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저널 522>
환경 문제가 어느 때보다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있다. ‘생태주의’이다. 이는 종래의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인, 인간과 이성을 중심으로 둔 환경주의적(environmentalism) 접근으로는 가속화되는 환경파괴를 막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구 상의 모든 생물체는 동등하게 공존하고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가 아닌, 거대한 생태계의 종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태주의적 관점이라는 테마를 잡지의 표지에서 봤을 때, 환경에 관한 문제를 말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특집좌담은 생태주의의 핵심 관점을 가져와 독서와 출판시장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생태학적 관점이 여러 가지 주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는 그것의 연장선상으로 생태학적 관점에서 내가 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생태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키워드인 ‘연결’,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관심사를 여러 가지 매체로 확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어떤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봤다면 그 영화의 원작 책을 찾아보고, 저자의 다른 저작물들을 찾아보고 그 저작물에서 나오는 공통의 주제의식을 연구하고 그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다른 작가의 작품(문학 혹은 전시회)들도 찾아보는 것이다.
일례로 <메트로 2033>이라는 게임 영상을 통해서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 세계와 ‘si-fi 장르’ 문학을 접하게 되었고, 이것은 나의 문학적 세계관의 또 다른 지평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호기심의 연쇄는 문화예술에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하나의 장면, 작품을 접하더라도 일시적 감상으로만 그치지 않고 더 넓은 생각을 하게 도와주었다. 어떤 그림을 보고 혹은 어떤 장면을 목격하고 어딘가에서 읽은 특정 문장이 생각이 난다면, 이는 우리의 뇌가 축적해 뒀던 지식을 무의식적으로 내적 연결고리를 찾아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이는 창조적 생각을 촉발시키고 세상을 더욱 풍부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나의 문화예술의 향유는 이런 식으로 유기적으로 이어져왔다.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어떤 연결성들을 따라가며 다양한 매체들을 편견 없이 접하는 식으로. 뇌의 지식 생태계라는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매체, 장르에 상관없이 어떤 주제를 연결 고리 삼아 다양하게 넘나드는 것.
현대인들은 매체에 대한 편식이 심하다. 이는 급속한 it산업의 발달이 야기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은 즉각적이고 자극적인 시각정보를 수용하는데 길들여져 있다. ‘독서’에 대한 수요가 적은 것,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잘 편집된 시각 이미지를 봄으로써 시각정보가 주는 일시적 쾌락에 뇌가 길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읽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새가 없게 세상에는 독서 외의 재미난 것들이 넘쳐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상을 더욱 깊게, 풍부하게 하기 위해선 다양한 감각을 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뇌의 여러 부위들을 자극해야 한다. 이는 수동적 영상 시청에 의해서만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입된 생각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지 못한다. 영상 매체를 보는 것과 함께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사람들과 생각을 나눔으로써 지식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인풋과 아웃풋을 균형 있게 함으로써 다른 의견도 수용,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시각 이미지 중심의 문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문화의 한 흐름이다. 하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선, 지나친 매체 편식을 경계를 해야 한다.
유튜브에는 아주 자극적이고 흥미를 끄는 썸네일(thumb nail)이 우리의 클릭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제법 실생활, 학문적으로도 유용한 정보들이 많다.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쳤을 수 있는 숨은 명작들이나 생소한 지식을 알고리즘의 수혜로, 눈에 띌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문제는 흥미로 시작된 영상 시청이 능동적인 관심사의 확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의 추천을 통해서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우연히 특정 정치인의 견해를 옹호하는 영상을 접하면 알고리즘은 이를 바탕으로 나에게 그러한 정치색의 다른 영상들을 자동으로 추천해주고,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듯 관련 추천 영상으로 넘어가게 해 준다. 심지어, 광고까지도 이런 알고리즘을 바탕으로 나의 취향을 분석해 그에 맞는 상품을 골라 띄워준다. 즉 나는 생각이라는 걸 할 필요가 없어진다. 모든 것은 알고리즘이 알아서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알고리즘의 가장 극단적인 폐해는 개인을 ‘확증편향’적 인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기존 생각을 공고하게 만드는 의견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관점은 무시해버리게 된다. 이는 분열적 사회를 만들고, 서로 간의 소통불능을 야기한다. 이 문제가 두드러진 분야가 정치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좌담에서 유영만 선생이 언급한 것처럼, 생각 없는 알고리즘의 추천에 의한 영상 시청은 개인의 사고력을 마비시키고, 타인의 생각을 단지 수용하고 그것이 마치 자신의 생각인양 착각하게 만든다. 최근 에서야 이런 추천 알고리즘의 폐해를 일반인들도 인식하고 있는 추세다. 그러한 문제점을 잘 드러내는 것은 <소셜 딜레마>(The social dilemma)라는 다큐멘터리이다. 서로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들이 오히려 분열적 사회를 만든다는 의미에서 딜레마이다.
많은 현대인들이 이미지 매체에 중독되었다. 스마트폰이 존재하는 한 이러한 추세는 한동안은 계속될 것이다. 이제는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힘든, 양날의 검과 같은 과학기술의 이기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개인 차원에서의 노력은, 본인의 취향을 직접 찾아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영상 시청을 하더라도 이것이 필요에 의한 것인지를 생각하고, 개인의 제한선을 정해 놓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모든 애플리케이션의 알람 기능을 끄고, 필수적이지 않은 어플들은 설치를 해놓지 않는다. 이용해야 하는 경우, 어플이 아닌 웹으로 들어가는 불편을 감수함으로써 물리적으로 어플에 오래 머무를 수 없게 환경을 만든다. 매체에 의해서 주입되는 가치관에 경계를 하는 태도를 가진다면 좀 더 현명하게 인터넷 상의 지식들을 선별하고 거를 수 있을 것이다. 국가적인 차원으로는, 거대기업이 무단으로 개인정보를 취득하고, 그러한 개인정보를 기반으로 정교한 알고리즘에 의해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것을 막아야한다. 또한 SNS 떠도는 거짓 정보를 규제하지 않는 행태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개인의 지식 생태계를 활성화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독서활동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독서 모임이 그중 하나겠다. 특집 좌담에서도 언급했듯, 독서모임은 독서 생태계를 꾸려가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다양한 사람들과 책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은 아주 효과적인 독서의 확장을 이끌어낸다. 가치관과 배경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과의 소통은 개인이 생각해내지 못한 다른 세계와의 연결을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발화함으로써 기존의 지식들이 휘발되지 않고 깊게 자리하게 만든다. 또 의무적으로 오프라인의 만남을 만듦으로써 온라인 세계에만 머무르게 되는 것을 방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이런 독서모임 문화가 그다지 활성화된 것 같지 않다. (술자리 이외에 모임 문화 자체에 익숙하지 않다.) 소수의 사람 사람들 만이 그러한 자리를 찾아 참여하고, 제대로 된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선 비용이 드는 것도 진입장벽을 높게 만든다. 사회 전반적으로 독서토론을 하는 문화가 잡힌다면 그에 관련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이라도 동네 작은 서점을 잘 찾아보면,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독서에 관한 보르헤스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는 생전에 유명한 다독가였다. 실명이 된 후 반스 톤이 그를 인터뷰하며 엮은 책 『보르헤스의 말』에서 그는 말했다.
“… 망원경과 현미경은 눈의 확장이고, 전화기는 귀의 확장이며, 칼과 삽은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기억과 상상력의 확장이다.” 『보르헤스의 말』, (2015), 마음산책
현미경, 낫, 쟁기 그리고 전화기는 신체의 연장인데 반해 책은 기억과 상상력이라는 비물질의 연장으로 보았다. 책은 뚜렷하고 한정된 목적을 가지는 도구들에 비해, 그 역할과 가능성이 아주 넓다는 것이다. 책은 활자로 남지 않았다면 없어졌을 일을 기억하게 해 주고,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기분 좋은 예감을 준다. 책 속에서는 신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공간과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진다.
보르헤스가 현대까지 생존했다면 넘쳐나는 이미지 매체들을 보고 뭐라고 했을까? 이것들 또한 기억의 연장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저 시각의 연장이라고 했을까? 중요한 것은 책이든 영상물이든 이것들의 본래 목적은 세상을 넓게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지 분열시키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3673
#도서#리뷰#아트인사이트#문화는소통이다#매거진#잡지#출판저널#생태주의#생태주의관점#소셜딜레마#통합#분열#독서#독서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