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션 7 (2017)

우주에서 한 잔 하실래요?

by 문성훈

삐딱한 성격인게 분명하다. 남들은 앞 다투어 예매하느라 바쁜데, 나는 오히려 예매했던 걸 취소했으니 말이다. 딱히 보고싶어서라기보다는 안보면 안될 것 같아서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장안에 화제가 되고 있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얘기다.
아마 사람들이 한참 몰려갔다 빠져 나온 다음이나 TV로 보게 될 공산도 크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하는 사람처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영웅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그 영화 대신 잊혀진 명작 러시아 영화<스테이션 7 2017>을 봤다.

고난과 위기를 극복하고 찬사를 받는 영웅담보다는 주어진 운명과 현실에서 바둥거리면서도 자신을 지키고 소박한 행복을 가꾸는 소시민의 삶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지구를 지키기보다는 가족을, 인류를 구원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사명보다는 양심을 따르는 삶 말이다. 그런 점에서 <스테이션 7>은 이전에 봐온 엄청난 제작비와 물량 공세로 만들어 낸 헐리우드의 우주영화와는 결을 달리한다.
남과 여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 어린 딸과 아내 그리고 만삭의 아내를 둔 두 가장의 선택과 번민, 집단이나 국가가 명분을 내세우며 그 구성원에게 행사하는 폭력와 부조리를 보여준다.
그런데 따뜻하다. 내게 '따뜻하다'는 영화 선택과 감상에서 중요한 기준이다. 해피앤딩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주인공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결말이 권선징악이나 행복으로 끝나지 않더라도얼마든지 따뜻할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줘왔다.

젊은 날 내일이면 죽을 것처럼 일하다 내가 사표를 던지게 된 계기는 아내의 오열하는 만류도 있었지만, 갑작스런 몸의 이상이 결정적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폭주기관차처럼 달렸을지도 모른다. 되돌아 보면 "무엇을 위해서...?"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내가 지켜 본 성공한 남자들의 노후설계는 두 갈래로 나뉜다. 고생한 젊은 날을 보상받듯 건강을 염려하며 여행과 취미활동, 고즈늑한 전원생활을 꿈꾸는 경우와 일흔을 바라보면서도 건강은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사업구상이나 도전으로 의욕을 불태우는 경우다.
통념적인 전자와 다른 후자에 있어 주변은 만류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 주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건강이 안좋은 분일 경우 납득이 잘 안된다. "도대체 왜 그러세요? 이제는 쉬셔도 되잖습니까?"라고 하면 "아니야 아직 할게 남았어. 이번 일만 해놓고..." 당신도 잘 모르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여기에 성공 확률과 취할 수 있는 명예나 이익은 그다지 크지않다는 것을 본인 역시 알고 있다.
베테랑 우주비행사로 지상에서 무료하지만 가족과 행복한 일상에 젖어 든 주인공이 아내의 적극 만류에도 불구하는 위험천만하고 무모해보이는 우주행을 결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인공이 아내를 설득 못하는 것처럼 아내 역시 남편을 영원히 이해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남자와 여자로 지구에 왔다. 화성과 금성에서...

아직 살아는 있지만 공간을 달리하며 죽음과 삶의 양 켠에서 딸과 아내와 나누는 대화는 그리 길지 않다. 주인공은 어떤 후회을, 아내는 무슨 생각를 했을까?
타인의 목숨을 두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판관이 된 상사와 죽음과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순간에 인간은 어떤 버튼을 누를 것인가?
국가 권력이 과연 개인의 삶과 가치를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이며 그 그림자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영악한 인간의 본성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물 한방울로 운명이 바뀌는 인간이 밟고 있던 땅을 벗어났다고해서, 우주에서 그 땅을 내려다 본다고 해서 위대해지는 것은 아니다. 위대함은 원자보다도 작고, 움튼 새 순보다 연약한 건지도 모른다. 흔들리기에. 예측불가해서 인간이 이룰 수 있었던 문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레이져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아이언 맨의 손보다 망치를 내려치는우주인의 손에 더 정감이 간다.

픽션이라지만 숨겨 온 보드카를 나눠 마시는 장면과 죽음을 준비하며 피우는 담배 연기가 인상적이다.


21C 첨단의 시대에도 막강한 자본과 기술력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음을, 익히 봐 오던 고액의 헐리웃 배우들만이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충분하다.


음악이 참 좋은데 마지막 장면. 러시아 음악의 특유의 리듬과 목을 긁는 듯한 음색에 이끌려 찾아봤더니 Korabli였다.

실화가 모티브인데 실제 주인공이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 표도로프)였고,

그 역을 맡은 배우가 또 다른 블라디미르(블라디미르 브도비첸코프)였고,

이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이 또한 블라디미르 비소츠키(Vladimir Vysotsky 1938-1980)라는 배우출신 국민가수다.


블라디미르로 시작해서 블라디미르로 끝나는 영화 <스테이션 7>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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