든 다가올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무력하다. 숙모와 함께 사는 하루(모톨라 세레나 분)의 아침은 여느 때와 같다. 토스트와 커피와 함께하는 그들의 아침은 평온하다. 이들의 식탁에 적막이 조금 감돌긴 하지만, 숙모는 다가올 오늘의 시간과 그 너머의 내일을 이야기한다. 과묵한 하루 역시 몇 마디 거들며 덤덤히 등교를 준비한다. 평범한 아침들 중의 하나의 시간 속에 노부히로의 카메라는 동석한다. 8년 전, 하루의 아침도 이런 잔잔한 나날들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날의 아침에 영화가 함께 했다면, 그 모습을 담아낸 프레임은 지금의 아침처럼 고정된 모습이었을지 모른다. 고요한 아침 끝에 '바람의 목소리 (2020)'의 오프닝 타이틀은 일렁이는 배 위에서 등교하는 하루의 얼굴을 가득 담은 채 떠오른다. 이 순간, 정경의 공간에서 요동치는 수면 위로 영화는 자리를 옮긴다.


 바다는 지면이 아니기에 두 발을 딛고 그 위에 안정적으로 설 수 없다. 힘을 쭉 뺀 채 죽음을 인정하며 침잠하거나,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그 파도에 떠밀려가야 한다.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이미 한 차례 폐허 위에서 살아남은 하루가 직면한 혼수상태의 숙모는 간신히 폐허 위에 세워놓은 한 줌의 삶을 다시 바다 위로 던진다. 파도 위에 내던져진 존재들은 떠밀려간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마스터 (2012)'의 프레디 (호아킨 피닉스 분)이 그랬고, 장 그레미용의 '폭풍우 (1941)' 속 선장 앙드레 (장 가뱅 분)이 그러했듯, 그들은 도저히 지면에 올곧이 설 수 없이 떠밀려간다. 이들의 불안정한 초상이 부유로 직결되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파도에 몸을 기투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들은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떠도는 모비딕의 에이햅 선장에 가깝다. (따라서 두 영화에서 파도는 끊임없이 이미지로 제시된다.)


 그러나 하루를 비롯한 3.11 대지진을 겪어낸 일본의 세대는 스스로가 배회를 선택한 존재들이 아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의 강물과 '바람의 목소리' 바다는 영화 속에서 단 한 번 제시될 뿐이다. 이들은 세대의 죽음을 이고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속에서 흐르는 물에 떠밀려간다. 따라서, 하루가 숙모의 병상을 뒤로하고 고향을 향해 여정을 떠나는 것은 파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아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의 땅을 집어삼킨 것이다. 순식간에 하루의 발아래는 지면에서 수면으로 바뀌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발을 옮긴 수해 지역의 쇼트는 왜 그녀가 그 자리에서 여정을 시작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차라리 그곳에 내던져진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어디로도 발을 옮기지 못한 채 배회하며 울부짖다 지쳐 그 자리에 쓰러질 뿐이다. 더는 어디로도 갈 수 없기에 삶을 위해 헤엄치기보단, 침잠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게 낫다는 듯이. 미동 없이 누워있는 하루의 육신을 영화는 롱쇼트로 관망한다. 포기하고 내던져진 하루는 폐허의 바다 위를 표류하고 있다. 발걸음을 제대로 떼지도 못한 로드무비는 수면 위에서 가라앉을 위기에 처한다.

 코헤이 (미우라 토모카즈 분)의 트럭은 구조선처럼 그녀를 건져 올린다. 어떤 연유 없이 내던져진 수해 지역에 도착했던 것처럼, 그녀의 이동은 다시 타의에 의해 이뤄진다. 수면 위에서 시작되는 일종의 로드무비는 그 출발부터 떠밀려가듯 시작된다. 삶을 종용받은 하루를 구조한 코헤이는 그녀를 식탁으로 인도한다. 일면식 없는 소녀에게 드는 동정심과 유대감은 그녀에게 따뜻한 저녁 한 끼를 제공하게 만든다.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 '바람의 목소리'에서 하루가 거쳐 갈 수많은 인물들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는다. 코헤이는 그녀에게 '살기 위해서 밥을 먹어야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히치하이킹을 통해 마주한 만삭의 여인과 그의 남동생은 하루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불한당에 의해 강간당할 뻔한 하루를 구출한 모리오(니시지마 히데토시 분)는 지친 그녀에게 편의점에서 산 빵을 건넨다. 모리오가 애타게 찾던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들은 하루와 모리오에게 그들의 전통음식을 대접한다. 모리오는 하루와 함께 조부모의 집에서 사케를 곁들인 저녁을 함께한다. 그녀는 살아있는 혹은 살아남은, 또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될 존재들과 언제나 식탁을 함께했다. 먹고 마시는 자들은 그 행위만으로도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삶을 강요당하듯 타의에 의해 수면 위를 떠밀려갔던 하루의 로드무비도 이들과의 식사를 거듭할수록 주체적으로 그 걸음을 떼기 시작한다.


 참으로 역설적인 논증법이다. A는 B를 먹는다. '먹다'라는 문장에는 목적어가 필요하다. B는 반드시 A에 의해서 먹히는 대상이다. 그것이 반드시 살아있는 동물을 죽여 만든 육식이 아닐지라도, 음식은 조리되는 그 순간부터 원형을 잃고 가공당한다. 이창동의 '버닝 (2016)'에서 벤은 종수에게 요리를 논하며 그 일련의 과정을 제사에 빗댄 것은 소멸과 가공을 전제로 한 것이다. (실제로 기독교 신앙의 번제는 영생을 위해 필요한 순결을 얻기 위해 양을 잡아 불로 태우기도 하지 않는가) 음식을 섭취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대상은 소멸한다. 하나의 생명은 살아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대상의 희생이 필요하다. 모든 살아있는 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소멸시키는 행위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들이 먹는 것은 비단 음식만이 아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기억을 먹고 산다. 그 기억은 음식과 달리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죽음으로 인해 정지된 그들의 시간의 굴레 근처를 계속 맴돌 뿐이다. 하루가 거쳐 간 이들, 특히 그중 이름이 명확하게 밝혀졌던 모리오와 코헤이는 죽은 자들의 시간을 내내 간직하고 있다. 코헤이는 자살한 동생의 이야기를 트럭 위에서 하루에게 전하고, 모리오는 쓰나미로 잃어버린 아내와 딸의 기억을 달리는 밴 위에서 무너졌던 후쿠시마의 풍경을 뒤로하고 건넨다. 하루는 빛바랜 가족사진을 품에 안고 여전히 걷고 있다.


 살아있기 위해 입에 욱여넣어야 하는 음식이 소멸을 전제로 하듯, 육신의 죽음은 시간의 장력에 마지못해 사라진다. 그러나 기억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기억처럼 소멸하지 않고 그대로 정지하는 죽음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공간의 죽음이다. 공간의 죽음은 일이 발발한 그 지점에서 시간과 함께 멈추어버린다. 파괴되지 않은 공간의 죽음은 그들이 떠나온 마지막 순간에서 어느 것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마치 생동하던 그 흔적만 고스란히 지닌 박제품처럼. 오로지 그 폐허의 공간에서 외부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존재는 하나뿐이다. 굳어버린 물체 위에 켜켜이 쌓일 먼지를 실어다 준 공기의 흐름만이 그 공간 속에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모리오가 8년 만에 돌아온 후쿠시마의 집은 그날의 시계와 함께 죽어있었다. 그곳에는 영원히 자라지 못할 딸이 영영 마치지 못한 그림이 있다. 더는 볼 사람이 없는 tv가 여전히 놓여있었고, 아내가 걸어놓은 속옷은 8년째 마르는 중이다. 지진에 의해 조금 흔들렸을지 몰라도, 떠나간 이의 흔적이 서린 자리는 주인의 죽음과 함께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커튼을 걷어내고 바람이 그 집 안으로 불어오기 시작하는 그때, 카메라는 모리오로부터 떠나 독자적으로 그 방안을 유영한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카메라만의 독자적인 시선은 마치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 (1953)' 속 화산재에 뒤덮인 폼페이의 시간을 목도하는 것과 같다. 육체가 시간과 함께 매몰될 때 이 둘은 모두 그 자리에서 박제당한다. 캐서린과 알렉스가 유적지에서 그 박제된 시공간을 물화된 육체를 통해 바라보는 장면과 8년 동안 시간과 함께 파묻힌 모리오의 집을 훑는 장면은 프레임 내부에 서린 죽음이 순식간의 영겁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공간을 찾아온 이들에게 도달한다. 그렇다면 '바람의 목소리'는 '이탈리아 여행'처럼 그 시간의 공백을 뛰어넘는 소생의 마법을 체험하게 될까?

 캐서린과 알렉스가 방문한 폼페이 유적지의 부부 석고상과 하루와 모리오가 들어온 후쿠시마의 집은 매몰된 시간의 껍데기를 응시하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국면 앞에 놓여 있다. 매몰된 시간이 고스란히 보존된 공간 앞에 도착함으로 이들의 시간을 다시 소생시킬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전자의 영화가 이런 종류의 소생을 둘 간의 사랑이란 생명력을 다시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뤄냈다. 후자의 영화 앞에도 동일한 소생이 가능할까? 모리오는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이는 방식으로 매몰된 시간과 조응한다. 하루가 뒤늦게 모리오의 집으로 들어온 것은 바로 다음 쇼트다. 모리오가 불러온 바람이 하루가 들어온 문 뒤편으로 분다. 그 순간, 영화는 지난 시간을 재현하듯 그 바람을 거스르는 역방향의 물줄기를 뿜어낸다. 현재를 거스르는 그 물줄기는 이내 하루의 죽은 가족들을 불러온다. 하루의 남동생이 모리오의 집으로 불쑥 들어온다. 하루는 시간의 역행에 반응하여 어머니와 아버지를 쫓는다. 그토록 보고 싶었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먹고살았던 기억이 매몰된 공간 앞에서 재현된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 영원히 그들과 함께 박제되길 바라며 그녀는 내내 입속에 맴돌았던 말들을 쏟아내려 한다. 영화 역시도 이 순간에 영구히 머무르길 선택할 수 있다. 테오도르스 앙겔로플로스의 '영원과 하루 (1998)' 속 죽음 앞에 놓인 시인이 끝내 가닿는 곳이 영겁의 시간 속 그리워하는 아내와의 하루와 그 언어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노부히로는 끝내 이런 방식의 환영적 소생을 거부한다.


 하루의 죽은 가족들이 되살아난 스크린 속에서 언어는 그들에게 전달될지 모르지만, 그들과 함께 운동을 이어나갈 수는 없다. 그들에게 보고 싶었단 말을 뱉을 수도, 껴안아 볼 수도 있지만, 그들과 함께 공놀이는 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자들이 던진 공이 하루에게 도달할 때 영화는 이런 방식의 환영을 지속해서 내비치길 거부하고 다시 원래의 시간으로 되돌린다. 바람이 빠진 채 8년째 땅에 처박혀 있는 공을 바라보는 쇼트는 매몰된 시간을 파헤쳐 건져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노부히로의 선언이다. 죽은 이의 회생이 생존자들에게 남겨진 방법이 아니라면 그들은 어떻게 죽은 자들의 기억을 남겨야 하는가? 다시 찬찬히 하루와 영화가 떠내려갔던 좌표들을 고민해보자.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시작한 영화가 하루와 함께 폐허로 내던진 채 무작정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 보기도 했다. 코헤이와 함께 죽은 자들의 기억을 되살려보며 배회하기도 했다.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임산부와 함께 떠밀려간 망망대해 속에서 희망을 꿈꿔보기도 했다. 경계 밖으로 추방당해 살아있는 자들의 역사와 마주하며 연대와 고마움을 가져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모리오의 집에 도달해 죽은 자의 소생을 꿈꿔보기도 했다. 이제는 생존자와 추모의 윤리를 고민할 만큼 영화가 그녀와 함께 표류했기에, 그대로 그곳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노부히로는 이마저도 부정하고 다시 길을 떠나려 한다. 하루는 그리고 영화가 끝내 도착해야 할 윤리의 언덕은 어디였는가?


 8년의 세월을 회복한 고무공이 지면에 떨어질 때, 바람은 다시 하루의 곁을 스친다. 바람은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는 존재였다. 모리오가 창문을 열어 초대한 바람이 매몰된 시간을 환기시켰고 사자들을 일시적으로 부활시킬 수 있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이다. 시간과 바람 모두 순리대로 다시 그 시간을 겪어내야 한다. 앞선 장면이 끝나자마자 뒤이어 모리오는 창문 너머의 하루를 바라본다. 내내 표류해가며 시점 없이 그저 곁에 맴돌던 카메라는 모리오의 육신을 입어 시점을 가져간다. 그 시선은 하루가 유채꽃밭을 무작정 걷기 시작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느리고 무기력하게 시선을 떨구고 걸어가던 이전까지의 그녀와 달리, 하루는 여전히 느리지만 목적지를 정확하게 아는 듯 유채꽃밭 속으로 걸어간다. 여태까지의 걸음은 수면 아래로 잠기지 않도록 떠내려가기 바쁜, 부력에 스스로의 육체를 의탁하는데 그친 이동이었다. 줄곧 그녀는 한시적으로 거쳐간 이들의 뒤를 쫓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정하지도 못한 채 배회할 뿐이었다. (코헤이에 의해 구출당하고, 스스로 걷기보단 히치하이킹을 택하며, 공원에 주저앉아 묵묵히 빵만을 먹고, 모리오가 찾아다닌 자원봉사자의 행로에 참여한 모든 여정에서 하루는 한 번도 앞장선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녀가 적확한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며 모리오가 하루의 보폭을 따라가는 쇼트는 영화 스스로가 추모의 윤리에 대한 결단을 내린 장면이다.

 

 침잠에서 부유로, 부유에서 항해로 수면 위를 떠도는 하루의 로드무비는 그 운동을 변모한다. 동시에 노부히로가 내내 고민했던 추모의 윤리도 함께 방황을 겪어내며 나름의 결론을 향해 도달하려 한다. 이는 하루와 영화뿐만 아니라 그녀와 동행했던 모리오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가 먼저 걸음을 뗀 바로 직후 모리오는 여전히 후쿠시마에서 살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그는 줄곧 시간과 함께 매몰되었던 후쿠시마에 찾아가길 거부했었다. 아버지는 그와는 반대로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내기 위해 여전히 그곳에 머물고 있다. 아버지는 사케를 마시며 반쯤 취한 목소리로 그가 1950년대에 보았던 영화 속 후쿠시마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 노래들이 담긴 영화에서만큼은 아직도 그때의 풍광이 남아있고, 그 시간의 목소리가 흐르고 있다. 모리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후쿠시마에 다시 정착할까 고민한다. 시계를 다시 거꾸로 돌려 역설적이게도 앞으로 나아가듯 버텨내는 아버지와의 재회는 모리오에게 폐허를 직면하고 살아나가게 한다. 매일 기억을 먹고사는 생존자들에게 '기억의 되새김질'이 죄책감에 파묻혀 허덕이기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듯.


 하루의 여정에서 표면적인 종착지는 그녀의 가족이 있었던 집에 도달하는 것이다. 모리오가 8년을 배회하다 결국 후쿠시마에 다다르듯, 하루 역시 끝내 앞으로 걸어 나가며 그곳에 도달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아루코의 어머니와 조우하게 된다. 생존자와 생존자가 서로 마주한다. 이 둘은 모두 '아루코'라는 사자의 기억을 매일같이 먹고 산다. 하루는 이 만남에서 벅차올라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어떤 생존은 그 존재만으로 부재한 자의 가정법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자의 환영만큼이나 가슴 아린 것이 살아남은 자의 현현이다. '바람의 목소리'에 깔려 있는 복합적인 감정은 이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생존자의 부채의식 내지는 죄책감과 사자에 대한 그리움은 매일 뒤섞여가며, 끝내 그들로 하여금 침묵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 장면에서 두 살아남은 자가 울먹이며 서로를 끌어안을 때, 영화는 미약하게나마 침묵으로부터 이들을 해방시켰다. 두 인물의 포옹이 쇼트로 나눠지지 않고 그 자체로 담겨있다. 생존자들의 합일의 순간마저 분절시키는 것은 너무 가혹할 것이다. 하루와 영화의 여정이 먹는 행위로부터 활력을 얻고, 현실의 시간을 받음으로 행로를 정했다면, 침묵으로 해방된 것은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하루는 걷고 걸어 폐허에 도착한다. 모리오의 집은 시간과 함께 매몰되어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지만, 하루의 집은 모든 것이 허물어진 채 터만 남았다. 현관과 거실이었던 것. 안방과 화장실이었던 것. 과거완료의 문법으로 사라져 버린 하루의 시간들은 모리오의 집과 달리 소생이 불가능하다. 명백히 소멸됨을 알리는 텅 빈 그녀의 집은 그녀에게 절망만을 안긴다. 침묵으로부터 해방되었던 하루는 처음 수해지역에 내던져진 그때처럼 울부짖으며 무너져 내린다. 다시 처음처럼 가라앉기를 택한 것일까? 그러나 이번에는 모리오가 그녀를 금세 일으켜 세운다. 창문을 통해 걷기 주체가 뒤바뀐 이후 줄곧 그녀의 뒤를 쫓은 모리오는 카메라의 위치와 병치되었기에, 이는 영화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일지 모른다. 무너지지 않고 다시 걸을 것. 폐허 위에서 또다시 좌절할 위기의 하루에게 영화가 제시한 대답이다. 목적지에 도달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을 향해 내디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이들은 가닿을 수 있을까?

 하루는 다시 히로시마로 돌아갈 수 있는 역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소년은 사자와 통화를 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바람의 전화'를 향해 간다. 하루는 소년과 같이 그 여정에 동참한다. 이 마지막 결단은 영화가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순환적 로드무비가 아닌 직선형의 여로를 끝까지 사수할 것을 가리킨다.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다. 수면 위에서 시작한 로드무비는 마치 각주구검의 설화처럼 떠밀려 간 그 순간부터 출발점이 소멸했기에. 회귀하지 않는 것은 영화의 구조뿐만이 아니다. 소년의 뒤를 쫓아 '바람의 전화'로 가는 하루의 여정 역시 이전 단계들에서 취했던 수동적 걷기로의 회귀가 아니다. (앞서 하루가 그녀의 집터에서 모든 걸 포기하듯 무너져 내릴 때 역시 퇴보를 의미하지 않는 것처럼) 소년은 하루와 함께 먹고 마시지 않는다. 또한 그와의 여정은 다른 인물들에 비해 지나치게 축약된다. 모든 살아남은 이들이 하루와 먹고 마셨다는 점에서, 이름도 없는 소년은 유령일지도 모른다.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는 전사가 잠시 지나치며, 언덕 위에 올라서 죽은 아버지와 대화를 하려는 아이의 후면 쇼트가 길게 이어지지만, 우리는 그 아이의 통화내용을 들을 수 없다. 프레임 내부로 거칠게 불어오는 바람이 아이의 목소리를 묻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아이는 하루가 통화하고 나온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차라리 소년은 목적지를 지나친 하루의 여정이 새롭게 도달해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한 영화의 현현에 가깝다. 모리오가 카메라의 위치에서 그녀를 뒤따랐다면, 모리오의 퇴장 이후 영화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년이 유령의 형태로 그녀 곁에 있음으로 비로소 홀로 서기가 가능한 하루를 완성시킨다.


 살아남은 자는 죄책감과 그리움의 양가적 감정 틈새에 끼어 침묵해왔다. 하루가 좀처럼 침묵하는 이유는 보고 싶다는 외침이 목젖까지 차올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루는 가닿지 않을 외침을 내뱉었다. 산사태로 무너진 폐허에서 외치고, 가족들을 앗아가고 앙상히 남은 이전 집에서 외친다. 그러나 그녀의 외침엔 회신이 없다. 되돌아오지 않는 목소리 앞에서 그녀는 걸을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길 위에 누워버린다. 폐허가 된 공간들에서. 그러나 그럴 때마다 살아남은 다른 이들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다시 걸어야만 하기 때문에. 걸어야 먹을 수 있고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살아야 그들의 기억을 보존할 수 있기 때문에. 그녀를 붙드는 10여분 간의 통화는 침묵과 고백을 이어갈 뿐 외치지 않는다. 덤덤히 읊조리듯 말하는 그녀의 다짐 사이로 바람들이 분다. 바람은 시간의 증거다. 시간은 살아있는 이들 앞에선 계속 흐른다. 그리고 그녀는 살아있겠다고 다짐한다. 그 읊조린 말들 사이로 바람이 분다는 것은 살아있는 그녀에게 내보인 생의 증거다. 생의 증거는 기억을 가능케 한다. 기억은 그녀의 통화에 대한 회신이 된다. 잘 지내냐고 사자들을 향해 덤덤히 묻는 그녀에게 그들의 멈춘 시간은 바람으로 생동함을 얘기한다. 내 안에 다른 생명이 있기에 두배로 더 많은 밥을 먹어야 한다고 얘기한 임산부처럼 죽은 자들의 시간까지 곱절로 살아야만 하는 이들에게 바람은 회신이자 의지다. '바람의 전화'는 결국 침묵으로부터 해방된 생존자가 시간으로부터 회신을 받는 곳이다.


 '바람의 목소리'의 로드무비가 끝내 가닿은 공간에서 입증한 하나의 사실은 살아남은 자의 시간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노부히로는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인물과 함께 끝없이 영화 내부에서 배회했다. 설령 그가 다다른 결론이 관념적이라고 할지라도, 생존자의 카메라에 대한 윤리적 방법론을 끝없이 고민한 궤적이 영화의 구석구석 묻어 있다. '바람의 목소리'는 국가적 재난의 상흔에 대한 카메라의 위치를 끝없이 고민함으로 얻어낸 윤리적 로드무비다. 하루만이 수면 위에서 침잠하고 표류하며 끝내 헤엄쳐 회신을 얻은 것이 아니라, 노부히로의 카메라 역시 죽음의 바다에 함께 뛰어들어 같이 허우적대며 추모의 시간을 겪어낸다. 순례길에 함께하여 동행하는 영화는 끝내 실패에 도달할 지라도 그 자취만으로 가치를 갖는다. 이 기나긴 글이 기어코 장황하게도 하루코와 노부히로와 함께 방황했던 것은,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낸 곱절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마주하기 위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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