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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Feb 23. 2024

사라진 월요병, 두려운 방학, 충격의 코로나

이 시간은 어쩌면, '마지막에 가까운' 기회일지도

내게 월요병이 언제 다시 찾아왔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일을 그만두자 싱거운 단어가 되었던 월요병이 아기가 생기고 부활했다. 이 자그마한 존재를 어쩔 줄 모르고 기나긴 하루를 보내다, 남편이 쉬는 주말이 되면 숨을 돌렸다. 남편과 번갈아 아기를 안고 달래고 재우고 먹이고, 셋이 함께 외출을 했다. 둘이 종종대고 허둥대다 보면, 잠깐씩은 소꿉놀이 같기도 했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마음이 무거워지고, 의기소침해지고, 무기력해졌다. 그것이 내일 아침이면 남편은 회사로 가버리고, 다시 아기와 나 둘만 집 안에 남겨져야 하는 데서 오는 막막하고 처량한 감정임을 불현듯 깨달았다. 그렇게, 내가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월요병을 제대로 겪었다.


그런 월요병이 언제 다시 사라졌는지 역시 정확히 기억한다. 첫째가 만 3세(둘째 6개월)가 되고 기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한 달쯤 갈 때 실랑이하고 올 때 애처로워하는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아이가 적응했다. '어린이집은 가는 것'이고, '가면 즐거운 곳'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일요일 오후부터 나는 왠지 가뿐해졌다. 월요병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예상하지 못한 난관은 방학이었다. 여름과 겨울에 방학이 있었다. 어린이집은 일주일 전후, 사립유치원은 2주일가량, 병설유치원과 초등학교는 여름 한 달, 겨울 두 달. ... 그랬다.


나의 것이었을 때 당연하고 기다렸던, 때로는 지루하기까지 했던 방학이, 나의 것이 아니었을 때 아묻따 부럽기만 하던 방학이, 내 아이의 것이 되자 세상 두려운 것이 되어 나타났다.


하루 종일 아이와 마주앉아, 어린 동생(들)을 끼고, 남편도 없이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삼시 세끼와 간식을 무엇으로 먹인단 말인가? 방학 공지가 나오기 한 달 전부터 싸늘했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이 두려울 정도의 막막함은, 진정 경험자만이 안다.


하지만... 사실 경험자로서도 이상하긴 했다. 원래 (아이를 기관에 보내기 전부터, 그리고 주말에도) 하던 일 아닌가? (시어머니도 아니고) 내 아이 아닌가? 단지 며칠 (최근엔 늘 한두 달이지만, 그땐) 아닌가? 그냥 먹이고 놀리면 되는 거 아닌가?


나의 답은, '몸이 기억한다'는 것이다. 내 모든 시간, 내 몸, 내 전인격을 타인에게 맞춰야 할 뿐 아니라, 그의 '책임자'이자 동시에 '종'이 되는 하루에 대해. 한 순간도 숨 돌릴 틈 없는 연속된 시간에 대해. 그것은 정말 숨이 막히는 것이었다.


기관에 다니면서 친구들과 함께, 여러 활동을 하는 게 익숙한 상태가 된 아이는, 집 안에 있으면서 심심하고 지루해하고 남는 에너지를 어쩔 줄 몰라한다(혹은 그렇다고 짐작한다). 티비는 쓸 만한 무기지만, 단점은 길게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바깥놀이나 바깥활동을 하면 되는데, 덥거나 추운 날씨 때문에(바로 그 이유로 방학을 했으니) 놀이터 등 그냥 '바깥'은 안 된다. 남들 다가는, 보통 유료의 시설을 구원처럼 사용하지만, 들이는 에너지와 비용이 만만치 않다.


먹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리를 하루에 한 번 하는 것과 두 번 하는 것과 세 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또, 아이가 둘 이상이면 한두 살 차이여도 식단도 완전히 다르고.) '돌밥돌밥'은 귀여운데 슬픈 말이다. 준비하고 만들고 먹이고 치우고 나서, 앞치마를 벗으며 시계를 봤다가(헐, 점심 준비할 시간이…) 헛웃음이 나왔던 사람이라면 안다. 이 짓을 서너 번 하고 하루의 끝이 되면 나는, 후줄근한 차림새로 생기가 사라진 채였다.


그래서 '방학을 보내는 법'은 보통 두 가지다. 중요한 시험 혹은 발표나 프로젝트를 준비하듯이, 재능과 에너지를 끌어모아 사전 조사를 하고 물품을 구비하여/발품을 팔아 '엄마표' 프로그램과 식단을 짜서 운영하든지, 아니면 죽었다 생각하고 아이들과 부대끼며 버티든지. 나는 보통 후자였다. 전자였던 적도 있었으나, 내 깜냥으론 지속할 수 없었다.





2020년 3월은 기다리고 고대하던 봄이었다. 드디어 셋째도 기관에 가니까. 하루 중 적어도 몇 시간은 내게 '혼자만의 시간'이 보장될 것이었다.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은 2012년 첫 아이를 낳은 이후 처음이었다. 3월이 오면, 3월이 오면은... 날마다 읊조렸다.


그 겨울의 방학은 특히 길었다. 첫째는 초등학교 1학년을, 둘째는 언니를 따라 병설유치원을 수료했다. 방학이... 두 달이었다. 두 달을 세 아이와 함께. 3월만 돼라, 3월만... 그러면서 버텼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진 것이다. 몇 차례 개학이 미뤄질 때마다 나는 정말 미치는 줄 알았다. 남편도 재택을 하느라 집에 있었다. (남편이 있어서 분명 도움도 됐지만… 남편은 정말 '근무'를 했다.) 모두 기억하다시피 코로나 초기엔 집에만 있어야 했다. 5인 단체합숙 시작.  


그야말로 모두가 지치고 힘들던 때였다. 내 개인적인 인생사를 더한다 한들 제일 힘든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육아우울증을 공유했던 A언니와 통화하다가 하소연을 좀 했다. 아이들이랑 하루 종일 지내는 일상에 대해.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이어지는 방학의 끔찍함에 대해. (그 언니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나라에 살고 있었다.)




우와. 좋겠다!
너의 아이들은 성품이 좋아질 거야.
코로나 덕분에 엄마 아빠랑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니까 말이야.




나는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고, 나중엔 실소했다. 말문이 막혀서, 말도 안 된다고 항변도 못했다. 그런데 이후로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해석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뭔가 달라졌다. 하교 후 피아노학원에 혼자 다녀왔다. 친구랑 연락해서 놀고 오기도 했다. 등하교도 혼자, 학원도 혼자, 놀이터도 혼자. 먹는 것도 노는 것도 자는 것도 다 다른 미취학 아동 셋을 기르던 2년 동안 나는 정말로 힘들었었는데, 첫째가 이렇게 내 손을 떠나니 일상이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이 생각났고, 이제 이 아이는 내 품을 떠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분이 묘했다. 가벼워진 것 같고 다행인 것도 같으면서, 미련 같은 게 남았다. 이렇게... 떨어지는 건가?


아침에 학교 가기 전, 길게 잡아야 한 시간 동안 내가 아이와 하는 상호작용은 제한되어 있었다. 일어나, 세수해, 옷 입어, 아침 먹어, 잘 다녀와. 하교 후도 마찬가지다. 학원 갔다 왔니? 숙제했니? 간식 먹어. 어디서, 누구랑 놀아? 차 조심해. 5시까지는 들어와. 저녁엔, 목욕하라고 하고, 밥을 차려주고, 양치하라고 하고, 자라고 했다. 그 모든 시간에 나는 <알사탕>의 아빠처럼 사랑한다는 마음이었지만, 잔소리처럼 들리는 말들만 했다.


그사이 아이는 이제 학교에서 온갖 '교육'을 받고, 학원에서 무언가 익히고, 친구들과 내가 다 알 수도, 확인할 수도 없는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그럴 것이었다. 내가 아이에게 근본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시간은 끝이 났다는 걸(정확히는, 끝나기 시작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 순간, 나는 사실 서글펐다. 아직 제대로 준 것 같지 않은데. 줄 게 많이 남은 것 같은데.


'힘들다'는 것에 너무 압도되어 있었던 것이다. A언니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이 났다. 정말 그랬다. 학교에 다니는 중에는 일상적인 것으로 꽉 차서, 뭔가 일상을 벗어난, 어쩌면 더 중요하고 깊은 무언가를 전하고 나눌 시간이, 아니 눈을 맞추고 살을 부비고 실없이 함께 웃을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내 품을 떠났다고 생각한 아이가 방학이 되면 돌아왔다. 자연스럽게. (더 크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까지는 아직 내 품에 들어온다.)


이런 생각으로 (코로나로 길어진) 방학의 내용이나 나의 지침이 곧바로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날 이후 지금까지 방학을 맞이할 때마다 조금씩 뭔가 나아졌던 것 같다. 이 시간이 어쩌면 '마지막에 가까운' 기회라는 생각을 곱씹으면 정신이 바짝 들었고, 힘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무얼 열심히 했던 건 아니다. 기준을 낮추고 힘을 빼고…) 아이들이 크는 동안 아마 나도 조금은 커서, 더 느긋해지고 편안해지기도 했을 것이다(나 혼자 늦잠도 자고 낮잠도 자고…).


여전히 여름이 깊어가고 찬바람이 불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방학이 다가오는구나...' 그래도 막상 방학이 시작되고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생각보다 할 만한데? 꽤 괜찮은데?' 그러면서 혼자 흐뭇해한다. 이제 개학이 열흘쯤 남았다. '남은 날 동안 뭘 해야 아쉽지 않으려나?' 심지어 서운하려고 한다.



집 외에는 어떤 '실내'도 불가하던 코로나 시국, 다같이 산책을 많이 했다. 별 게 아닌데 좋았다. 고양이 영접.


자전거, 씽씽카 타고 동네 한 바퀴. 주말에도 할 수 있지만, 남는 게 시간일 때 하는 산책이 더 꿀맛. 세월아~ 네월아~


일어나서 세수도 안 한 채, 옹기종기 앉아 하염없이 식물 구경도 하고.


최소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보드게임은, 우리집 귀한 방학 손님.


주사위 던지고 돈 세는 게 다였던 깍두기 셋째도 이제 어엿한 플레이어.


깍두기를 거절하고, 혼자 다른 게임을 하기도. 1인 2역으로...


어느덧 동시에 1인 2게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어쨌거나 나는, 절대로 져주지 않는다. 흑의 셋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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