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결과를 두고 평가한다. 확실하고 편리하다고 생각해서인것 같다.
하지만 이는 현대인의 인스턴트식 사고가 갖는 중대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최근 젊고 유망한 그룹의 멤버가 과거 학창시절의 그릇된 행동이 문제가 되어 중도이폐(中途而廢)되는 안타까운 경우를 보더라도 현재의 성공은 과거 행적과 사유가 축적된 결과물임이 분명하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룬 봉준호감독의 성공스토리에는 필연적인 이유와 고통을 수반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성공한 현재 모습을 두고 일과성의 미담이나 사례만 다루고 주목하는 언론과 세인이 못마땅하다
69년생 봉준호. 나보다 한참 어린 그를 존경하는 지금의 내 현재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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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우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플란다스의 개> 첫 촬영까지 정확하게 4년 2개월 걸렸다. 물론 힘들 때는 대학 동창에게 쌀을 얻어 먹은 적도 있지만 그 기간이 길었던 것도 아니고, 어쨌든 단편 <지리멸렬> 덕분에 나름 수월하고 행복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착실하게 준비해도 데뷔작을 만들기까지 10년 넘게 걸리는 사람도 무지 많으니까.
나 역시 힘들었던 그 분투의 시간을 어떻게 버텼냐고 묻는다면, 사실 내게는 포기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다른 감독들처럼 직장을 다니다 때려치우고 영화계로 뛰어든 것도 아니고,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이후 딴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오직 영화 하나뿐이었다.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뒤 그냥 직진만 해왔다.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고, 다행히 영화아카데미에도 합격했다.
다른 일을 한다는 상상 자체를 해보지 않았다. 물론 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장선우, 박종원 감독 연출부로 들어가게 되어 ‘이제야 진짜 뭔가 풀리나보다’ 생각했다가 이상한 옴니버스 영화를 하면서 더 좌절하기도 했고, 어떻게 보면 온실에서 만들어진 나의 데뷔작과 달리 맨땅에 헤딩하듯 완성했는데도 탁월한 성과를 일구어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보면서 부러움을 느낄 때도 있었다.
또 여러 솔깃한 제안들을 다 뿌리치면서까지 ‘연출부-각본-입봉’이라는 우노필름의 데뷔 코스를 밟았던 것도, 딱히 진득한 ‘의리’였다기 보다 ‘남들 하는 것처럼 홀러온’ 안전한 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눈 팔지 말고 남들 하는 만큼만 하자’는 생각과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청난 실패나 대단한 도전이 없는 나의 데뷔 이야기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어떤 순간에도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을 의심하지 말고 걸으라고.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든 좌절감이 수시로 엄습하겠지만, 이미 발을 내딛는 이상 그저 묵묵히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오직 그것만이 답이다.
<영화감독 17인이 들려주는 나의 청춘 분투기, 데뷔의 순간 - 봉준호편, 푸른숲, 2014, pp. 204~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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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초기 투자자들은 영화제작에 바로 들어가는 것에 모두 반대했다. “그때 웨타디지털이라는 컴퓨터 그래픽 회사가 있어요.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해진 회사인데 그 회사랑 한때 협상을 진행하다가 예산 때문에 결국 결렬됐을 때 정말 자살하려고 했어요.” “정말요?” “예, 자살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뭐 영화를 언제부터 찍는다고 공표가 된 상태였고, 예, 그래서 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마치 나 자신이 사기꾼이 된 듯한 느낌…”
그때부터 봉준호 감독은 ‘10톤 트럭 100대의 부담감’으로 컴퓨터그래픽 공부를 시작했다. 1980년부터 연 4회 발행되는 특수효과 전문잡지 <CINE FEX>를 “쌓아놓고 공부했죠. 알고 싶었어요. 어떻게 해야 되는 것인지. 절대 자동으로 돼서 나오는 건 하나도 없어요. 컴퓨터 그래픽 장면들은 모든 장면마다 감독들이 다 에너지를 투입해야 원하는 게 나올 수 있어요.” 아는 만큼 길이 보일 거라 믿으며 공부하고 또 공부했다.
<MBC 스페셜 – 봉준호 감독편(2013.08.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