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의 담임 선생님은 효도 일기, 감사일기 숙제를 내주신다. 딸아이는 딱히 주제를 안 주어도 할 말이 많아 제법 글로 잘 담아내는 편이다. 그래도 담임 선생님의 주제 일기 덕분에 안마를 받기도 하고, 주제 일기를 무기로 쌀 씻기, 볶음밥 재료 같이 만들기 등과 같은 강제 효도를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감사 일기 주제는 2020년 한 해에 최고로 감사한 것들에 대해 적어가는 것이었다. 출근길에 내가 딸에게 물었다.
"너는 제일 감사한 게 뭐야?"
" 엄마가 ○○사줬을 때"라고 나는 대답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딸아이는 내게 말했다.
"내가 감사한 거? 엄마가 나랑 같이 살아가는 거지. 엄마가 나의 엄마인 게 감사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을 망치로 맞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순간을 망치는 것 같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들었다고나 할까? 빙판길과 흙과 눈이 뒤엉킨 아름답지 않은 길바닥이었지만 출근길이 아름답고 행복했다. 그냥 엄마일 뿐이고 여느 부모처럼 부모로서 보살펴주는 의무를 남들 하는 만큼만 해 줄 뿐인데
"엄마가 나랑 같이 살아가는 게 감사하지"
정말 딸은 나한테 바라는 것이 없구나.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행복하고 감사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는 행복감과 함께 추운 날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건강하게 살려면 지금보다 더 내 마음과 신체를 더 잘 보살펴야 될 듯하다.
산타를 믿는지, 안 믿는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 딸에게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원해?"라는 물음에 "없어, 생크림 케이크나 사서 먹자"라고 해서 나는 정말 그리하였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바라지 않는, 나란 존재가 저와 같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 오늘도 어린 딸에게 배운다.
그녀는 정말 순수한 마음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텐데 내가 정녕 바라지 않은 삶은 순수하거나 무소유의 깨끗한 삶을 지향해서가 아닐테다. 어른인 나는 바라지 않는 것은 내가 그것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내가 베스트셀러 작가를 바라지 않는 것은 그런 삶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린 어른이기 때문이다. 포기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굴욕적이라고 바라지 않는다고 쿨하게 포장해버렸다. 지금은 딸아이에게 나는 건강과 인간성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이것 또한 딸아이가 그래도 똑스럽게 자기 일을 해내서 바라지 않는다고 그저 좋은 부모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딸아이가 정규 교육과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버벅대는 모습을 보이면 중간 이상은 해주길 과연 바라지 않을까? 어른인 나는 벌써 바라지 않는 삶에 대한 답변과 물음이 이렇게 저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꼬여 버린다.
내 집이 있었으면 하지만 간절히 바라지도 않기에 노력도 하지 않는다. 나란 인간은 그런데 마스크에는 왜 이렇게 바라는지 모를 일이다. 작년만 해도 kf만 손에 얻게 되어도 좋았는데 요즘은 한정판이라고 kf마스크에 하운드투스 무늬의 마스크를 샀다. 민무늬의 kf98이 많음에도 욕심을 부렸다. 마스크 줄도 액세서리의 종류의 하나가 되어 진주가 달리거나 레이스 무늬가 있다. 하물며 마스크, 마스크 줄에도 바라는 게 많은데 어린 딸처럼 순수하게 서로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삶이 우리 어른들에게는 가능할까? 그러면 서로 상처도 덜 받을 테고 환경도 덜 오염이 될 텐데 말이다.
내일은 민트색 하운드투스 마스크를 하고 출근해야겠다. 코로나가 걷히지 않아 2021년, 새해에 딱히 바라는 것도 없고 기대도 없다. 그래도 살짝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코로나가 지금보다는 수그러지는 것, 우리네 일상이 다시 돌아가는 것, 여행 가는 것.....
아 너무 많이 바라네..
정말 바라지 않는 삶은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