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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Feb 16. 2024

엄마로 살다 끝날 수도 있지

나는 못마땅하고 우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자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설명으로서 일련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성취하고 경험한 것, 앞으로의 계획 등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스토리를 평생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앞에서 끝없이 반복한다.

ㅡ자미라 엘 우아실+프리데만 카릭, <세상은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중에서



아이를 낳을 때쯤, 여자는 자기 인생의 얼마쯤 왔다고 생각할까? 유년시절을 보냈고, 학교를 졸업했고, (아마도) 사회에 발을 들여 직업을 얻고 돈도 벌었을 테지만, 공무원이나 전문직이 아니라면 확실한 자리가 생겼다고 느끼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뭔가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게 있었다 해도, 시작도 못했거나 시작했다면 헤매고 있을 때쯤일 것이다. 사계절로 친다면 여름쯤. 나이와 인생항로에 따라 여름 중 어드메냐는 다르겠지만.


나 역시, 첫 아이를 낳은 게 서른한 살. 직장을 몇 군데 몇 년쯤 다녔지만, '어떤 경험을 해보았다' 수준이었다.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었다(어떤 가능성은 확실히 지워졌지만). 일과 별개로 사랑하는 사람은 진작에 만나서 결혼이란 선택을 했고, 태평하게 피임하던 시절과 하염없이 아기를 기다리던 시절과 처리하지 못한 채 묻어둔 유산의 기억을 건너,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여차저차 세 아이의 엄마가 되었는데...


그사이 확실하고 착실하게 쌓아간 건 나이뿐이었다. 경력이라고 말하기도 뭐한 것은 단절됐고, 벌거나 불린 돈도 없고, 그 어느 때보다 지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배우고 익힌 게 많았으나 학위를 딴 것은 아니었으며, 동네와 아이들 기관에서 쉬지 않고 대인관계를 맺었지만 아무래도 사회활동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20대 중반까지 인생을 준비한다고 밑바탕을 다지고 씨앗을 뿌리며 살았다가, 꿈과 재능을 제대로 펼쳐보기도 전에, 이름을 떨쳐보지도 못하고 '어, 어' 하다가 엄마가 됐다. 그담부턴 삶이 나를 마구 몰고 가서 날마다 따귀를 맞는 심정으로 눈앞의 미션을 해치우듯 살았는데, 그런 중에도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잠시 어떤 자아가 눈을 뜨고는 컴컴한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거 어떻게 하나... 학문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아무것도 이룬 게 없네. 이제 와 뭘 시작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그럼에도 아이들이 젖을 끊고 기저귀를 떼고 스스로 목욕을 하고 학교에 가고... 그렇게 하나씩 커가면서, 뭐라도 하려고 발버둥을 치긴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바랄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나이 빼고는 모든 것이 내리막인 인생이 될 것만 같아서 불안하고 우울하던 때였다. (물론 아이들은 세상에서 제일 예뻤고, 날마다 주고받는 사랑에 최고로 행복했다. 인생은 아이러니.)





여름방학을 맞아 물놀이를 하러 가족여행을 갔다. 작은 펜션엔 침대방과 온돌방이 있었다. 아직 아이들 잠자리 독립을 안 했을 때인데, 온돌방에 이불 세 채를 쫘악 깔아놓고 아이들끼리 자라고 했다. 뒹굴뒹굴 굴러다니면서 좋다고 해서, 침대방에서 남편과 둘이 잠이 들긴 들었는데...


역시나 한밤중에 막내가 깨서 울었다. 나는 비몽사몽 간에 건너가 아이 옆에 푹 쓰러졌다, 아니 쓰러지려 했는데 중간에 막혔다. 그러니까 계단을 내려가다 마지막 계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없을 때 온몸이 당황하는 것처럼, 머리가 내가 생각하는 방바닥보다 한참 전에 뭔가에 부딪혔다.


아니다. 이런 태연한 설명이라니. 온돌방은 그다지 크지 않은 직사강형 공간에, 문갑인지 화장대인지 가구 하나만 벽 한쪽에 덩그러니 있었다. 아주 튼튼한, 잘 만들어진 원목가구였다. 모서리가 '라운드' 처리되지 않은 아주 튼튼하고 곧은 가구. 나는 반수면상태로 중력에 몸을 맡기고 베개 위로 낙하하려 했는데, 그곳에 그 가구가 있었던 것이다. 뒤통수 정가운데를 강타했다.




으아악!!!!!!




'아프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말 그대로 머리통이 쪼개지는 줄 알았다. 순간적인 고통으로는 내 인생에서 맛본 최고도의 고통이었다. (뒤통수에 대못이 땅! 박히는 느낌?) 그것도 그냥 '난데없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수면 상태에서 당한 것이다. '잠이 확 깬다'는 표현은 옳지 않다. 지옥문이 뒤통수에서 열리는 줄 알았다.


아무튼 나는 아이를 재우러 가서, 세 아이들 모두를 깨울 기세로 비명을 질러대며(통증을 상쇄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뒤통수를 감싼 채 데굴데굴 굴렀다. 셋째는 울다가 놀랐는지 다 울었는지 다시 잠들었고, 나머지 두 아이들도 움찔움찔하더니 그대로 잤다. 놀라서 뛰어온 남편은 내 비명이 신음이 될 때까지("으아악. 으아악. 아아악... 으으윽. 끄으응. 끄응... 너무 앞파... 죽을 것 같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붙들 뿐이었다.


나는 안방으로 기어와서, 땀과 눈물을 닦고, 떨리는 손으로 뒤통수를 만졌다. 분명 '피'도 있을 거야... 하지만 없는 것 같았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고작 타인인 남편에게 뒤통수를 들이밀며 설마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으나, 휴대폰 플래시와 함께 자신의 눈에 불을 켜고도 별 흔적을 찾지 못했다. 좀 붉고 솟아올랐다며, 다시 잠의 세계로 건너갔다.


나는 살짝 뽕뽕하게 혹이 난 게 전부인 뒤통수가 베개에 닿지 않도록 모로 누워 홀로 생각했다. 이 통증은 절대로 이대로 끝일 리가 없어. 잠이 오지 않았다. '뒤로 넘어졌을 때', '머리 충격', '뇌진탕' 등을 검색했다. CT를 찍어봐야겠지만... 이삼일 안에 아마도 어지럼증이 심해지고 구토를 하겠지... 그렇다면 난... 뇌손상으로... 인지기능이 떨어지거나 불구가 되거나... 죽을지도 몰라... 진지하게 심각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오두방정을 떠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지마는...)


한밤, 깊은 잠에서 별안간 깨어난 온몸 세포의 불쾌함에, 여전한 뒤통수의 얼얼함에,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허망함에 젖은 채로 한참을 깨어 있었다. 그사이 난 두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나는, 그러니까 죽음이란 정말로 느닷없이 올 수도 있다는 실감이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죽는 게 무섭다거나 죽고 싶지 않다거나 그런 생각 혹은 그런 마음이 든 적이 없었다(오히려 그 반대였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간에 어떤 전조(길든 짧든) 후에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지, 이런 식으로 갑자기 삶이 절단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또 하나, 이대로 끝이라면 내 삶이 너무 헛헛하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이룬 게 없잖아. 아무것도 한 게 없잖아... 아니, 아직 사는 중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어쩌다 죽었나? 다른 사람 목숨을 구하다 죽은 것도 아니고, 대의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펜션의 문갑에 뒤통수를 찧어서 죽다니.


나는 못마땅하고 우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별일 없이 살고 있다. 한 친구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 기대와 달리 깔깔 웃지 않았다. 나는 '아이 옆에 누우려다 문갑에 머리를 찧은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죽음' 목록에 오를 만큼 우스웠는데 말이다. 나는 머쓱해져서 "그렇게 아무 의미 없이 죽는 건... 좀... 웃기잖아요."라고 했더니, 그는 말했다.




그럼 어때요.
그렇게 죽는다고 뭐... 다른가?




나는 그 말에 항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렇게 죽으면 안 될 이유는... 글쎄,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무의미'한 죽음이 다른 죽음, '위대한' 삶을 살았든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았든 그런 죽음들과 크게 다르다고 할 게... 없지 싶었다. 안 그런가? 한 인간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일반적으로 위대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걸 누가 알 수 있을까? 누가 판단할 수 있으려나?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뭔가 찜찜한 채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죽음의 전조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고, 얼마나 잘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 황당하고 허망하고 아쉽겠지만, 한 가지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글을 쓰고 있다.


아이들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는지, 크고 작은 실수를 하고 어떻게 다음으로 넘어갔는지, 아무에게 아무것도 아니어도, 우리 서로에게 얼마나 기쁘고 아리고 애틋한 시간이었는지, 이렇게 불완전한 인간이 어떻게 사랑이란 걸 붙들고 살았는지.


아이들이 평생 되뇌고 타인에게 말할 수 있는 스토리를 남겨주기 위해서.



그 펜션의 다른 탁자. 이런 가구, 이런 모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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