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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진의 <파친코>: 판이 바뀌어도

역사가 우리를 망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어서

by 모도 헤도헨

결혼하고 나는 좀 이상해졌다. 신혼여행지에서도 마냥 즐기지 못했다. 내 것이 아닌 시간 같았다. 신혼집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나는 이국 땅에 혹은 다른 시대에 실수로 떨어진 사람처럼 굴었다. 조심스럽게 눈알을 굴리고, 굼뜨게 웃었으며, 멍한 채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몇 주가 지나고 친한 친구들을 만났을 때, 내 상태를 들은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인생에서 이뤄야 하는 두 가지가 일과 사랑인데, 그중 하나를 이루었으니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게 아닐까?" 나는 그 말이 일리 있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 조금씩 나아졌다고 기억한다.


지금은 그 말이 삼분의 일 정도만 맞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맞든 틀리든) 이유를 알게 돼서 편안해졌던 것이다. 마지막 삼분의 일은, 내 생활이 말 그대로 이전보다 편해졌고 그게 내게 너무나도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집은 깨끗하고 쾌적했다. TV 소리도 없었고, 다투거나 힐난하는 소리도 없었다. 뭐든 천천히, 내 속도로, 아니 뭐든 내 마음대로 해도 정말 괜찮았다.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걱정 없이 안정적이게 한 공간에 있다는 것, 아니면 그를 기다리며 혼자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내게 없는 경험이었다. 나는 일상이, 삶이 이럴 수 있다는 것에 진짜로 놀랐던 것 같다.


유치한 비유를 들자면, 직원식당에서 내가 먹던 밥이, 저쪽 분리된 임원식당의 것과 수준과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됐을 때의 느낌 같은 것이었다. 다를 줄이야 알았지만, 직접 임원이 되어 먹고 있자니 오만 가지 감정이 교차했달까. 어떤 사람들은 그동안 내내 이렇게 먹고 지냈구나, 그동안 나/우리는 정말 불우했구나.


그때 나는 잠깐 회심의 미소를 지었는데, 무기 하나를 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두렵지 않아, 다시 저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살아보았으니까, 익숙하니까 견딜 수 있어. 적어도 나는 생활 수준이 낮아질까 무서워서 그릇된 판단이나 선택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것 역시 삼분의 일쯤만 맞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젠 '새로운' 상태가 익숙해져서 과연 다시 돌아가도 내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졌다. 오히려 알기 때문에 더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리고 나머지는 '불우했던 시절'의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깨달음이었다. 분명 그때엔 그때의 열망과 꿈, 즐거움과 행복이 있었다. 물질적/정서적으로 더 나은 생활을 한다 해도, 나름의 고민과 결핍, 괴로움과 불행이 있다. 이건 그야말로 당연했고, 단지 불평불만 많은 인간들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다.


매슬로우의 인간 욕구 5단계를 배울 때 이미 접수한 내용이지만, 내게 점점 물음표가 되었던 것은 상위의 욕구(자기존중이나 자아실현)를 갈망하며 사는 삶이 더 나은가 하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실제로 '몸이 편하다'는 점이 없다 해도, 인간이라면 생리적 욕구나 안전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애쓰는 삶보다 정신적 욕구나 자아충족 욕구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그게 더 좋은 것, 그러니까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하거나 계급이 낮거나 난민인 경우 그런 좋은 삶의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고, 그런 세상은 불공평한 거라고.


일개 생활인인 내게도 어떤 신념이 있다면,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 모든 재화를 모두가 똑같이 누려야 한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모두가 생리적 욕구를 채우느라 애정, 소속감, 자기존중, 자아실현 등의 욕구를 알지도 못한 채, 혹은 그것을 갈망하거나 그것을 위해 노력할 기회도 없이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의미 있는 삶은, 진짜 행복은 거기에 있으니까.


그런데 살아갈수록 헷갈린다. 과연 그럴까? 상위의 욕구가 더 가치 있고, 더 큰 행복을 줄까?




*이 글에는 소설 <파친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시국에 아무것도 읽히지 않아서, 꽤 오래전부터 책장에 꽂혀 있던 <파친코>를 꺼내 들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다. 정말로,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고 있었고, 망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고 생생했다. 읽는 동안은 뉴스에서 떨어지고 현실을 잊을 수 있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소설로서 충분하다. 동시에 (친구와 '줌으로 책 읽기'로)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는데, 이야기 진행 속도와 서술의 차이가 느껴져서 흥미롭기도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한 챕터에서 (이야기의 세계에서) 한 시간도 나아가지 않을 때, <파친코>는 몇 년이 휙휙 지나갔다. 그렇다고 김동식의 소설처럼 서사를 따라가느라 등장인물의 내면에 대해 소홀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읽는 내내 훈이가 되었다가, 양진이 되었다가, 선자가 되었다가, 이삭이 되었다가, 요셉, 경희, 노아, 모자수, 솔로몬, 하루키, 하나가 되었다. 그들을 관찰하는 상대, 그들이 관찰하는 상대가 되기도 했다. 맞아, 이런 생각들을 하지, 소리 없는 대화와 맞장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과 기나긴 세월 동안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소설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팔짱을 끼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작가가 실제 겪었던 일도 아닌데(사례연구와 인터뷰, 자료 조사를 엄청 많이 했다고는 하지만) 어쩜 이렇게 가상의 세계를 실제처럼 만들 수 있나 새삼 신기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노아가 자살한 점, 양진이 죽기 직전 선자에게 신세 한탄을 했다는 점, 선자가 다 늙어서까지도 한수 앞에서 여자의 심정을 가지는 점 등은 그럼에도 아쉽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야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것에 가깝다.)


어쨌거나 나는 '너무 재밌다, 웬일, 이 소설 진짜 뭐야.(참고로 나는 애플TV에서 <파친코> 시즌1을 진작에 봤다)' 하면서 읽다가, 후반부에서는 사실,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읽었다. 책장을 덮고 나서 며칠을 이에 대해 생각했다.


(나중에 또 삼분의 일만 맞았다고 깨달을 것 같지만) 잠정적으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아마 주인공들의 삶이 수월해져서 덜 재미있어진 것 같다고.


주인공들은 여전히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받고, 상처 입는 일이 생긴다. 정말 많은 노력을 했고 재능도 넘치지만 원하던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하고 솔로몬 역시 아버지 모자수처럼 파친코 사업을 하기로 한다. 선자 역시 죽어버린 아들 노아 때문에 부자가 된 생활을 그다지 누리지 못한다. 조국은 독립이 되었지만, 남한이냐 북한이냐 선택해야 하는 상황도 불편하다. 이런 일들이 비참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고민과 결핍, 괴로움과 불행이 있다. 역시나.

그럼에도 일제 강점기 시대에 가진 것 없는 낮은 신분의 조선인으로서, 장애인 가족으로서 엉덩이 한번 방바닥에 붙이지 못하고 열심히 살면서도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이나,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 말 그대로 돼지처럼 취급받으며 살던, 아무런 형평성이나 합리적인 대우를 기대하지 못하고 끔찍하게 살던, 대놓고 욕과 죽으라는 말을 듣고 살던 시절에 비하면 확실히 '살 만해졌다'. 먹고살 걱정은커녕, 생일에 리무진 몇 대에 친구들을 태워 통째로 빌린 디스코텍에서 탑스타들을 불러 파티를 열 만큼 부자가 됐고, 이런저런 연줄로 꽤 잘나가는 일본인도 못하는 어떤 일을 해내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독자로서 재미가 덜해진 것과는 별개로, 그들의 삶이 더 즐겁거나 행복하다고, 혹은 가치 있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분명 훈과 양진-선자와 이삭, 경희와 요셉-노아와 모자수-솔로몬으로 갈수록, 생리적-안전-소속과 애정-자기존중-자아실현 순으로 그들의 갈망과 노력의 내용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없던 측은지심이나 수오지심이 마구마구 솟을 만큼 주인공들의 삶이 힘들었을 때, 그때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진가가 드러났다. 그들의 한마디 말, 작은 선택과 결정도 중요했고 의미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선자나 경희가 모든 게 넉넉하고 선진국의 대열에 든 지금의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이기적인 삶을 살았을까? 이삭이 요즘의 목사였다면 전광훈 같은 자가 됐을 수도 있을까? 노아는 분명 훨씬 더 높은, 그리고 본인이 원하는 사회적 지위에 있게 될 테지만, 그렇다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자신보다 낮은 지위의 사람들을 짓밟는 적폐가 되었을까? 솔로몬이 훈이처럼 가난한 집에 장애인으로 태어났다면 못돼먹고 게으르게 굴면서 남탓 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까 '역사가 그들을 망쳐 놓았든 아니든, 그들은 상관없이' 살았을 것이다. 열심히, 정직하게, 다른 사람들을 도우면서.



이삭은 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큰 시련을 겪는지에 대해서 선자가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을 해주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견뎌낼 때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이삭이 말했다. 왜 자신은 무사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까? 많은 사람들이 고국에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왜 자신은 이 부엌에서 엄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걸까? 이삭은 하나님에게는 계획이 있으시다고 말하곤 했다. 선자는 그럴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래도 사라진 두 자매를 생각하면 그러한 믿음이 조금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ㅡ<파친코 2권> 13-14쪽



왜 각자가 절대적으로는 다른(불공평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계획이나 선한 이치에 대한 믿음이 있다 해도 위안이 되지 않는 일이 널렸지만, 어쨌거나 인간은 각자가 선 곳에서 자신의 삶을 산다. 몸이 더 편하든 말든, 시련이나 고통을 얼마나 겪든, 내가 선 판이 어떻든지 간에. 그리고 한 인간이 아무리 메타인지가 뛰어나다 한들,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살지 않은 삶에 대해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 비교하여 계산할 수도 없고 피하거나 근본적으로 바꿀 수도 없다.


나는 확실히 나의 유년 시절의 불우한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만약 요술램프의 지니가 내 앞에 있어서 소원을 빈다면 그때의 삶을 바꿔달라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미 지나온 마당에...'라는 생각도 분명 있고...) 그 시절을 지나왔기 때문에 내가 된 것들이 지금으로선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넉넉한 환경에 존경스러운 부모 밑에 살았다 한들 내가 행복하기만 하진 않았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체로 매슬로우의 피라미드 아래쪽의 것이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충족되지 못했어도 상위의 욕구도 분명히 존재했다) 나의 갈망과 꿈, 노력과 성취는 진짜배기였다.


아. 그렇다면, 지금 이 시국의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놓든 말든 상관없는 걸까? 그러니 내버려둬도 될까? 이 부조리한 상황을 바로잡는다 해도 유토피아가 올 리 없으니까? 그 상황에선 또 그 상황의 부조리와 불만스러운 것들이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이 사회를 향한 고민과 열정, 애씀과 분투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어진다. 어찌 됐든, 언제나 불완전할 텐데.


하지만 <파친코> 주인공들의 태도는, 그런 게 아니었다. 완성형, 이야기의 끝, 완전한 결말을 바라고 자꾸 기웃거리면 고한수 같은 선택을 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합리화한들, 자기 한 몸을 위해서 다른 존재는, 함께 사는 사회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삶을 살 뿐이다.


이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자처럼, 그럼에도 그의 믿음에 의지하여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기운을 내는 선자처럼, 지금과 비교도 안 되게 어렵고 힘든, 답이 없어 보이는 시대를 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더듬듯 길을 헤아려 본다. 내가 선 곳이 어디든, 내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며 그 순간 최선이라고 여겨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며 살 뿐이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주인공은 확실히 빛나고, 이야기는 분명히 더 풍성하고 재미있어진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그게 시련을 겪는 중인 사람들에게 위안이나 힘이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 읽는 내내 놀랐던 두 가지.


1. 이렇게 야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니! 책이 생기자마자 당시 12세였던 첫째에게 읽으라고 추천했는데(애플TV 드라마로 봐서 내용도 알거니와, 이 소설의 위대함은 익히 들었으니...), 헉, 이걸 다 보았단 말인가... 아무렇지 않은 듯 첫째에게 말했다. "야, 이 책에 정사가 꽤 많이 나온다?" 첫째의 답은, "응, 이야기니까 뭐, 그냥 읽었어."


이때 옆에 있던 이제 12세 된 둘째가 물었다. "정사가 뭔데?" 나는 내 신념에 걸맞게 역시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해주었다. "남녀의 성적인 행위. 아, 꼭 남녀에 국한되는 건 아니고." 무심하게 듣던 둘째는 그날로 <파친코>를 집어 들어 사흘 만에 완독. 야한 게 이렇게 힘이 셉니다, 여러분.


2. 이 이야기는... 기독교 소설인데? (드라마로 볼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파친코>는 분명 역사 소설이고, 내가 독자로서 어떤 기독교적 메시지를 알아챘다고 기독교 소설이라는 틀에 가두고 그렇게 주장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거의 <나니아 연대기>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기독교적 세계관과 하나님, 믿음에 대한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목사 혹은 신앙심 깊은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삶의 결정으로 체현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눈살이 찌푸려지거나 몰입에 방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니아 연대기>를 판타지 동화로만 읽어도 전혀 무리가 없고 재미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의 배경과 상황에서 충분히 녹아든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에겐 보이고 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의 치우치지 않고 세밀한 믿음에 대한 메타포가 정말 좋았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받은 감동의 큰 부분은 여기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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