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231
1
무릎이 지독하게 아팠다. 그것뿐이었다. 이것이 간단하게 내 삶의 일부를 바꾸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약간 힘든 일을 하고 나면 어딘가는 조금씩 아프고 쑤시기 마련이다. 요즘 며칠 그냥 열심히 일했을 뿐이고, 그래서 무릎이 좀 아팠던 것뿐이다. 그냥 목욕탕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물파스나 바르면 되는 것이다 정말 그것뿐이었다.
중천에 보란 듯이 떠있는 태양 그리고 따가운 햇살, 나는 저놈이 참 싫다. 뭐 대단한 놈이라고 자기얼굴 한번 보여주는 데 저렇게 힘들게 하는 것인지. 만가지 표정을 지으며 해를 바라보려다 실패한 내 시선이 높다란 빌딩을 훑고 지나간다.
'000 정형외과'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정형외과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지금 돈도 없었거니와 병원 가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료보험카드 따위도 없었던 것이다.
집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계실 어머니를 부른다. 내가 며칠 전부터 아프다, 아프다 하신 것을 들으셔서 그런 신지 안 그래도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하시며 부랴부랴 나오신다.
"네가 키가 자라려나 보다!"
웃으시며 말하시지만 난 벌써 나이가 스물 다섯이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2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욱신거리는 다리가 마치 시계 초침처럼 똑딱거린다. 어머니는 병원 앞에 멀뚱히 서있는 나를 보시고는 먼저 스윽 들어가신다. 아무 생각 없이 접수를 하고 멍하니 병동 내에 있는 TV를 보았다. 재미가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 TV를 보며 넋이 나간 표정을 짓는다. 확실히 TV는 무서운 녀석이다.
간호사 선생님 -그들은 이렇게 부르면 화색이 달라진다- 이 나를 부르고 의사를 대면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그 의사가 맘에 든다고 하셨다. 젊고 아주 미남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머리에 젤을 잔득 발라넘긴 머리라니 왠지 나에게 사기를 칠 것만 같았다. 어쨌든 의사는 나를 눕히고 내 다리를 잡고 장난감 만지듯 이리꺽고 저리꺽었다.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빠졌다. 중학교 생물 시간 개구리 해부 실험 때 쓰였던 개구리가 생각났다 메스로 찢고 집게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이번에는 내 무릎위로 강렬한 햇살이 쏟아진다. 내 무릎이 어떤 무대에 선 것이다. 춤을 추고 있다. 난 저 구석진 의자 깊숙이 몸을 뉘여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햇살을 쏟아내는 녀석이나 그걸 받는 녀석 모두 그 얼굴을 보게 하기까지 굉장히 거만한 것이다. 그런 태양 흉내를 내는 외과용 전등이 가증스럽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 의사가 진찰을 하며 내게 성의를 보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내 또래의 동생이 있을지도, 아님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을지도.
난 다시 진료 실을 나가 x선 촬영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지루하게 그 TV를 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성공, 사랑 뻔하듯 뻔히 알지만 웃고 즐기고 봐야되는 그런 드라마 말이다. 사랑해, 미워해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3
정형외과는 내가 가봤던 다른 병원과는 달리 향긋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석고 깁스 냄새, 짙은 소독약 냄새와 머큐롬 냄새만 풍긴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사고 친 사람과 사고 당한 사람의 실랑이가 정말 익숙하지 않지만 왠지 꼭 있어야 할 그런 풍경처럼 -병원한구석에 걸린 풍경화처럼 말이다- 느껴졌다. 정겨움, 경멸감, 그리고 어쩌고저쩌고.
말이 길어진다. 나는 혹시 내 다리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내 주위 사람들이 할 가식적인 걱정들까지. 얼마나 많은 가식적인 말들을 듣고 나 또한 얼마나 가식적으로 받아 주어야 할까?
"아픈데 괜찮으세요?"
"완쾌되시길 바라겠습니다"
난 동정 받기 싫은데 사람들은 그런 말들이 나를 위로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그런 동정이라도 받지 않으면 섭섭한 내 뭐 같은 성격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진심에서 우러나는 동정이 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정말 아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단지 내가 재미난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없고 독자와 청자 앞에서 모든 걸 벗어야 하지만 그게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 게 진짜 이야기꾼이라는 것이다. 나도 그냥 그런 것뿐이다.
여기까지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좋겠다. 너무 지루할 것이다. 여기까지 누군가 읽었다면 뻔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는 하찮은 3류 이야기꾼이 될 테니까. 나도 더 이상은 지루해졌다. 정말 더 아래는 지루할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쯤에서 그만 읽었으면 좋겠다. 그냥 쓰레기 같은 글이라고 매도해 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슬프게도 난 계속 써야만 했던 것이다. -나의 기록에 대한 정신적 집착이 아마도 작금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기 때문이리라.-
4
x선 촬영을 끝내고 -촬영이라니 영화배우가 되어 멋진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내 뼈 사진을 찍는 것이라니 참 기분 나쁜 일이다.- 여전히 의사는 멋진 머리를 하고 내 다리 사진을 전등에 비춰 보며 꽂아 놓고 한숨 한번 쉬지 않고 생글거리며 말한다.
"많이 진행된 거 같은데,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요?"
"아니요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귀를 쫑긋 세우신다.
"00증후군으로 보입니다만"
난 그런 병은 처음 들어본다.
"우리 아들이 그런 거 걸릴 애가 아닌데.."
"후천적이라기 보다는 선천성입니다. 유전성 희귀병이죠"
난 정말 그런 것이 누가 걸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완치가 되는 건가요? 제 아들은 곧.."
"좀 더 정밀검사를 해봐야 되겠지만.."
난 의사가 마지막을 우물거리는지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의식적으로 볼륨을 줄인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은 터져 버린 함성처럼 가슴에 꽂혔다.
"...... 유감입니다"
의사는 지금의 통증을 감소시키기 위한 처방전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나와 어머니는 병원을 나왔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아까 처방전을 받는 어머니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분명히 보았다. 아니다! 내 눈빛이 흔들린 것이다. 우리 어머니는 정말로 강인한 분이시니까. 약국에서 약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다시금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하다가 문득 감동적인 스토리를 떠올렸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졌다.
5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눈물 쏟는 감동적인 스토리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주인공이 어릴 적에 사업에 실패하신 후 돈벌면 오겠다는 편지 한 장에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고,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과 딸을 먹여 살리기에 갖은 고생을 마다 않았다. 그런데 이 아들이라는 놈이 학창시절 삐뚤게 나가더니 한참 방황하다가 나중에는 뒤늦게 공부를 열심히 해서 00대 법학과에 수석으로 턱하니 붙고 잘산다는 이야기 말이다. 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마지막의 잘 산다는 이야기는 내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내 나이 25세, 이제 막 00대의 신입생이 되었다. 물론 나는 그 감동적인 스토리의 반쪽 주인공답게 수석을 했다. 어차피 붙어도 돈이 없다면 못 다닐 대학, 수석으로 붙어야 했으므로 난 더욱 독하게 공부했고 수석이라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슬퍼져야 하는 걸까, 사실 숨긴 것이 있다.
"제 소견으로 이 병은 진전속도가 빠르면 1년 천천히 진행된다하더라도 3년입니다. 다리 근육과 연골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아까 줄여버린 볼륨 속의 이 말들을 사실 나는 더욱더 귀기울여 들었던 것이다. 걷지 못한다. 그러한 생각들이 내게 덮쳐왔다. 그러나 두려움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지금 내 옆에 나보다 더 한없이 슬픈 사람이 있지 않은가.
"엄마, 엄마 내가 어렸을 때 하도 잘 넘어진다고, 무릎에 상처가 많다고, 수수떡, 팥떡 먹였잖 아. 매일매일.. 그러면 잘 안 넘어 진다고.. 이젠 안 넘어지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치료받으면 괜찮아진다고 했으니까.. 괜히 마음 상하지 말고.."
의사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그 돌팔이는 분명 유감이라고 했다. 나는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엄마야말로 왜 그래! 내가 왜 마음을 상해, 이 딴 병 있는 지 모르고 살 때도 할거 다했어! 그 냥 평소처럼 살 거야"
이러고는 집까지 달려가 방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한참 뒤에 현관문이 열리고 말없이 안방 문이 닫힌다. 왠지 어머니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다 우리 어머니는 강인한 분이시다. 난 크게 외쳤다.
"엄마! 엄마 때문에도 어디 있는지 모르는 아빠 때문에도 아니야, 그냥 내 병이라고 유전병이라 니! 허! 참!"
6
난 정말 안방까지 들리도록 외치고 있었던 것이었다. 솔직히 누구를 원망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머리에 젤을 잔뜩 바른 돌팔이 정형외과 의사였다. 부모님이 계신데 유전이니 선천이니 하다니 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 재수 없는 놈 한 대 쥐어박았다고 나를 계단에 6시간 내내 무릎꿇게 한 학년 주임. 아마 내 다리에 심한 압박을 주었으리라! 그리고 뭐든 다 태울 거 같이 쏘아대던 태양, 왜 내 잘못된 유전인자는 고치지 못하는 것이냐, 항상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은 늘 그런 짓만 한다니까.
이런 생각만으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다. 해는 이미 졌지만 내 방의 인공 태양은 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난 어둠 속에 버려진 아프리카 난민이었다.
"지금 통증이 심할 테니 통증제거 치료부터 받으세요. 그리고 이후에는 본인하기에 달렸습 니 다. 정밀 진단을 받아야 하니 내일 다시 여기로 오시고, 앞으로 무리하시면 안됩니다. 근 육과 연골이 파괴되는 속도는 쓰기에 달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들은 이야기도 내 귀가 볼륨을 낮추는 바람에 들을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가장 크게 들렸을 부분일지도.
"걷는 것이 외에 심하게 뛴다던 지 운동 등은 피하세요. 이제부터는 휴식을 취하시고.."
걷는 것이 외에는 하지 말라니.
7
다음날부터 나는 좀 달라졌다. 나는 늘 일찍 일어나 했던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조깅복도 어젯밤 피곤했는지 제멋대로 널브러져 일어나지 않았고, 밤새 몇 권의 영어 책들이 휴지통으로 사라졌다.
"휴식을 취해야 하니까.."
나는 몇 시간을 잤는지 몰랐다. 퉁퉁 부은 눈두덩이 만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머니는 역시 평상시처럼 일을 나가셔서 그런지 집안은 조용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물건 나르는 일이었는데 그 일을 계속 한다면 아마 난 한달 안에 앉은뱅이가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난 대충 씻고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약간은 흐린 듯한 하늘이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하늘도 맘놓고 볼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니 난 너무 의기소침해 하고 있었다. 나중에 영문도 모른 체 쓰러져버리는 것보다 지금이라도 내 병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길거리 한가운데 놓여진 농구코트와 그곳을 가득 메운 내 또래의 녀석들 보자 아까의 희망은 손등에 바른 알코올처럼 차갑게 날아가 버렸다. 햇살 없는 흐린 하늘아래, 다른 사람들은 잘도 걸어다닌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를 내려갔다. 무릎이 어제보다 심하게 삐그덕 거리는 것이 통증도 더 심하였다. 약을 먹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어제 조깅복과 함께 약봉지도 같이 어딘가 구겨져 잠들어 있겠지.
반쯤 내려가다 기분이 울컥하여 다시 올라갈까 하였다.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는 가운데, 나는 계단 중턱에서 두 다리가 절단된 한 남자가 바구니 하나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과 맞닥뜨렸다. 지저분한 몰골. 나에게 동정을 구하는 눈빛. 갑자기 내 모습이 왠지 그 사람과 다를 것 없이 느낀 것일까?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며 다리의 통증도 모르고 계단을 후닥닥 내려가 버렸다.
'내가 저런 병신이 된다고? 믿을 수 없어! 그것도 몇 년 안에 저렇게 된단 말이지! 이름도 외기 힘든 이상한 병때문에!'
8
나는 습관적으로 늘 친구들과 만나던 카페로 다리를 빠르게 옮겼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여어, 00법대생 행차시다!"
창가 구석진 자리는 우리의 단골좌석이었다. 지금 나와있는 녀석들은 두 명. 여기서 그들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즐겨하고 따위의 소개는 하지 않겠다. 지금 이건 내 이야기이고 이 녀석들이 누군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마음씨는 여전하군"
"이제 금방 검사, 판사가 되시겠어"
공공장소에서의 배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녀석들.
"아참! 내가 지하도를 내려오는 데 말이지 아 대낮부터 재수 없게.. 올림픽에 월드컵까지 한 나 라에서 왜 그런 병신들이 대낮에 돌아 댕기냔 말이지"
"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언제 돌아 댕겼냐. 그냥 바구니만 들고 있더만 킥킥"
"넌 오면서 못 봤냐?"
여기서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방금 전의 사실을 말한다면 난 웃음거리가 될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난 그 장애인을 보고 당황했던 것일까.
"야! 병신이 뭐야, 장애인이라는 좋은 말 있잖아"
"허, 이놈 봐라. 이거 다 너한테 배운 거야! 너 그런 사람들이 자기 몸 그렇게 된 거 가지고 남들한테 동정이나 받고 산다고 나 같음 그렇게 안 산다고, 그래서 병신들이라고 했잖아"
내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있단 말인가.
"세상이 변하면 마인드도 바뀌어야 되는 거야. 생각을 좀 바꿔라 오픈 마인드로.. 알았냐?"
"어쿠, 대학 들어가더니 이제 선생노릇까지 하시려고 하네, 집어쳐라"
그래도 그 녀석들이라도 만나면 개념 없이 웃기고 즐거울 거란 나의 생각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왠지 마음속에 큰짐을 얻어 온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난 아까 그 지하도를 지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뱅 돌아서라도 가고 싶었지만 자꾸 그곳으로만 가야 할 것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장애인은 어디로 간 것인지 자리에 없었다. 아까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고 난 다시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9
집에 돌아와서 난 인터넷으로 미친 듯이 내 병에 관련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름도 외기 힘든 병명이 자꾸 헷갈렸고 결국 모든 걸 알려줄 것 같던 인터넷도 도저히 못 찾겠다고 내일 병원이나 가보라고 충고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일은 정밀 검진이 예약되어있는 날이었다. 그날 밤 나는 널브러진 조깅복을 다시금 걸고 슬며시 쓰레기통에서 영어 책도 꺼내 보았다.
"이런 일이 아무한테나 일어나나, 암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그럴 리 없지. 난 아마 죽지도 늙지도 않을 거야. 왜냐면 난 지금 이렇게 건강하고 튼튼하니까"
정말 나는 전혀 아픈 게 없었다. 난 건강했다. 그날 밤 나는 서툰 손놀림으로 TV에서 본대로 성호라는 것을 그었다.
"예수님인지.. 하나님인지 누구한테 기도해야 가장 효과가 좋을지 몰라요. 그냥 내일 돌팔이 의 사가 저에게 사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그럼 앞으로 진짜 열심히 믿어 드릴게요. 제 건달 친구들도 같이 데려갈게요! 아멘"
난 그날 푹 잠들었다. 그런데 속인 것이 있다. 난 두 시간 전에 진통제를 두 봉지나 먹었다.
10
사실 나는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는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돌팔이 -아니 이제는 그렇게 부르면 안될 것이다.- 그 의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두어 시간에 걸친 정밀 검진을 하면서 이상한 기계 속에 몇 번을 들어갔다 나오고, 여러 명의 의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 다리는 재판정에서 형량을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결국 어머니는 병원에서 나가는 길에 내게 어깨에 기대며 오시고 말았다.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빠른 속도로 내 다리 근육과 연골을 파괴하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원래부터 내 몸 속에 있었고, 그것이 이제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 내가 이 희귀한 병을 이해한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난 어머니를 집에 모셔두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애써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게 하시도록 혼자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지금은 걷고 있지만 수개월 뒤, 아니 어쩌면 내일은 걷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난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할 것이다. 그럼 매일 휠체어 바퀴를 굴려야 할 것이고, 우리 어머니는 내가 무얼 먹을 때마다 손을 씻길 것이다. 이제 어머니께 무언가 해드릴 나이가 되었는데 다시 불효를 저질러야 하는 것이다.
11
나는 집 근처 골목길 담벼락에 주저앉아 어둠을 짊어지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지하도의 장애인이 떠올랐다. 벼랑 끝이 어딘지 알면서도 달려갈 수밖에 없는 내 자신이 너무 무력해 보였다. 이대로 그냥 죽어버릴까. 갑자기 담벼락 옆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노숙자로 오해받을지도 몰라 나는 얼른 일어섰다. 대문을 열고 두 사람이 나왔다.
"잘 다녀와야 한다"
"눼.. 에엑.."
왜 이리 요즘 장애인만 눈에 띄는 것이냐. 하늘도 나를 조롱하는가 싶다. 이럴 줄 알았으면 기도도 하지 않을 것을. 내 앞에서 느린 속도로 마치 춤을 추듯 비틀거리며 장애자가 걸어가고 있다. 난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간다.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그의 그림자를 보았다. 하지만 그림자는 그의 모습과 달리 곧고 흔들림이 없다. 신호등에 와서야 난 그의 옆에 설 수 있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이 부을 때까지 울어버렸다. 물론 나의 바뀌어버린 미래에 대한 절망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더욱 나를 울게 한 것은 아까 보았던 그 장애인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기 때문이다.
'몸도 뒤틀려서 말도 못하는 게, 왜 나보다 밝은 모습인 거지? 왜 행복한 척하는 거지?'
난 분명 그 장애인에게 조롱을 받은 것이다. 너도 똑같이 당해보라는 것인가. 난 그렇게 아침 동이 틀 때까지 멍하니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12
3개월쯤 뒤 나는 입원을 결심했고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왕성한 세포의 공격을 막아내지는 못하였다. 내 다리는 야윌 대로 야위어 이제는 휠체어에도 혼자서는 앉는데 매우 어렵게 되어버렸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두 달 전의 나와는 많이 달라져 버렸다. 나는 그래서 지금 그 이야기를 해주려고 한다.
며칠간 그렇게 방안에 틀어박힌 후 나는 내 병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동안 돌아섰던 많은 것들과 화해하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내 자멸된 내 자신과 화해해야 했다. 그것이 마음처럼 쉽지 않을 때마다 나는 지하도에서 보았던 장애인과 골목길에서 마주친 장애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하도의 장애인보다는 나은 상황을, 골목길에서의 장애인을 통해서는 그런 장애 속에서도 밝은 미소를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더욱 힘이 나게 했던 것은 00대학교에서 나의 학교생활의 편의를 위해 힘쓰겠다는 연락이 온 것이다.
그 다음 내가 돌팔이라고 했던 의사와 화해해야 했다. 그는 아무 죄가 없었다. 나를 백혈병이라고 한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그리고 날 벌 세웠던 학년 주임. 나를 계도할 목적이었고 그 덕분에 6시간 동안 나는 하나님도 부처님도 알라신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설사 내가 이제 정말로 다시는 못 걷게 다닌들 어떻겠는가? 내 휠체어를 밀어주고 내 어깨를 감싸줄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행복할 것 같다.
"여자 친구 없니?"
이미 어머니는 나도 모르는 새에 나보다 먼저 이 현실을 받아들이시고 아들을 위해 모든 걸 감수할 준비하신 듯했다.
"세상 모든 여자가 내 친구고 애인인걸 뭘. 하하하"
"그래도, 이럴 때 병 문안이라도 오면.."
13
정말 인간이란 하루는 절망이란 알을 품었다가 다음날에는 희망이란 병아리가 깨어나길 바라는 족속인가 보다. 나는 그렇게 절망처럼 여겨지던 병원에서 다시 유쾌한 독설을 내뿜으며 살고 있고, 간호사 선생님과도 농을 주고받으며 인기인으로 매김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제 악당이 된 듯도 하다. 사람들의 걱정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 미래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재판정에 판결을 내리기 위해 들어오는 휠체어 탄 판사도 이제 필요하지 않은가? 어쩌면 나의 놀라운 성공기로 나는 인터뷰와 싸인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여기까지 와보니 내가 영 틀려먹은 이야기꾼은 아닌 것 같다. 내 이야기를 남 이야기처럼 술술 잘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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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는 수술대에 누워있다. 의사는 세포의 공격으로 인해 생기는 합병증의 유발을 막기 위해서 암적인 세포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물론 그 세포들만 제거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안다. 이제 내 키는 10살 때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녹색마스크를 쓴 의사를 보고 갑자기 멘델의 녹색 완두콩들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그 이야기를 해주려 한다. 멘델이 재배한 그 많은 완두콩 대부분은 둥글고 녹색이다. 그런데 가끔 황색인데다가 주름까지 진 완두콩들도 있다. 요놈들은 그렇게 많이 있는 건 아니지만 분명 같은 뿌리에서 같은 양분으로 자라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돌연변이, 혹은 잘못된 종으로 오해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도 엄연히 '완두콩'이며 이들은 녹색의 둥근 콩들에게 아무런 나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나는 지금 황색의 주름진 완두콩이 되어 가는 것이다. 마취제 탓에 흐릿해져 가는 동안 수술대 위의 라이트가 눈부시게 빛난다. 아! 난 깜빡하고 있었다. 난 아직 태양, 그리고 그 햇살과 화해를 하지 않고 있었다. 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 동안 그 햇살을 만날 일이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내게는 지금 야릇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황색의 주름진 완두콩이 된 뒤 당장에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개월간의 나의 온전치 못한 행적을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대가는 바라지 않을 것이다.
대신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 이제는 몽땅해질 내 다리에, 무릎 위에, 따뜻한 햇살을 비춰주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