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저번에 안글쿠드나 죽었다고…. 세이야 죽은 사람 욕하고 원망하는 거 인자 고만해라. 눈도 멀고 귀도 먹어가꼬 고생하다 갔다 아이가…”
“니가 운제 글캤노? 하이고 글케... 인자 죽었다카드나. 그리 내 속을 뒤집어놓고…. 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그렇게 그녀는 눈 말갛게 뜨고 살아있는 친구 하나를 죽였다.
아흔을 바라보는 언니는 이제 신장기능이 5%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뿌연 노인의 기억력에 기대 진작에 말을 했노라 했지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여식은 공부시키지 않는다던 시대에 고등학교까지 나온 언니의 총기는 여전히 바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맵씨있는 구변에 저번처럼 용케도 속아넘어간 것일 뿐이다. 이제 50년도 더 된 묵을만큼 묵은 일이다.
선뜻 내키지 않은 통화였다. 하루 걸러 한번꼴로 울리는 언니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도 실은 그 때문이었다. 언제나 마지막은 설거지를 끝내고 수채통을 털어내듯 그녀의 친구인 약국댁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쏟아냈다.
몇번씩 울리던 전화를 받은 건 신장투석을 받지않겠다고, 그런 흉한 꼴 보이고 싶지않다며 고집을 피우는 어머니를 설득해달라는 조카의 부탁때문이기도 했다.
박연희는 그녀의 오랜 친구이기는 했지만 동향도 아니었고 학교를 같이 다닌 적도 없었다. 서로의 남편이 고교동창이었고 오랫동안 이웃으로 살면서 자연스럽게 동갑 친구가 됐다.
여리한 몸매에 유난히 흰 피부가 학처럼 고고한 약국댁에게 그런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고만고만한 또래의 자식들이 중학교를 마칠 무렵이었다. 그때도 언니의 전화가 걸려왔었다.
“니 박연희라는 년 알제? 최서방 친구 마누라람서… 그 년이 어떤 년인데 친구를 하노 으이? 내가 그년 땜에 우째 살았는지 알믄서….” 수화기 구멍마다 가시가 튀어나오는 언니의 목소리만으로, 굳이 이년, 저년을 달지 않더라도 벌겋게 달아오른 언니의 표정이 잡혔다.
“가가 와? 세이야 누군데?”
그녀는 정말 모르고 있었다.
소탈하고 정도 많은 그녀에게는 갑장 친구들이 많았지만 유난히 살갑게 다가오고 따르던 친구였다. 가깝게 지내면서도 조신한 몸가짐만큼이나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목소리를 높이는 걸 보지 못한 여자여자한 사람. 20여년간 일찌기 혼자된 드센 시어머니를 모시면서도 찡그리거나 신세타령을 하는 걸 보이지 않는 며느리지만 가끔은 속상한 얘기를 담담히 털어놓는 유일한 상대가 그녀이기도 했다.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친구는 3대독자인 약사와 결혼을 하고서는 바깥 활동을 더 좋아하는 남편 탓에 약국이 직장이 되어 버렸다.
가끔 친구는 여든을 넘긴 지금도 1살터울 오빠에게 존대말을 쓰고 거슬러본 적이 없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그녀조차 놀래키기도 했다.
한번은 약국에 딸린 집에서 점심을 같이 했었다. 친구는 일과처럼 건넌방에서 치매를 앓고있는 시어머니가 싸지른 오줌을 훔치고 나왔다. 수돗가에서 후루룩 잽싸게 손을 헹구고선 상추쌈을 집어드는 것을 보고는 그녀가 그랬다.
“와… 비누로 씻지.”
“오줌인데 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런 친구가 젊은 날 형부의 외도 상대였다는 사실에 아연해 질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밤새 바느질로 눈물땀을 뜨게했던 언니의 원수 같은 년이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