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박스(Bird Box 2018)
눈먼 자들의 세상
스티비 원더는 단 몇초만이라도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보고싶어 수술에 실날같은 희망을 걸었다. 그는 선천적인 맹인이었지만 뜻한대로 익숙한 삶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꼈을까?
그렇다면 한순간에 눈이 멀게 된 기막힌 현실과 이를 무력하게 인정하게 되면서 엄습하는 공포감은 어떤 것일까? 볼 수 있지만 봐서는 안되는, 더구나 그것이 죽음에 결부되어 옥죄는 구속감과 절망스러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살아 있어서, 볼 수 있어서 행복한 영화 <버드 박스 Bird Box 2018>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머리칼, 피부의 숨구멍까지 드러나는 민낯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산드라 블록의 열연이 보여준다, 주인공이 화가라는 설정이, 처음으로 카메라 렌즈를 통해 바깥 세상을 보려고 시도하는 그레고리의 집에 놓여있던 제도판이 낯설지 않다. 보이는 세상을 그리기도, 물상을 만들어 보이게 하는 직업을 가졌다. 다분히 시각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감독인 수잔 비에르 역시 건축과 디자인을 공부하고 영화에 입문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존 말코비치가 분한 가장 부정적이며 괴팍한 인물 더글라스의 대사와 연기는 다분히 시사적이다. 먼저 죽은 착한 세번째 아내를 빗대며 "결국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살아남아요. 못된 놈과 죽은 자들요"라고 하거나, 동정심으로 집안에 들여 놓은 누군가로 인해 불행이 닥칠 거라는 예언이 그렇다.
과연 그럴까?
<버드 박스>역시 소설이 원작이지만, 여러 면에서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 / 주제 사라마구>와 닮았다.
산들라 블록이 분한 '멜라니'와 소설 속 '의사 부인'이 그러하고, 남은 인류를 상징한듯 한 영화 속 흑인, 백인의 남녀 주인공과 남자와 여자아이. 소설속 등장인물인 의사 부부, 처음 눈먼 남자 부부, 검은 안대 한 노인, 색안경 썼던 여자, 소년. 거기에 위험을 경고해 주거나 위안해 주는 것이 동물인 '새'와 '개'라는 설정이 그렇다.
편의와 부유함의 상징이던 도시가 가장 처참하고 낯선 생존의 현장이 되고, 존재를 알수 없는 '악' 과 눈이 머는 '백색 공포', 내일을 모르는 절박한 공포 속에서도 섹스를 나누는 남녀, 혼란의 와중에도 약자위에 군림하고 괴롭히는 집단의 등장, 눈을 가려야 하거나 멀어버린 세상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놓치지않으려는 인물 또한 그렇다.
앞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 주는 긴장감과 공포, 그리고 막상 그 순간을 넘겼을 때 또는 그것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갖게 되는 기묘한 안도감과 부끄러운 이기심을 느낀 적이 있다.
군 입대 얼마후 등화관제된 천막 안 집합에서 구타를 당했다. 암흑 속에서 사형수에게 주어진 마지막 배려처럼 일렬로 점멸하던 빠알간 담배 한 개피의 빛이 일시에 사라지고,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던 둔탁한 파열음과 신음소리가 공포감과 함께 비로소 새롭게 뚫린듯한 청각을 몹시도 자극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들이닥친 고통과 함께 내 차례가 지나가자 알 수 없는 편안함이 찾아왔다. 그 모든 순간에 나는 동료들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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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긴 고통과 좌절 끝에 찾아오는 사막의 짧은 소낙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막에서도 생명은 살아 숨쉬고, 낙타는 길을 잃지 않는다.
두 아이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다 말다툼을 벌이며 멜로니의 연인 톰은
"인생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이룰 수 있을 지 몰라도 꿈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해 이룰 수 없을 지 몰라도 꿈꿀 수 있도록 해줘야 해"라고 말한다
눈 뜬 아내를 안쓰러워하며 의사가 "당신이 여섯명의 무력한 사람들을 부양하는 짐을 얼마나 오래 지고 갈 수 있을까?" 물었을 때 아내가 말한다. "할 수 있을 때까지는 할 거예요"
유약한 점원 찰리가 보여준 용기가, 식량과 맞바꿔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여자들의 희생이, 급류를 만나 자신의 자식와 남의 자식 둘 중 한 명의 눈을 뜨게해야 하는 순간에, 여섯 명을 이끌며 지쳐 포기하고 싶은 상황에서 그녀들의 선택이 말한다.
우리는 탐욕과 애증에 눈 먼 세상을 살아간다.
눈을 가리고 환청의 유혹을 떨치고 안식처를 향해 고행하듯 급류를 건너는 용기와 소나기에 빨래를 돕는 눈 먼 여자들이 가지는 희망과 서로의 몸을 묶고 살아 남으려는 의지를 가진 자만이 비로소 안대를 풀 수 있고, 다시 시력을 찾을 수 있다.
멜로니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안식처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연인과 자신을 믿었던 여자 아이의 이름으로 불러 준다. 주제 사라마구는 소설에서 마지막까지 등장인물을 의사, 의사부인, 검은 안대 한 노인, 색안경 썼던 여자...로 끝맺는다.
누구나 그들이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될 수는 없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