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첫 직장의 쓴맛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다면

by 모도 헤도헨



H에 입사한 것은 대학 졸업 후 9개월 만이었다. 4학년 2학기부터 슬슬 시작한 구직생활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야말로 내 인생이 이대로 쪼그라들까 봐 마구 떨리던 시절이었다.


사실은 그해 여름 C에 입사했었다. 드디어! 인턴으로 들어가 나를 너무나 맘에 들어했던 사장에게 곧바로 정직원 제안을 받았는데, 2주도 안 가 권고사직을 당했다.(허허허)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겪고 H에 취직하게 된 나는, 기필코 잘해내야 했었다. 그곳이 애초 내 선택지에 들지도 않은 직장이란 아쉬움 따윈 던져버렸다. 여기서도 뭔가 잘못되면, 나는 ‘알고 보니 사회부적응자’가 된다,라고 생각했다. 아니, 남들이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에 대한 나의 믿음은 마른 나뭇잎 같던 시절이었다.




입사 전날, 침대에 누워 연봉협상에서 얼마를 요구할지, 어떤 근거를 댈지 한참 머리를 굴리다 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연봉협상은 없었고, 심지어 계약서도 쓰지 않았다. 기대한 일이 일어나지 않은 하루는 길었다.


면접 볼 때 그런 인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H는 정말 폐쇄적이고 권위적이고 후진적이며 건조한 곳이었다. 파주출판단지의 여느 건물처럼 건물은 최신식의 특색 있는 외관이었는데, 컴퓨터는 윈도98에 한글97을 쓰고 있었다.(때는 2000년대 중반) 그곳은 출판사였고, 일의 도구라곤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전부인 곳인데..! 이것은 많은 것을 함의했고,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사원은 딱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었다. 최소 10년 이상 된 임원들(이곳에 적응해버려서 다른 곳엔 웬만해선 이직할 수 없는 사람들)과 2년이 채 되지 않은 일반 사원(자신이 정한 최소 기간만 지나면 무조건 나갈 사람들). 입사한 다음날 바로 연락두절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원래 이직이 잦은 동네이긴 했지만, 이것은 많은 것을 함의했고, 역시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얼굴엔 웃음이 없었다. 눈을 마주치는 일도, 대화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내 입사동기와 일반적인 대화를 했고, 우리보다 몇 개월 전 입사한 동갑인 N 정도만 사람 같아 보였다. 내 사수는 ‘어디에나 있다는 미친 x’이라 할 만한 캐릭터였고(다행히 그는 곧 떠났다), 부장은 옛날 미디어에서 그려지던 ‘못난 노처녀’의 전형이었다(사람이 배우자나 자식을 사랑하면서 성숙할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편견을 내게 심어주었다. 다음, 다다음 직장에 다니면서 감사하게도 깨졌지만).


전 사원 모두 휴가는 1년에 3일뿐이었다. 2000년대 초반 대학에 다닌 내가, 80년대 고등학교 교실에 갇힌 느낌이었다. 깜깜할 때 출근해서 깜깜할 때 퇴근하던 어느 날, 지하철 역사에 앉아 ‘삶이란 이런 것인가. 앞으로 내 삶은 계속 이럴 것이란 말인가’(나는 평생 ‘회사에서 일할’ 거라고 생각했으므로)라는 생각으로 훌쩍훌쩍 울기도 했다.


하는 일도 너무나 틀에 박힌 일이었다. 그래도 매뉴얼을 배우고 익힐 때까지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편집자’를 언제든 대체가능한 톱니처럼 소비하는 곳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편집자의 역할은 이게 아닌데... 한 번은 사회과학서적이지만 대중적으로 통할 만한 책을 맡아서, 제목에 대한 아이디어부터 보도자료까지 공을 들인 적이 있었는데, 정말 아무도 읽고 싶지 않을 제목과 표지디자인을 달고 나오는 것을 보고 주저앉을 뻔했다.




1월 1일, 그 금쪽같은 휴일, 아침 일찍 전 사원은 사장의 별장으로 세배하러 가야 했다. 가서 여자들은 사장의 아내를 도와 떡국을 비롯해서 요리를 도와 상을 차려 내고, 남자들은 장작을 팬다든지 밭을 갈았다.(때는 2000년대 중반) 밥을 먹고 얼마간 세뱃돈을 받고 술도 마시고, 다같이 고스톱을 쳤다. 그렇게 새해 첫날을, 노예와 다름없게, 그러나 누구에겐 ‘가족같이’ 보냈다.


월급날이 되면 사장의 아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봉투를 일일이 나눠주었다. 우리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얇디얇은) 그 봉투를 받았다. 월요일은 30분 일찍 출근해서 전사 회의를 했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사장 혼자뿐이었다. 주로 자기 자랑의 내용이었다. 하루 8시간 근무가 아닌 8시간 30분 근무인 데다, 주 5일 근무도 아니고 격주 토요일 출근했다. 노동운동으로 감옥까지 다녀왔다는 사장이 그 연장선에서 차린 회사였다.


그래도, 사장은 우리를 귀여워했다. ‘꼬맹이’라 부르고, 가끔 적막한 편집실을 돌며 ‘애정 어린’ 말을 건네기도 했다. 순진한 나는 그런 사장이 ‘나이 들어 꼰대가 됐지만, 알고 보면 재미있는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의 매뉴얼을 익히고 할 만하다 생각한 내가, 신문광고에서 본 ‘출판인학교’에 다니고 싶으니 보내달라고 사장에게 조르듯 말했다. 대답을 듣지 못하고 넘어갔는데, 다음날인가 부장에게 불려가 혼이 났다. 그걸 사장님에게 말하냐고.(회사에서 모든 건 직속상사를 통해야 한다는 걸 그때 나는 정말 모르는 바였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는 사장실로 불려 올라갔다. 널따랗고 오직 그를 위해 편안하게 꾸민 그만의 공간에, 크고 멋들어진 책상을 사이로 그와 마주 앉으니 딱 ‘고양이 앞의 생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가 내게 호통을 쳤다. 무슨 내용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순간에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다만 호통소리가 크고 무서웠다. 나는 기가 완전히 눌려서, 마구 눈물이 솟아났다. 많이 혼나봤고, 혼난다고 우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인지하기도 전에 뭔가에 압도되어 울기는 처음이었다. 깜짝 놀라서, 일단 이 흐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잠깐 물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시도가 우스울 정도로 떨면서 말했고, 실제로 그는 웃었다. 그리고 더 우습게도, 효과가 없었다. 물을 마시고 와서도 계속 눈물이 줄줄 나왔다.


각자의 컴퓨터만 보며 일하는 사무실로 내려왔지만, 그들은 내가 사장에게 불려갔단 사실을 당연히 알았다. 엉엉 울었던 것을 속일 수 없는 얼굴로 내 자리로 돌아와서, 실로 오랜만에 수치심에 휩싸여 어쩔 줄 몰랐었다.


그리고 사장이 미안했는지 어쨌는지, 나를 포함해 딱 3명에게만 4주 동안 일주일 두 시간씩 (출판인학교가 아니라) ‘인디자인학교’에 보내주었다. 내가 배우고 싶던 것과 영 달랐고, ‘이런 개념이 있구나’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어쨌든 해가 아직 떠 있을 때 바깥세상으로 나온다는 것만으로 들떴었다.




지하철 합정역 1번 출구에서 파주로 가는 셔틀버스를 탔다. 일이 끝나면 파주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합정역 6번 출구인가에서 내렸다. 30~40분 동안 대부분이 잔다. 나는 차에서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자(그때만 해도), 무진장 멀미를 하는 사람이었다. 첫날, 퇴근하는 셔틀버스에서 내려 정말로 토할 뻔했다. 그랬던 내가, 퇴사할 무렵에는 흔들리는 대형버스에 앉아, 유유히 그날치 신문을 완독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보다 더 이른 시간에 일어나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피곤함과 졸음을 겨우 물리치며 따스한 이불에서 기어나오는 새벽이면, 사회적 신분이 낮아진 서글픈 느낌도 들었다. 출근하는 격주 토요일 새벽엔 더했다. 6시 15분, <손석희의 시선집중>이 나의 알람이었는데, 어느 날 <시선집중>을 듣다가 그냥 위로를 받았다. “손석희 아저씨는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일을 하고 있어! 주 6일을! 금요일엔 전날 밤 <100분 토론>을 했는데도!” 왠지 힘이 났다.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어주신 손석희 님의 불행..)


파주출판단지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곳곳에 오래된 나무와 갈대밭과 늪이 있었고, 건물들은 다양하면서 통일되었다. 무엇보다 한적하고 고요했다. 급식처럼 나오는 점심을 후딱 먹고, 하루도 빠짐없이 산책을 했다. 병원도 없고 약국도 없고 (그때는) 카페도 하나뿐인가 있었고 은행 외엔 어떤 편의시설도 없었지만, 다른 회사 건물들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아름다운가게(였던 것으로 기억) 안의 엄청 많은 헌책을 구경하기도 하고, 다른 회사에서 이벤트가 열리면 참여하기도 하고, 단지 곳곳의 숨은 자연을 탐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N과 친해졌는데, 장난꾸러기 같은 그녀와 어린아이들처럼 놀았다. 점심엔 자전거를 타고 출판단지를 휘젓고 다니거나 ‘텔레토비동산’이라고 이름 붙인 곳에서 도시락을 까먹기도 하고, 어떻게 그런 시간까지 냈었는지 싶지만 가까운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기도 했다. 사수가 떠난 후로 N이 내 옆자리였는데, 쪽지와 간식을 몰래 주고받으며 키득대며 일했다. 대부분이 자는 퇴근 버스 안에서 그녀랑 너무나 시끄럽게 수다를 떨어서 눈총을 받는 날이 많았다. 신입이 두세 명 들어오면서 ‘2년 이하 톱니’들끼리 친하게 지냈다. 졸음이 몰려올 4시 즈음에 화장실 오가며, 탕비실 오가며, 부장님 모르게 슬쩍슬쩍 서로의 자리에 가서 놀고 오곤 했다. 딱 감옥 같은 교실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정말로 꿀잼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 소울메이트인 S도 다른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회사가 아직 출판단지로 완전히 옮겨오지 않아서 일부 사원만 파주에서 일했는데, 그녀가 2개월 파견된 것이다! 출근길, 퇴근길은 물론 점심마다 만났다. 중학교 이후로 학교가 달라지면서 가끔씩 시간을 내어 만났던 우리가, 다시 그때처럼 날마다 만나서 손잡고 걷고 사소한 이야기부터 꿈에 대한 이야기까지 전부 다 털어놓고 듣고 하는 날이 오다니. 한순간 아무리 친했고 좋아해도 각자의 인생길을 가는 거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그 길이 잠깐씩 만나지기도 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감사했었다.




어쨌든 가을이 끝날 무렵, 1년을 한 달 남기고 나는 퇴사했다. 일은 할 만했고 적응도 되었지만, 더 있는다고 얻을 건 무엇일까? 경력? 승진? S와 대차대조표를 만들어가며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입사하면서 가졌던 두려움ㅡ내가 사회부적응자일지도 모른다는, 나름대로 성공적이라 생각했던 인생이 여기서 쭈그러질지도 모른다는ㅡ을 떨쳐낼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이걸 얻었다면 되었다고, 첫 회사를 1년 정도 다닌 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회사 마지막 날, 나는 가방도 놓고 출근했다. (핸드폰에 교통카드와 셔틀버스표를 넣고 다녀서 무사히 회사까지 왔다.) 까맣게 모르다가 뭔가 가방에 있는 걸 찾다가 깨달았다. N이 얼마나 좋으면 소풍 가듯 나왔냐며 놀렸고, 한참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나는 무의식까지 정말 홀가분했었던 것 같다. 그날 퇴근 후, N과 나는 파주 곳곳을 마지막으로 돌며 놀았다. 그리고 한 공터에서 남은 명함을 불태우고, 막차를 타고 돌아왔다.


나보다 몇 달 후 들어왔다가 나보다 먼저 퇴사한 K는 H에서 일했던 기간을 인생에서 파버리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녀는 진짜 고문관이었다. 이 이상한 문화에 맞추질 못해서 혹은 않아서, 온갖 수모를 겪었다.) 나도 H 건물에는 계단에 발도 대고 싶지 않지만, 파주는 언제든 가보고 싶은 가슴 뭉클한 추억의 장소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슬프고 괴롭기보다 깨알같이 알찬 기억이 재미있고, 또 그 기억은 어찌나 생생한지 엊그제 일만 같다. 죽을 것처럼 버텼는데, 신기하게도 가장 살아있었던 때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