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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민 Feb 08. 2016

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 2

2. 친구가 되려는 교사, 빵셔틀이 될지어다.

본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건과 인물, 지명은 작가의 경험에 의해 재구성된 것으로 특정 사건,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2년차, 생존하라.

1년은 2학기 담임으로 어떻게 보냈는데, 2년차가 되면서 바로 고학년을 맡게 되었다.

고학년을 맡게 되자 주변 동료교사들이 조언을 해준다.


"남자선생님이까, 뭐 그렇게 힘들지 않을거야."

"애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말고"

"첫날 절대 웃지마, 애들이 우습게 보니까"


주변에서 해주는 조언들에서 나는 학교가 바라는 남자교사의 속성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 엄숙함, 무거움'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난 그런인간이 아니다. 아니, 될 수 없다. 아직도 컴퓨터 게임하다가 몬스터가 나오면 "죽어! 죽어!"를 외치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보면 어머니가 한심하게 쳐다보며 문을 닫고 나가시는 그런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나는 그들이 말하는 남자교사에 대한 패러다임을 깨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의 "영원한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먹었다'의 '먹'과 '다'사이에 '었'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이 문장이 과거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은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지금, 이 생각을 가진 교사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며 말리고 싶다.


"친구가 되려는 교사, 빵셔틀이 될지어다!"


생태계의 생물은 생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공생, 기생, 경쟁, 의태 등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최적의 효율을 찾는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히 인간에게도 적용되고, 교사에게도 적용된다. 많은 선행연구자들이 교사의 발달단계를 아래와 같이 구분하여 설명한다. 이 수많은 이론들 중 초기 단계에서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낱말이 보인다. '생존'이다.




생각보다 많은 5년차 미만의 교사들이 교실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학생들의 '친구'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이것이 당신, 그리고 내가 교실에서 실패하는 많은 이유중의 하나가 된다.


학생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친구'가 아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방금 엄청난 수업 하나를 공개했고, 무사히 잘마쳤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동학년 교사들과 함께 오늘 저녁 식사도 하고 간단히 맥주도 한잔하면서 소회를 나눌 것이다. 아! 오늘은 마음에 드는 그 선생님과도 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테지! 퇴근 준비를 마치고 교실을 나가려는 찰나, 전화가 온다. 받아야 될까? 아, 싫은데. 후다닥 뛰어가 전화를 받는다. 앗, 교장선생님!


"오늘 수업하느라 고생했어. 오늘 동학년 회식한다며? 내가 한잔 사지."

"네?????????????"


이번엔 시점을 바꿔보자. 나는 교장이다. 오늘 신규교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공개 수업을 마쳤다. 평소 조언도 열심히 해주고 그 교사와도 사이가 좋다. 내가 이야기할 때마다 방긋 웃으며 즐겁게 경청해주는 교사다. 나는 격이 없이 지내는 것이 좋다. 오늘 동학년 회식을 한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오호, 이거 오늘 내가 교장이라는 직함을 버리고 오랜만에 교사로 돌아가서 술도사고 즐겁게 친구처럼 지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겠군. 전화를 걸자.


누구의 편에서 감정이입이 되는가?


당신과 학생들의 차이는 당신과 교장과의 사이만큼 멀다. 오히려 더 멀다. 왜냐고? 적어도 교장선생님과 우리는 같은 20세기 사람들이지만, 학생들은 21세기 사람이아닌가?


학생들에게 '친구'라는 존재는 과연 명칭만큼 '평등'한 존재일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학생 3명이 있다. 모두 친구지만 이들은 모두 '평등'한 관계가 아닌 경우가 많다. 발언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학생, 항상 따라가는 학생, 불만은 품은 학생 등 이름은 친구지만 힘의 역학관계가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관계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서로를 공감하고 이어주는 또래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친구처럼 지내고 싶다고 했지만, 나에게 심한 장난을 치거나 숙제를 안하는 등의 잘못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화내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보다 내가 아는 1980년대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갔다.


"선생님은 친구라고 했는데 왜 우리한테 화내세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내가 필요할 때만 친구로서, 내가 불리할 때는 교사로서 바뀌는 등 입장이 불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반성이 들자, 더욱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교사로서의 단호한 태도를 죄악시 하게 된 것이다.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그들을 이해하고 즐겁게 해주고 배려하였고 그들도 나의 행동을 이해하고 내가 하는 대로 똑같이 나를 대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교실은 엉망이 되어 갔다.학급의 분쟁을 조정하지 못했고, 학생의 잘못된 습관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점을 학생들이 눈치채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나의 교사로서 권리를 포기했음에도) 그들은 나를 '친구같은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는 이제 단언할 수 있다. 학생들은 당신이 '친구'가 되기를 기대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당신이 그 자리에 있는 한 말이다.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라는 명대사를 남긴 드라마 로망스




지금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어른'이다.

당신이 '문상', '세젤예'와 같은 낱말을 안다고 해서, 혹은 '대박', '쩔어'와 같은 낱말을 외친다고 해도 우리는 그들의 친구가 될 수 없다. 당신이 왜 그들의 친구가 되려는지 그 마음은 잘 안다. 민주적인 학급분위기, 언제든 나에게 이야기할 수 있고, 멋진 교사로 인정받고 생존하고 싶은 마음말이다. 그리고 기성세대 교사와는 뭔가 다른 교사가 되고 싶다는 마음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을 돌아보자. 학생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경우라면 하루 중 가장 빈번하게 만나는 성인은 오로지 '교사'일 확률이 매우 높다. 어린이는 자신의 사회적기술과 도덕성을 배우기 위해 모방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것은 또래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예전에는 이 부분을 부모님과의 관계를 통해 배웠지만 최근에 이르러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학생들이 '어른에게서 받을 수 있는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교사일 수 밖에 없다. 지금 우리 교실에는 진짜 어른인 '교사'가 필요하다.


교사는 학생에게 가장 완성된 모습으로서의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어떤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까?

그러나 우리는 예수나 부처가 될 수 없다.

이것은 학생들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두가지의 원칙을 확실하게 세우기로 했다. 이후로 학생들 앞에서 공언한다.


첫번째, 학생들의 문화를 끊임없이 이해하려는 '어른'이 되겠다.

두번째, 내가 말한 것과 함께 하자고 한 것을 지키는 '일관성 있는 어른'이 되겠다.



당신이 학생이라면,

'우리 문화를 이해하는 일관성 있는 어른'과 

'우리 문화를 모르는 다중인격 친구'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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