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건 좋아할 수 있다!
쌍차 분향소에서 다섯 걸음만 가면 에어컨을 시원하게 가동한 커피 전문점이 최소한 세 군데 이상 있었다. 무지개 동지들은 쌍차 동지들과 함께 더위와 소음 속에 앉아 있으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지개 동지들이 아주 유별난 무슨 활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다.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 연대의 표현인지 나는 그때 깨달았다. /57쪽
대학 때 사이코드라마학회 활동을 하면서 나는 인간의 욕망이 '사랑'과 '인정'으로 귀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스무 살 무렵의 내겐 놀라운 발견이었고, 이후로 그 나이만큼의 삶을 더 살 동안 그 렌즈는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데 꽤 잘 맞고 유용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건 젊을 때의 깨달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내 눈엔 인간의 '외로움'이 보인다. 사랑받고 싶은 것도, 인정받고 싶은 것도, 사사로운 욕망이든 고결한 이상이든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그런 트랙 위에서든 거기서 튕겨져 나와서든 이상해지는 것도, 그러다 망가지는 것도, 취미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단체든 자신을 헌신하는 것도, 다 외로워서 그런 것 같다. (아니, 그냥 내가 너무 외로운 건가?)
이 책은 제목에 착실하게도, 저자 정보라가 어떤 데모에 나갔고, 거기서 무슨 일을 했으며, 어떤 사람들을 보았고, 어떤 일을 겪었으며, 무엇을 느꼈는지, 그런 이야기가 보따리처럼 가득하다. 내겐 겉으로는 짐작했지만 속사정은 모르는, 달처럼 이쪽 면은 익숙하지만 저쪽 면은 낯설기만 한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데모'는 나에게 '정리'나 '봉사'와 같은 것으로서, 좋은 것에서 나아가 옳은 경지로 수긍하지만 내겐 아무래도 어려워 내심 모르는 척 살고 싶은 영역이다. 그런데 이 주제가 다른 제목도 아니고 <아무튼, 데모>로 나왔으니 집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가 데모라니... 염탐이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아무튼, 정리> 역시 그런 마음으로 읽음. 읽긴 함...).
그런데 자꾸만 울컥했고 마음이 저렸다. 책을 읽다 우는 것이 별난 일은 아니지만 조금 당황스러웠다. 드라마를 보고 울게 된 중년의 남자처럼, '내가 이런 내용에 울 사람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자가 (그리고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 존재해주어 감사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 생각도 여전하지만, 어쩌면 내 안에도 그들과 이어질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을 해봤다.
그러니까 그들이 멋지고 훌륭해 보인 것은, 단지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선을 위해 헌신해서,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연대해주어서, 세상에 필요하지만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해서, 질 게 빤한 싸움에서 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만약 그렇기만 했다면, 나는 금방 혹은 언젠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대부분 그러했듯이) 실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들도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라, 약점과 결점이 있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는, 그들이 '자신의 외로움을 다른 외로운,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 곁에 있어주고 함께 목소리를 내주는 걸로 채우는 사람들'로 보였다. 헐, 이렇게 지혜롭고 아름다울 수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은커녕 내 옆에 있는 사람이나 스스로가 외로운지도 모르고, 그것을 부정하기도 하면서 쉽게 혹은 엉뚱한 방식으로 열심히 자신의 빈 곳을 메우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다 자신도 타인도 갉아먹고 나아가 사회에까지 해를 끼치며 사는 사람들이.
나 역시, 나의 결핍과 갈망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애쓰며 살았던가. 아니,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나. 내가 잘나고 잘되고 잘하면, 사람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좋아해주겠지, 주목해주고 추앙해주겠지, 정을 나눠주고 기억해주겠지 하면서. 나든 남이든 세상이든, 마음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의기소침해지고 실망하고 원통해하면서.
그런데 내가 나아가는, 다가서는 방법이 있었다. 세상엔 언제나 가혹하게 외로운 사람들이 있고, 또 슬프지만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아무리 세상이 나아져도 있을 것이고, 그들 옆엔 놀랍지만 당연하게도 정보라 작가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과 그들이 받는 온갖 냉대와 방해와 혐오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이 '외로움'에서만큼은 멋지게 극복하는 중인 사람들로 보였고, 그래서 그 옆에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좋아하는 단체, 추구하는 목표라 해도 '군중'과 '구호'를 심하게 거북해하는 나로서는 기막힌 변화였다. (정말, 나는 이다지도 외로웠던가?)
'외로움'에 대해, '연대'에 대해, 이런 것들이 이제야 내 마음에 닿은 '변화'에 대해, 짧은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쉬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책을 덮을 때쯤엔, 역시 20대에 읽고 도무지 의아해서 각인된 문장이 떠올랐다.
"완전한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에 의존하고 있단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읽는이가 오지 않으면 이 세계는 사라져 버릴 것이야."
"왜 꼭 불완전한 세계에서 와야 해요?"
"완전한 세계는 그 완전함으로 인해 아름답지만 완전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다. 그에 비해 불완전한 세계는 아직 미완성이기 때문에 늘 변화하며 많은 가능성이 있는 곳이지. 그래, 그래서란다. 완전한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끝이 닫혀진 존재들이야. 책을 읽어도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 하지만 불완전한 세계의 사람들은 열려 있지, 그 끝은 가늠할 수 없어, 그래서 책을 읽어 가면서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고 책은 비워지는 거야. 완전한 세계는 불완전한 세계를 통해 변화를 겪고 숨을 쉬고 있는 것이란다."
김혜진, <아로와 완전한 세계> 103-104쪽
왜 완전하다는 신이 이토록 불완전한, 아니 엉망진창인 세계를 만들었지? 나는 그게 늘 화가 나고 답답하고 슬펐다. 그런데 불완전하기 때문에, 뭔가 움직이고 변화한다. 나 같은 사람도 마음 아파하고 바꿔보려고 하고 내어줄 용기를 내본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진짜 기적이고, 성스러운 일이 아닌가... 아마도, 말이다.
+) 군중과 구호에도 불구하고, 또 제로에 수렴하는 공감능력과 봉사정신에도 불구하고, 데모의 문을 열어보겠다고 결정적으로 다짐한 것은 이 부분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향해 동지들과 함께 가는 방법은 사실 굉장히 다양할 것이다. 나는 데모하러 나가서 동지들을 실제로 보면서 실제로 땅을 딛고 같이 행진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자 그대로 걸을 때마다 조금 더 좋은 세상에 가까이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지치고 힘들어도,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해 함께 나아갈 것이다. /169-170쪽
그래, 군중 속에 끼어서 구호를 외치는 것 말고도 '유토피아를 향해 동지들과 함께 가는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땅을 딛고 같이 행진한다고? 나도 그건 좋아할 수 있다! 또 있겠지, 뭐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