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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애 Jul 23. 2021

기억은 곧 정체성이다.

최백호, [바다 끝]

잊기 위한 절실한 노력


  우리는 잊어야 할 기억이 있을 때면 그 기억을 상징하는 물건을 버린다. 물건과 함께 기억을 고이 담아 나에게서 떼어 낸다. 내게 담긴 기억을 비워낸다.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졸업앨범을 불태우기도 하고, 이별을 겪고 나서 연인을 잊기 위해 반지를 바다에 던지기도 한다. 길가에 버려진 곰인형은 수많은 기억을 품고 있다.


  마음과 추억을, 경험을 놓으려고 애쓰는 풍경을 노래하는 최백호의 짙은 목소리는 매우 쓸쓸하다. 정말이지 그의 목소리는 '짙다'는 말이 딱 맞다고 느낀다. [바다 끝]이라는 노래는 이 목소리를 더욱 짙게 느끼도록 해준다. 마치 한 번 묻으면 도통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병째로 온 몸에 부은 느낌이다. 노래가 끝나도 계속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 노래를 감히 해석하고자 글을 쓰는 건 아니다. 나는 음악평론가도 아니고, 악보도 볼 줄 모른다. 그냥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내 느낌과 생각을 글로 쓰길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다. 노래는 삶의 활력소다. 그것이 슬픈 노래든, 경쾌한 노래든, 모든 노래는 서로 다른 감동을 담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감동이 없는 노래를 들어보지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래는 있었지만. 노래에 담긴 감동이 나와는 맞지 않았을 뿐이다. [바다 끝]은 정말 마음에 드는 감동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밤바다가 떠오른다. 작은 빛조차 없는 새까만 바다인데, 멀리 펼쳐진 수평선이 희미하게 빛나는 듯하다. 아마 그곳이 최백호가 사랑을, 마음을, 추억을 두고 온 곳일 거라고 생각해본다.




기억과 정체성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내 이름일 수도 있고, 가족관계, 직업, 취미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이든 '나에 대한 기억'이라는 점에서 벗어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나의 기억'이다. 기억을 잃는다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기억이라는 땅을 밟고 서 있다.


  최백호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주 먼 곳에 두고 온다. 다시는 찾으러 가지 못할 만큼 먼 곳이리라. 그의 사랑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낯설고 먼 곳에서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이윽고 그는 마음도 놓아준다. 어디로든 흘러가버리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사랑과 마음을 잃은 그는 그 감정에 담겨 있던 '우리'라는 기억도 잃어버린다. 마지막으로 '우리'마저 놓아버리면서, 자신과 사랑했던 그 사람까지도 모르게 된다.


  기억과 감정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감정은 기억을 토대로 움직인다. 기억과 관련이 없는 본능적인 감정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감정은 기억과 연결되어 있다. 친구와의 약속이 생기면 설레는 건, 친구와 함께 즐거웠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 두려움에 휩싸이는 건, 부모님께 혼났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복권에 당첨되는 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을 주는 건, 상금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뀔 거라는 기억,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백호의 사랑을 두고 오고, 마음을 놓아주는 행위는 곧 기억을 잃는 행위이다. 자신을 잊는 행위이다.


  이 노래는 아주 깊이, 쓸쓸함에 파묻히게 해주는 노래다. 위에서 말했듯이, 밤을 떠올리게 만드는 노래다. 하지만 나에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다짐으로 들리기도 한다. 밤은 밤인데, 이제 곧 동이 틀 것만 같은, 새벽으로 넘어가는 중인 밤이다. 이미 꽉 차 버린 상자에 새로운 물건을 담기 위해선 한 차례 비워내야 한다. 새로운 걸 담지 않더라도, 우리 삶에는 한 차례 비워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비워내고 싶은 순간이 온다.




  이 노래를 들으며, 나는 지금 비워야 할 것을 미련하게 붙잡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본다. 내 안이 가득 차 있는 상태여서, 새로운 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진 않은지 살펴본다. 이 노래를 들으면 쓸쓸하다. 비워내는 걸, 버리는 걸 못하는 나에게 쓸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하지만 위협적으로 보이던 파도는 다행히도 모래사장에 서 있는 내 앞에 도착할 때쯤 작은 물거품으로 바뀐다. 모래사장을 더욱 반짝이게 해주는 물기가 되어준다. 이 노래엔 일출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다.


[바다 끝]_최백호


먼 아주 멀리 있는 

저 바다 끝보다 까마득한 

그곳에 태양처럼 뜨겁던 

내 사랑을 두고 오자 


푸른 바람만 부는 

만남도 이별도 의미 없는 

그곳에 구름처럼 무심한 

네 맘을 놓아주자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 


짙은 어둠만 남은 

시작도 그 끝도 알 수 없는 

그곳에 물결처럼 춤추던 

너와 나를 놓아주자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람에 날려 흐트러지면 

난 우리를 오 

아름다웠던 나의 모든 노을빛 추억들이 

저 바다에 잠겨 어두워지면 

난 우리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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