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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감싸던 종이들 1 >

Vinyl Sleeve Stories

by JDC side A

1. 작은 원의 기억 – EMI Records Original Sleeve


“45rpm의 회전 속도만큼, 세상은 빠르게 돌아갔다.”
그 시절의 소리를 감싸던 종이는 단순한 포장이 아니라, 청춘의 상징이었다.
원색의 원들이 겹쳐진 슬리브 위에서, 음악은 시각의 리듬이 되었다.


_MG_1527.jpg Company Sleeves: 7"EMI Records


손바닥보다 조금 큰 종이 한 장. 낡은 모서리와 바랜 색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화려하게 겹쳐진 원형 패턴은 마치 오래된 극장의 커튼 같기도 하고, 젊은 시절 무도회장의 조명을 비추는 빛 같기도 하다. 중앙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원래는 그 속으로 레이블이 얼굴을 내밀었을 것이다. EMI Records Original Company Sleeve, 45rpm 7인치 싱글을 감싸던 단출한 옷.이 작은 슬리브는 1960년대 영국의 대중음악 풍경과 함께 태어났다. 비틀즈의 첫 싱글을 샀던 젊은이도, 클리프 리처드의 경쾌한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던 학생도, 모두 이 종이를 손끝으로 스쳤을 것이다. 당시 싱글 음반은 지금의 스트리밍 차트처럼 빠르게 소비되었고, 레코드사들은 수많은 곡을 쏟아냈다. 화려한 아트워크를 준비하지 못한 싱글들은 이렇게 회사 공용 슬리브에 담겨 매장 진열대에 올랐다.


원들의 리듬, 소리의 색


내가 들여다보는 이 슬리브는 원색의 원들이 겹겹이 포개져 있다. 빨강, 초록, 파랑이 겹쳐 만들어낸 반투명한 색의 중첩은 당시 인쇄 기술의 제약을 오히려 미학으로 바꿔 놓았다. 사이키델릭 포스터나 옵 아트(Optical Art)를 연상시키는 이 그래픽은, 그 시대 청춘들이 음반 매장 앞에서 마주했을 팝의 시각적 리듬이었다.

슬리브 중앙의 구멍은 기능적으로는 단순히 라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였다. 그러나 디자인적으로 보면, 중앙의 빈 원과 주변의 다채로운 원무늬는 음악의 속성을 시각화한 듯 보인다. 원판처럼 회전하는 턴테이블, 반복되는 리듬, 소리의 파동. 그 모든 요소가 이 작은 종이 위에 겹쳐진다.


익명의 디자이너와 대중의 기억

이 슬리브를 디자인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름 없는 상업 그래픽 디자이너, 혹은 EMI 사내의 무명 디자이너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은 수백만 장의 음반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결국 화려한 앨범 커버보다 더 많은 손에 닿고, 더 많은 집안의 턴테이블 옆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이름 없는 그들의 디자인은 지금 돌이켜보면 "익명의 대중 디자인"의 전형이다.


희소성과 가치, 그리고 시간의 서명

오늘날 이런 슬리브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은근한 인기를 끈다. 가격은 몇 달러에서 수십 달러 정도지만, 가치의 핵심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당시 음악을 기다리던 설렘, 바늘을 올리기 전의 정적, 그리고 짧은 러닝타임 속에 청춘을 담아내던 시대의 온기다.모서리의 구김과 바랜 색은 오히려 이 작은 종이에 시간의 서명을 남겨준다.

그것은 소모품을 문화유산으로 바꾼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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