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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씨"라고 말을 못 해

역시나 호칭의 강을 못 넘었다.

by 모도 헤도헨
씨(氏)

의존명사 / (성년이 된 사람의 성이나 성명, 이름 아래에 쓰여) 그 사람을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거나 이르는 말. 공식적ㆍ사무적인 자리나 다수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가 아닌 한 윗사람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로, 대체로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쓴다.



며칠 전 "9시 출근, 5시 퇴근… 데이트는 언제 해?" 충격받은 美 20대 '눈물 펑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고, 세대와 문화를 가로질러, 시공간을 초월한 공감이 피어올랐다.


2006년 겨울, 첫 직장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 퇴근하다가 사람 반 먼지 반인 환승길 어디엔가 앉아 나도 딱 저런 마음으로 눈물을 줄줄 흘렸었다.



그것은 그 자체의 끔찍함보다, 점점 커지던 자유와 통제감을 최대치까지 맛보았다가 순식간에 둥치만 남게 된 처지, 그리고 남은 삶이 쭉 이럴 거라는 (나는 평생 '일하면서' 살 거니까) 상황 판단, 어떤 퍼즐을 착실히 맞추다가 큰 그림이 호러라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의 경악이었다.


시간은 흘러흘러, 내 인생에 다시 '직장인'의 삶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역시 얄궂다. 삶이란. 그래서인가, 10년도 훨씬 더 전의 일들이 추억처럼 떠오른다.





왜 그렇게 삭막하고 건조하고 불친절한 곳이었나 모르겠다. 웃고 싶고 말하고 싶고 즐겁고 싶은데. 그곳이 일하기 위해 모인 곳이란 걸, 15년 전이란 걸 참작해도 그럴 필요까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상사'가 아니라 '동료'라고 생각되던 네댓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두세 명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출근길 버스를 타는 줄에서 M을 발견했다. 나는 학교 급식 줄에서 반이 달라진 친구를 만났을 때처럼 반가웠다. 환하게 웃으며 "OO씨!"라고 불렀다. 그는 살짝 애매하게 웃으며 눈인사를 하고는 별말 없이 차에 올랐다.


그날 점심시간,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가려던 나는 복도에서 J와 마주쳤다. 할 말이 있는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ㅡ모도씨, 아침에 OO 선배에게 'OO씨'라고 했다면서요.

(?) 네.

ㅡ선배는 선배라고 불러야죠. 몰랐어요?

ㅡ??!!


몰랐다. 모두 나를 '모도씨'라고 불렀고, 다른 사람이 M을 'OO씨'라고 부르는 걸 들었고. 성인이 성인을 '씨'라고 불렀을 뿐인데. 그게 혼날 일이라니. 아니, 왜?


그때도 국어사전을 찾았던 것 같다. 애매하다. '씨'가 높이거나 대접하여 부르는 말인데, 윗사람에겐 쓰면 안 되는 말이라..


나보다 한 살 많던 J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확신에 찬 어조로 나를 가르칠 수 있었을까?

네 살 많던 M은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나의 직속 선배를 통해 나를 가르치려 했을까?


주책이 서린 웃음소리 때문에 좋아했던 M 선배와는 더 가까워지지 못했다. 꼬박꼬박 선배를 붙여 부른 J와도 친구가 되지 못했다. 내게 '씨'를 붙여 부르라고 했던, 나보다 먼저 입사한 N과는 친구가 되었다. 나는 이후에 입사한 다른 동료에게 나를 '모도씨'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호칭이야 부르고 불리는 사람 사이에서 편하면 그만이지만, 서로의 양해와 약속이라는 과정이 없으면, 그러니까 보통 직장 같은 곳에서는 그곳 문화에 따르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문화가 완전히 같지는 않고, 하나부터 열까지 친절하게 가르쳐주지도 않으니 문제다.


나와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포털에 '직장, 호칭, 씨'라고 검색하면 비슷한 사례가 이어진다. '씨'라고 불렀다가 꾸중 들은 사람, '씨'라고 불려서 기분 나쁜 사람, 뭐라고 불러야 하냐고 묻는 사람. 이런 상황들 때문에 자기 회사에서는 '님'을 붙이거나 별칭을 쓰는데 그것도 이상하다는 사람.


이런 기사도 찾았다. "상사한테 '○○씨' 불렀다가 한소리…존칭 맞지 않나요?" 제일 잘 정리된 것 같다. 2023년 기사인데 여전한 이슈라니, 세대와 문화를 가로질러, 시공간을 초월하여 공감이 피어오른다.

(한 가지 다르다면, MZ세대 중에는 상사가 자신을 '씨'라고 불러서 기분 나쁘다는 사람도 있다고..)





동네 아줌마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룰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나는 어지간히 눈치도 없고 융통성도 없나 보다.


순식간에 이름과 나이를 트고 'OO언니'ㅡ'OO야'로 호칭이 정리되고 관계가 정립된다. 나는 15년이 넘도록 이 산을 넘지 못했다. 그러니까... 동네 친구가 없다.


그나마 아이가 생기면서, 'OO 엄마'로 불리며 관계 언저리에서 얼쩡대고 있다. 호감의 눈빛을 교환하고, 좀 더 가까워지려는 찰나가 없진 않았는데, 역시나 호칭의 강을 건너지 못했다.


ㅡ그냥 '모도'라고 불러주세요.

ㅡ네...? 영어 이름 부르듯이요?

ㅡ네!

ㅡ@.@;


나는 내 이름이 좋은데.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면 좋겠는데.

이 말을 듣고 그대로 따라준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들도 두어 번 어색하게 내 이름만 불렀다가 곧 'OO 어머니'로 돌아갔다.


문득, 앞으로 이런 기회가 온다면,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고 한 글자만 덧붙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ㅡ'모도씨'라고 해주세요.


아무도 내가 나를 높여주길 바란다고, 자신을 하대한다고 오해하지 않겠지. 부르기는 조심스러우나, 불러달라고 하기엔 속 편한 단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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