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얘기인데 어쩌다보니...
터미네이트 2019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잘 들어맞는다.
'어두운 운명(Dark Fate)'이란 제목만큼이나 어울리는 감상을 안겨주었으니 말이다.
딸아이가 보고싶다고해서 예매를 하려던 참이니 같이 가겠느냐는 아내의 전화에 처음에는 마다했다.
감상평에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거니와 한때는 미래 전쟁 영화의 효시이자 전설로 남을만한 걸작에서 이제는 비슷한 플롯을 반복하는 흔한 시리즈물로 전락한 영화 '터미네이터'에 대한 불만이 있어서다.
나를 이 글을 백열등 아래에서 쓴다. 오늘처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후 쌀쌀해진 날에는 그 따뜻한 색감만큼이나 내 방안을 데워준다.
잔을 데워 아침에 내리며 맡았던 고소한 향은 이미 날아가버린 커피를 마신다. 워머가 지켜준 온기는 그대로인데 너무 타버린 누룽지로 끓인 슝늉처럼 쓴 맛만 느껴지는 것이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Termainator. Dark Fate 2019)였다.
어렴풋하나마 예상은 했지만 보겠다고 번복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만이라도 현실에서는 도저히 경험할 수없는 사건을 통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만끽하며 내 안의 숨은 폭력성, 위선따위를 등장인물을 통해 맘껏 드러내는 대리만족이라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두가지로 분류한다.
잠시나마 고단하고 심드렁한 현실을 벗어나 그럴듯한 스토리를 따라가며 주인공을 통해 잠재된 욕구나 불만을 해소하는 영화이거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에도 영화와 현실을 혼동하게 할만큼 잔영이 오래 남아 영화 속 세상을 꿈꾸게 하는 여운을 주는 영화다.
전자는 재미있으면 그만이고, 후자는 감동이 우선한다.
가끔 이 두가지 모두를 갖춘 영화가 있기는하지만 오락성과 예술성 모두를 충족시키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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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해도 아쉬움마저 지울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배우고 익히려는 허기로 찾아보는 강의나 교양프로그램의 강사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는 화려한 언변과 탁월한 전달력에 비한다면 턱없이 빈약한 소양과 얕은 식견을 알아챘을 때 밀려드는 허탈감은 들인 시간이 아깝다는 후회를 갖게한다.
우리는 각종 방송 매체나 온라인을 통해 유명 강사의 강연을 듣거나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참석한다.
그런데 주로 방송을 통해 낯이 익은 일부 강사들의 강연 내용은 우려스러울만큼 수준이 낮거나 속이 여물지 못한 경우가 많다. 내 표현으로는 대본에 따라 모노드라마를 찍는 연기자를 보는 것과 같다.
주로 학원가에서 인기를 끌던 강사들이 역사와 인문학 심지어 경제를 얘기하는 경우다. 감히 그들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할 자격이 되는 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말과 글에서 다시 되새기거나 새삼 깨닫게 되는 알갱이가 드문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재미있다.
사람을 울고 웃기는 원맨쇼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물론 킬링 타임용 영화의 뻔한 권선징악이라는 결말이 그러하듯 잠언 비슷한 멘트로 감동을 주려하지만 차라리 그의 공연같은 강의에 웃다 울다 찔끔했던 눈물 한방울보다 못하다.
'한국의 피터 드러커'로 불리는 분이 있다. 윤석철교수이시다. 제자였던 가까운 후배로부터 그 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생의 정도'라는 저서를 읽었다.
독문학과 물리학, 전기공학과 경영학을 두루 섭렵한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방대한 식견과 담백하면서도 깊은 철학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건조하다.
예제마저도 그리 구미를 당기게 하지는 않는다. 혹시 영상으로 강의를 들어보면 어떨까싶어 찾아서 봤다.
결론적으로 오히려 책이 더 나았다. 조금은 어눌하고 톤의 강약이 느껴지지않는 그 분의 강의를 오랫동안 들으려면 상당한 인내가 필요했다. 물론 나의 기초적인 역량이 부족해서이거나 열의가 그만큼 뜨겁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정작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시청자나 학생으로 하여금 흥미를 불러일으켜 주목하게 하고 쓴 가루약을 물에 개어 먹이듯 충실하고 깊은 지식을 매끄럽게 전달하는 강의 역시 무척 어렵다는 애기다.
영화가 재미와 감동 모두를 주는 것이 어려운 것과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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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내년 학기 강의 시간을 묻는 조교의 전화가 걸려왔다.
요일을 정하며 혹시나 내가 발동이 걸려 배낭을 메고 떠나려면 언제가 좋을지 가늠하다 ' 참 한심한 교수일세...' 내심 흠칫했다.
3시간 연강이라 오전이면 전날 밤샘한 졸업반이 결석하지는 않을까. 오후시간이면 식곤증에 밀려 주억거리는 건 아닐까. 고심한 것으로 자책감을 다소 덜었다.
수년전 마다하던 강의를 맡겠노라 했을 때 내 심산은 여러갈래였다.
평생 교단을 설 수 있었음을 행복해 하셨고 천직이라셨던 선친의 유업을 잇는다는 명분과 (새로 전근 온 미혼의 여선생만 있으면 소개시켜서 며느리라도 선생으로 맞이하고 싶으셨던 당신의 바램을 따르지 않았던 죄송함과 더불어...)
여동생네 아이들까지 일곱이 되는 후손들에게 우리 대에도 그럴듯한 직함의 집안어른이 있어야겠다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과 교수라는 직함에 기댄 세속적인 욕심(재산이라면 사업으로 나름 성공한 막내동생이 있으니...),
그리고 졸업 후 곁눈질하지 않고 디자인이란 한 길만 걸으며 돌부리에 채이고 정강이가 깨지면서 얻은 깨달음과 지식, 디자인을 향한 영원히 식지않을 사랑과 끝내 이루지 못한 미망을 후배들에게 전해주고 당부하고 싶어서였다.
첫시간에 미리 일러줬음에도 학기를 마치고나면 강의평가에 간혹 "공간디자인 수업이지 인문학 수업이 아니지않느냐" "좀더 현장위주의 실용적(혹은 취업을 위한) 수업이었으면 한다"는 항의성 글이 보이기도 했지만
"대학 5년동안 들을 수 없었던 꼭 들어야 했던 강의" "입학 후 처음으로 전공을 잘 선택했다는 자부심을 느꼈다"는 감사인사에 힘을 얻었다.
나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외국 유학중 받은 상장 사진을 보내오거나 진로를 바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게됐다는 메일을 받을 때면 선친이 평생을 바친 교직이 성직에 다름아니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해를 거듭하며 수강신청자가 늘고 청강생도 많아진다.
첫 강의시간에 겁을 줘도 줄지않는 수강생보다 청강생이 부담스럽다. 그 학생들은 다음 학기에 수강신청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나로 하여금 이전의 강의내용이나 교수법을 답습할 수 없게 한다. 고민거리지만 마치 산패를 막고자 김 봉지에 넣어놓은 방습제와 같다.
흥미롭고 유익하면서 신선한 강의는 언제나 어려운 과제지만 가슴 설레는 도전이자 살아가는 보람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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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이다. 신년이면 교수들이 사자성어를 선정하듯 (교수사회가 시대의 양심이고 지성이라는데 동의할 수 없는 나로서는 왜 그러는지 납득이 잘 안되지만)
강의 첫 해부터 "Non scolae, sed vitae discmus" (우리는 학교가 아닌, 인생을 위해 공부한다)라는 글귀를 내 명함 상단에 적어두고 마음에 새겼다. 점으로 여겨질만큼 아주 작은데다 필기체여서 지금까지 누구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4년째 접어드는 2020년에는 "Homines, dum docent, discut"(사람은 가르치며 배운다)를 늘 지니는 물건 어딘가에 새롭게 새길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르친다'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부터도 누군가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느낌을 받으면 거부감이 스믈대는 성격인데다 가르치는 일이 가지는 중압감과 성스럽기까지 한 숭고함을 견디기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자질과 식견이 부족해서인지 더욱 그런지도 모른다.
단견이고 설익은 지식이나마 충실히 전달하고 의미있는 질문으로 스스로 고민하게 하고 싶다. 서로에게 질문하고 생각을 나누는 가운데 같이 깨닫고 배울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수업이 어디 있겠는가.
사자성어라면 '줄탁동시'(啐啄同時 닭과 병아리가 알의 안팎에서 동시에 쫀다)가 될텐데 배움에 비유하자면 어미닭(스승)이 아무리 바깥에서 껍질을 쪼아대도 병아리(학생) 스스로 알을 깨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뜻이 된다.
알을 깨듯 생각의 틀을 깨고 깨달음을 얻으려면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 모두가 정진함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어미닭도 새로운 세계를 열어제끼며 배우는 바가 있을테니 이보다 적합한 경구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내년에는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행복한 삶을 위한 공간 디자인'을 강의할 기회가 가졌으면 한다.
아직은 구상 단계지만 뜻이 있으면 길이 열릴테니 가르치면서 내가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더 공부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한다.
여전히 재미있고 의미깊은, 누군가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을만한 강의를 화두로 삼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