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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베짱이, 그리고 그릿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드는 삶에 대하여

by 모도 헤도헨

대학원 한 학기를 지내는 동안,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정말 토끼 같구나, 베짱이로구나.


나는 빨리 배우고, 힘차게 나아간다. 그리고 좀 널브러져 있어야 한다. 아니, 좀 많이. 만회가 안 될 정도로.

또 나는 현재만 사는 것처럼, 내게만 현재가 천년만년 주어진 것처럼, 흐르는 시간을 있는 대로 흘려보내며 행복해하고, 흐르는 시간을 쥐고 무언가 충분하다고 느껴질 때까지 몰입한다. 그러고는 아뿔싸, 내게도 마찬가지로 겨울 같은 시절은 오고야 말고, 헐레벌떡 여기저기 손을 비비며 자기반성의 서러운 눈물을 흘린다.


그런 나에 대해, 영 모르는 바는 아니었고 이제 와 안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럼에도 뭐랄까, 사실 어찌어찌 만회가 되기도 했고, 겨울은 언제나 지나가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그냥저냥, 힘차게 뛰기도 했다가 널브러지기도 했다가, 만회한다고 막판 스퍼트를 했다가 그게 통하면 희열을 느끼고 안 되면 통탄하기도 했다가,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딩가딩가 놀며 여유를 부렸다가 현실에 부닥치면 그제야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가, 그게 통하면 안도했다가 안 되면 쓴 후회를 했다가,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흔 중반에 인생의 시동을 다시 건다고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쏟아붓다가 이러한 나를 마주하니, 어느 순간 또렷해지는 것이 있었다.





과제의 최종 마감 시간을 앞둔 때였다. 이 수업은, 이 과제는 내게 중요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던 연구주제를 나 스스로 잡아서, 나 혼자 헤쳐가고 있었다. 석사 첫 학기생으로 욕심이었고 무리였으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다 보면 적당히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물보다, 거칠고 빈틈이 보여도, 나를 갈아넣으며 씨름하더라도 아깝지 않은 연구를 하고 싶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고, 진행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이제 남은 것은 마무리, 최종 결과물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거북이를 제치고 1등을 하는 그런 류의 과업은 아니지만,) 결승선을 잘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뭔가 힘이 빠졌다. 이러저러한 상황에 김이 샜고, 잠깐 퍼질러져서 눈 좀 붙이고 싶었다. 생각나는 건 그것뿐이었다. 정말 널브러져서 쉬고 싶었다. 그럼 다시 힘이 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코앞에 있는 마감이라는 결승선을 보고 있자니,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뻔한 일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저기까지 달려나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했던 일들이 소용없게 된다는 것이, 용두사미 꼴일 뿐이라는 것이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사실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느라, 이미 널브러져 있는 중이었다. 나는 왜 힘 조절을 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때때로 여유가 있었을 때 충전한다고 양껏 쉴 수밖에 없었던가. 나는 왜 거북이처럼, 개미처럼 꾸준하게 열심을 내지 못했던가. 그랬다면 이 순간 이렇게 부담스럽지 않았을 텐데. 이쯤이면 얼추 완성이 되었을 텐데. 그러니까 이미 찬바람의 낌새를 맡고 반성의 눈물이 막 새어나오려는 중이었다.


가뿐하게 시작하고 꽤나 멋지게 해나갔으나, 끝내 뭔가 이루어내지 못했던 인생의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아... 인생은, 인생에서 진짜 뭔가 이루어낸다는 것은, 구슬의 뛰어남도 구슬의 개수도 아니고 뭐든 보배로 꿰어내는 힘, 꾸준한 노력, 근성에 있구나. 그게 필요한 것이었어. (이런 생각을 진정으로 하느라 또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는 게 함정...)


누군가에게는 뻔한, 아니 그렇다는 걸 인식하지 않고도 그렇게 했을 무언가를 깨닫고 나는 살짝 몸이 떨렸다. 이거였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였어. 결국 뭔가 이룬다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였어. 마침내 뭔가 해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바로 이거였던 거야.


그러니까 이제, 깨닫지 않아도 현실은 명료한데 깨닫기까지 한 마당이니, 나는 얼마 안 남은 결승선까지 열심히 나아가야 했다.


그런데도 퍼뜩 일어나는 대신 미적거리다, 유튜브에서 마침, 그때 우연처럼, 테드의 '그릿' 강의를 들었다.


https://youtu.be/H14bBuluwB8?si=izhvt5AtjRxDKL8m


'그릿'이란 말은 진작 들었고, 대충 ‘투지’, '근성' 정도로 번역된다는 것, 그게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지만, 흔한 '심리학을 기반으로 한 자기계발'이겠거니 했다. "안 사요~" 그런 태세로 제대로 들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았더니 오만 가지가 다 재미있어 보이고, 책상 한쪽에 처박힌 쪽지조차 전율할 만한 발견 같은 판국이라 그런지 몰라도,) 성공한 사람들이 가진 것이 그릿, 그러니까 '장기목표를 향한 열정과 끈기'란 연구결과를 듣자니 절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열정은 있는데 끈기가 부족하구나. (사실 열정도 있고 끈기도 있는 줄 알았으나, 내가 생각한 ‘끝’까지이다. 그걸 넘어가면 끈기가 사라지기 시작.) 인생은 장거리이니, 꾸준하게 열정을 내지 않으면 결국 '뭔가 될 뻔했던' 구슬들만 손에 쥐겠구나.





한 학기를 마쳤다. 과제를 냈다.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힘을 냈다. 거북이 뒤에서 땅을 치고 후회하는 토끼가 되지 않으려고, 개미 앞에서 초라해진 베짱이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니까... 또 힘차게 힘을 내고 심히 애를 썼다. 그러는 바람에, 결승선을 지나고 겨울이 지난 지금... 나는 또 널브러진다. 어쨌든 결승선을 통과한 게 뿌듯하고, 봄은 또 포근하고 아름다운 것이... 뒹굴뒹굴 놀기 딱 좋은 것이다.


인생까지 갈 것도 없이, 대학원조차 4학기. 이제 겨우 한 학기 지난 것인데... 나는 어떻게 꾸준하게 열심을 내며 그 시간들을 나아갈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사람이 거북이처럼 개미처럼 성실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내 남편, 그의 하루하루를 빠삭하게 아는 내 남편이 그러한 사람이라서, 그런 사람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느냐고 호소하지도 못하겠다.)


구슬만 가지고는 안 되나? 보배를 꼭 만들어야 하나? 이런 반전의 물음들이 멋지게 보이던 때도 있었다. 아니, 지금도 간간이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늘 그런 생각이 들진 않는다. 어느 순간엔, 어느 영역에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만큼은 뼈에 사무치게 보배를 만들고 싶어진다. 내려놓는 것은 이루고 나서도 늦지 않은데 반대는 아니다. 나는 내 구슬들을 가지고 보배를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욕망이든 허영이든 본능이든, 외면하지 않기로 했단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거북이가 되어야 하는가? 개미처럼 살아야 하는가? 과제를 앞두고 사뭇 진지하게 이런 생각들을 한 것이 벌써 보름이 넘어간다. 그땐 심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우문이다.


거북이가 되고 싶어도, 개미처럼 살고 싶어도 그게 될까 말까, 어려울 텐데... 나는 내가 토끼이고 베짱이인 것이 좋다. 나는 뛴다 하면 힘차게 뛸 수밖에 없는 사람이고, 아직 오지 않은,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 말고 나의 현재를 충분히 누리는 게 너무 행복하다.


그러니... 조금만 닮아 보기로 한다.


오늘, 크리스마스이브 손님맞이 집 정리를 하겠다고 별렀는데... 글을 쓴다. 내일, 그리고 모레... 닥쳐서 열심히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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