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惟: 섞여가는 나의 정체성
미국에 가는 것이 확정되었을 때 저는 스스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서른에 미국에 간다 해도, 저는 결국 한국인이겠지.” 무엇이 한국인을 규정하는지, 어떻게 해야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었지만, 30년을 한국에서 자랐으니 쉽게 변하지는 않을 것이라 막연히 믿었습니다. 하지만 1년, 2년이 지나며 스스로를 돌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미국에서의 말투와 사고방식,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미국적인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 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여전히 문화의 간극을 크게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디쯤에 서 있는 걸까요. 한국의 색이 옅어지고 있는 것인지, 미국의 색이 더해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중간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변화는 특히 한국과의 관계에서 더 또렷하게 느껴집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시사 뉴스나 경제, 정치 이야기, 유튜브와 밈, 트렌드를 자연스럽게 접하며 친구들과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정착과 생존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여유가 없어서인지, 노출의 기회가 줄어서인지 그런 콘텐츠들과 맞닿아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흑백 요리사’나 ‘솔로지옥’ 같은 좋아하는 예능과 드라마를 즐겁게 챙겨 보기는 하지만, 그것은 한국의 단편적인 한 장면을 소비하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속에 살고 있다는 감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흥미로운 변화도 있습니다. 오랜 시간 타지에서 지내다 보니, 오히려 한국을 낯설게 바라보는 순간이 생겼습니다. 한국에 가게 되면 마치 처음 방문하는 나라에 도착한 여행자처럼 설레는 마음이 듭니다. 북촌 한옥마을의 섬세한 건축, 성수동의 분위기, 압구정의 세련된 거리를 걸을 때면 저는 더 이상 ‘그곳에 사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외국 관광객의 시선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타지에 와서야 한국의 멋과 세련됨을 더 깊이 알게 된 것일까요. 이렇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새로운 경험이 덧입히는 색채가 생각보다 빠르게 제 삶을 물들인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려 30년이라는 시간을 한국에서 보냈는데도, 고작 1~2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제가 생각하고 바라보는 한국의 모습이 달라졌으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미국에 완전히 가까워졌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일과 운동, 취미, 인간관계, 그리고 요즘처럼 요동치는 큰 주식 시장과 관련된 이슈가 아니라면 이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깊이 들여다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삶의 중심이 얕고 흔들리고 있다고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매일 하루에 집중하며 시간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생존인지 성장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밀도 있게 보내고 있다는 감각은 있습니다. 아마 저는 지금 한국의 색 한 스푼, 미국의 색 한 스푼, 그리고 저만의 색 두 스푼이 섞인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완전히 속하지도, 완전히 떠나오지도 않은 채, 그 중간에서 조금씩 저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