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보다가...

영화얘기인데 어쩌다보니-2

by 문성훈

인상을 쓸 때만 패이던 이마 주름이 이제는 고랑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은근슬쩍 장년(壯年)산을 타나 했더니 언듯 중년(中年)마루에 걸터앉았으니 당연한 현상일텐데도 부화가 나고 서글퍼진다.

먼저 이 산을 넘었던 당신들의 심사도 그러했을까? 그래도 당신들은 고함소리에 길을 잃지않아 고마운 마음으로 뒤따르던 우리 세대가 있었고 메아리로 응수하는 세상을 사셨다.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은 다음세대에게 우리세대의 고함소리는 괜한 호기에 불과하고 메아리는 뒤엉켜 소음으로 변질됐는 지도 모를 일이다.



작정한 것은 아닌데 터미네이터(Terminator 2019)를 보고는 체기를 느껴 폴라(Polar. 2019)로 다스렸고 내친 김에 아이리시맨(The Irishman. 2019)까지 독파하게 됐다.
미래에서 온 살인 기계와 할머니 전사의 활약을 따분하게 지켜봤다가 다행히 쉽사리 잠들지 못하는 중년 킬러의 깊고 음울한 눈빛에 반하면서 훨씬 나아진 기분으로 핏빛으로 페인트칠 하던 할아버지 히트맨의 인생여정을 들었다.

살인, 킬러, 히트맨은 범죄라는 한 카테고리에 속한 말들이다. "I heard you paint houses" 영화에서는 페인트공 역시 청소부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치워 없앤다는 의미에서 같은 직종이다.
이전에도 본 듯한 미래에서 온 신구(新舊) 기계인간의 활약상에는 비할 수 없이 탁월하고 재미있는 할아버지 히트맨의 독백보다 더 나를 사로 잡은 것은 중년 킬러 매즈 미켈슨의 카리스마 뿜어져 나오는 눈빛 연기와 서늘한 액션신이었다.

어느덧 나는 중년의 블랙 카이저로 빙의해 레이저같은 눈빛을 쏘며 자로 잰듯한 몸놀림으로 한치도 빗나가지 않는 총질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악당들의 주검을 뒤로 하고 기관단총을 컨트롤하던 장갑을 벗은 손등에 거무튀튀한 정맥이 도드라지고 검버섯이 피더니 그 손으로 800만불의 연금을 세는 로버트 드니로가 되어 있었다. 손주들이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온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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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마다 주역인 세대가 짊어진 사명이 있지 않았나 싶다.
모르긴 해도 내 할아버지 세대에는 "내 새끼만큼은 배 곯리지 않게 하겠다"였던 것 같고,
아버지 세대에는 "못배운 설움을 물려주지 않겠다"였지 않았을까?
전쟁의 난리통에 보퉁이 하나씩 안은 자식들을 앞장세우고 보릿고개 대신 피난길에 나섰던 할아버지세대는 내 새끼만큼은 배부르게 먹여 따뜻한 방에 재우겠다며 사선을 넘고 땅을 팠다.
끼니는 거르지않고 슬레이트 지붕을 인 집일망정 방 한칸은 마련할 수 있었던 아버지세대에는 자식만큼은 망치대신 대학졸업장을 들려주겠다는 일념으로 근대화의 파고를 온몸으로 넘었다.

한겨울에도 내복없이 따뜻한 물을 받아쓰고 철을 잊은 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된 우리세대의 사명은 무엇일까?
나는 "쓰레기는 치워주마"가 아닐까싶다.
할아버지가 땅을 파고 아버지가 기계를 돌리느라 한 켠에 밀쳐뒀던 비닐을 치우고 시꺼먼 윤활유를 닦아내야 하는 사명말이다. 그 토대위에서 거리낌없이 누리기만 했던 게으름을 자책하며 이제는 장갑을 끼고 빗자루를 들어야한다.

출세가 미덕이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던 시대의 산물. 인성은 못갖추고 답안만 외운 자들이 득세하며 구축한 부정부패의 사슬을 걷어내야 한다.
그들이 제 자식은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축대만큼 높은 계단만 남겨두었다. 내 자식을 위해서라도 엘리베이터는 부수고 계단은 넓고 낮게 다시 쌓아야한다.
사슬도 엘리베이터도 없애야 할 쓰레기다.
미세먼지보다 더 혼탁하고 위험한 이기주의와 탐욕, 불신과 거짓으로 숨이 막힐듯한 세상에 숨통을 틔어줘야 한다.
창문을 열고 신선한 바람을 들이고 청소를 시작해야한다.

부정과 부패로 이룬 모든 권력과 재물를 허물어뜨리고 고약한 관행과 악습을 태워야 한다. 그렇게 남겨진 재로 다음 세대의 출발선을 다시 그어줘야 할 책임이 우리세대에게 주어져있다.
띠 두르듯 해안가에 말뚝처럼 박아둔 핵발전소의 전원을 내려 그 엄청난 채무를 다음 세대에 넘겨줘서 안된다. 공직사회의 철밥통을 깨뜨리고 고대 제정일치 사회의 제사장반열에 오른 검사를 끌어내리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전통을 세우려는 법관의 옷을 벗겨야 한다.
화장실 낙서만도 못한 기사와 거짓말을 일삼는 기자에게서 펜을 빼앗아야 하고 폭동을 부추키며 돈벌이에만 혈안이 된 교회 지도자에게 돌을 던져야한다.
지난 세대에게 온갖 고통과 시름을 안겨줬던 일본에 의탁하고 밀가루와 분유에 목말랐던 세대도 하지 않던 미국의 종노릇을 자처하는 자들과 일제가 남겨준 유산과 미군정의 위력을 등에 업고 이 땅에 이식된 개신교를 돌연변이 덩쿨로 증식시킨 교회지도자들을 없애야 한다.

우리 세대가 지금 세상을 청소하려 하지 않고 히트맨이 되기를 주저한다면 우리 후손은 악취나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악취와 질병에 신음할 수 밖에 없고 부정축재한 부자들과 부패한 권력자 밑에서 아무런 희망없이 굴욕당하고 억압받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마흔을 넘기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가. 쉬흔을 넘기면 패인 주름의 의미를 되새겨 봐야 한다.
쓰레기를 치울 때마다 처단한 악인의 수만큼 주름이 는다면 이는 훈장이니 페인트칠 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존경받는 세대로 자리매김하고 그 일원이었음을 자부하는 할아버지로 늙어가고 싶다.



존경하는 거장 마틴 스콜세지와 사랑하는 배우 알 파치노, 그리고 매즈 미켈슨에게 이 글을 바......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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