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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Mar 02. 2024

손톱 깎아주는 시간

스무 번씩 꼭꼭 눌러 적는다.

물론 목욕시키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아기의 손톱을 깎는 일 앞에서 나는 또 무능력자가 되었다. 최대한 미루다, 신생아(생후 한 달까지) 딱지를 뗄 즈음 처음으로 잘라주었다. 종잇장 같은 손톱이 접힐 만큼 길었던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한다… 목욕시키는 일은 적어도 산후조리원에서 배웠고, 그동안 산후도우미 아주머니와 친정엄마가 하는 걸 지켜보기라도 했는데… 하지만 이 일이야말로 내가 아니면 안 되었다. 내 아이의 손을 자를까 봐 엄마 스스로도 못 믿는 일을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막막한 마음을 거두고 미리 사두었던 아기용 손톱깎이를 손에 쥐었다.


처음엔 아기가 곤히 잠들었을 때 시도했다. 아기가 움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손싸개를 조심히 벗긴 뒤 아기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적막한 가운데 시계 초침 소리가 들리고, 등줄기로 흐르는 땀이 느껴졌다. 내 손가락들은 경직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고, 아이의 손가락은 무념무상해 보였지만 가끔씩 이의라도 있는 듯 발딱 솟구쳤다. 나는 그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손톱 열 개, 발톱 열 개를 자르고 나니, 그야말로 온몸에 진이 빠졌다. 며칠 늙은 것 같았다. 어느 한 군데 피 보지 않고 손발톱을 다 깎았으니 미션은 완료지만, 하루 중 유일한 평온의 시간인 ‘아기가 곤히 잠든 시간’을 이렇게 무섭게 보내고 싶진 않았다.


다음 내가 택한 방법은 수유 중에 깎는 것이었다. 수유는 자주 했고, 그동안 아기는 웬만한 일엔 관심도 없고 놀라지도 않았다. (수유쿠션을 쓰거나 누워서 수유하거나 아기가 앉아서 수유하는 경우 나는 두 손을 쓸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못하면서 불안하기만 하던 때에, 모유수유의 드넓은 은혜로 해결한 일 중 하나였다.


매주 스무 개씩 깎는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그리 오래지 않아 숙련되었다. 이제는 아기가 두 눈 말똥하게 뜨고 자기 손가락을 쳐다보게 하면서 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주사를 맞히거나 이를 빼는 일에도 몰래 후딱 하기보다, 미리 무슨 일을 할 것인지 말하고 얼마큼 아플 것인지 투명하게 말하는 쪽인데, 손톱 깎는 건 정말 안 아프니까.)


아이 손가락을 하나씩 잡고 깎으면서 말했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그렇게 두 번, 발가락 하나씩 잡으면서 두 번. 또 어느 날엔 하나부터 열까지 세기를 두 번. 말을 배우면서 아이는 손발톱이 하나씩 잘릴 때마다 나를 따라 말했다. “엄지~ 검지~”, “하나~ 두울…” 끝나면 같이 박수.


둘째를 낳으러 가면서, 나는 남편에게 이 일을 맡겼다. 내가 집에 없는 보름 남짓 동안 시어머니가 첫째를 돌봐주시기로 했지만, 눈이 안 좋은 어른에게 부탁할 일은 아니었다. “두 번만 해. 알았지?”


남편은 꽤 세심한 남자다. 첫째를 데리고 산후조리원에 방문할 때마다 손톱깎이를 들고 왔다. 딱 두 번 왔다.


나는 조금 기가 막히긴 했지만, 외부인 면회를 할 수 있는 좁은 대기실에 앉아서 첫째를 품에 안고 손톱을 깎아주었다. 하긴 산모라고 못할 일도 아니었다. 스무 개나 자른다고 무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긴 이야기를 나누거나 무언가 제대로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일을 하는 그 시간은 전에 없이 농밀했다. 아이의 손톱과 발톱을 하나씩 자르면서 아이와 다시 이어지는 것 같았다. 사실 오랜만에 보는, 너무도 사랑스럽고 여전히 소중한 아이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고 전할 길은 서운할 만큼 투명하고 옅었다. 눈을 맞추고, 꼬옥 안고, 뽀뽀하고… 사랑한다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고. 그렇게만 하고

헤어지면 확인하지 못할, 어쩐지 믿지 못할 많은 것들을 스무 번씩 꼭꼭 눌러 적어준 것 같았다. 마음은 원래 에둘러 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셋째를 낳으러 갈 때,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조리원 올 때 손톱깎이 가져와.“ 남편은 딱 두 번 왔고, 마흔 개씩 잘라도 산후풍은 오지 않았다.





아이가 아홉 살 무렵이 되었을 때 혼자 손톱을 잘라보도록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곧잘 하면 손톱 깎는 일도 스스로 할 일로 넘어갔다.


막내가 올해 여덟 살. 손발톱조차 내 것만 돌볼 날이 다가온다. 일주일에 여든 개씩 깎는 일이 별 볼 일 없이 귀찮아서, 피하는 아이들을 붙잡아 해치우듯 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만큼 자라는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내 손으로 아이의 손발톱을 돌보았다고 생각하니, 이제 와 별 게 다 뿌듯하다.


그리고 내가 어느 때나 말끔한 손톱으로 살았던 건, 아주 긴 세월 엄마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임을 떠올린다. 사랑은 원래 에둘러 깨닫는 건가 보다.



초점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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