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나 아이나 상관없는 것 아닌가?
일주일 혹은 열흘마다 양말과 발수건을 세탁한다. 건조까지 마치면 아이들을 부른다. 얘들아, 양말 개는 날이다!
엉덩이는 무겁고 읽던 책은 너무 재미지며 괜히 피곤하고 졸린 세 아이들은, 서너 번쯤 이름을 힘차게 불러야 거실에 모인다. 음악 틀어줄까?
거실에 아이들의 신청곡이 울려 퍼진다. 캐치 티니핑부터 차트 순위권 노래, 알 수 없는 버추얼 유튜버의 커버곡까지. 집이 떠나가라 떼창 시간. (가사를 모르는 3호는 정체불명의 립싱크...)
흥이 오르면 갑자기 춤을 춘다. 아이돌 흉내를 내기도 하고 막춤을 추기도 하고 태권도까지 나온다.
늘 그렇게 흥만 오르는 건 아니고, 열이 오르고 독이 오르는 날도 있다. 양말 짝을 찾는 일과 개는 일로 나눠 하려다 불공평하다고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던지기 딱 좋은 모양과 크기가 된 양말을 가지고 제대로 양말 던지기 싸움을 하는 날도 있다. 그러다 진짜로 싸움이 나고 울고 불고 하는 날도 있다.
짝이 엉뚱하게 맞춰진 양말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개다'(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겹치거나 접어서 단정하게 포개다)라는 사전적 정의가 무색한 꼴이 된 양말들이 수두룩하다.
그래도 나는 다 괜찮다. 일하다 시끄러운 것, 싸움 나는 것, 난장판이 되는 것, 결과물이 탐탁지 않은 것. 뭐 어떤가?
오히려 이런 일들이 눈앞에 있기 전, 내가 했던 고민이 안 괜찮았다.
결혼 전에 읽었던 어떤 책에(현경의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어릴 때 엄마가 집에 친척 등 손님이 오면 무조건 자신을 밖으로 내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를 도울 수 없도록. 엄마를 돕는 딸, 자연스레 집안일을 익히고 그것을 자신의 일로 삼는 여자가 되지 않도록. 확실히 그것은 사랑과 배려의 행위였고 나는 감명을 받았었다.
딱히 그 부분에 충격을 받거나 억울할 만큼 내가 정반대의 경험을 하고 산 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나의 이상은 그런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다. 너희들이 여자이기 때문에 집안일을 잘할 필요는 없어. 너희들이 진작부터 집안일에 능숙해지도록 가르치지 않겠어. 집안일은 여자의 일이 아니니까.
집안일, 즉 ‘살림’은 살아가는 자 모두의 일이고, 부부든 가족이든 룸메이트든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나누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은 꽤 오래된 나의 지론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사귀었던 (기본적으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며 합리적이고 배려 깊은) 남편과는 결혼 후 자연스럽게 가사 분담이 되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하나씩 더해진 건데... 아이들은 사람이 아닌가? 부모의 보살핌과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은 맞지만, 그 정도가 100에서 0으로 가는 중 아닌가? 나의 목표 혹은 임무는 이들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자립시키는 것이 아닌가?
살림은 살아가는 자 모두의 일. 여자고 남자고, 아들이고 딸이고 상관없는 것처럼, 어른이나 아이나 상관없는 것 아닌가?
어린 여자아이에게조차 너무도 당연하게 부과된 일을 거두어주는 것이 사랑이었던 시대도 있었겠지만, 내가 그 감명 깊은 이야기에서 받을 교훈은, 얻을 진수는 적어도, 딸들이 다 클 때까지 '너희들이 할 일이나 잘해. 너희들이 할 일은 공부야. 노는 거야. 쑥쑥 잘 크는 거야'라고 말하며 그들 스스로 할 수 있는 온갖 살림을 대신해주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런 논리적인 흐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사실은 너무 힘들었다, 내가 다 하기가.
할 만했으면 별생각 없이 그 이상을 따랐을지도 모른다. 역시 변화는 한계에 부닥쳐야 일어나나 보다. 그 한계가 좀 이르다 싶게 찾아와서, 지금으로선 다행이라고 여긴다.
아이들에게 '양말 개는 일'을 아예 일임한 지 어언 3년. 스스로 자기 일을 하는 것 말고 가족을 위해, 셋이 다함께 하는 일 1호인데, 슬슬 하나씩, 시나브로 늘려나가고 있다.
신혼 때 봤던 다큐에서, 아내가 유일하게 집에서 정서적으로(뇌파) 안정될 때가 '남편이 집안일 하는 모습을 볼 때'라고 했던 걸 기억한다. 거의 20여 년 전, 아내와 남편의 집안일에 할애하는 시간을 조사하니 10대 1 뭐 그렇게 나왔다는 배경 설명 후의 실험결과였다.
그것과 비슷한 맥락인지, 아예 다른 차원의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이들이 세상 제일 어렵고 중요한 일을 하는 듯 동네방네 시끄럽게 하고, 그러다 싸우고, 양말은 엉망으로 개면서 한참 동안 거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는 중에도, 아이들이 양말 개는 시간이 되면 흐뭇하다. 안정이 된다. 몸도 맘도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