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만만하냐? 내가 만만하지?'라는 말을 뱉었다면, 그 누군가와 손절까지 각오했다는 속마음을 드러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세상 살면서 그 누구도 어떤 상황도 만만하지 않다. 사람은 각자의 생각이 있기에 그 생각을 알 수 없는 나에게 모든 상대는 만만하지 않고, 상황도 늘 새롭게 변수가 나타나고 그 상황 속에서 변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늘 낯설기에 아무것도 만만하지 않다.
만만하다는 것은 자신감을 넘어 자만과 오만까지 이르는 마음 상태다. 특히 상대를 만만하게 본다는 것은 편하게 지내는 것을 넘어 상대가 자신의 요구를 언제나 들어줄 수 있다고 당연히 여기면서 때로는 권력과 보복으로 상대를 응징하면서 자기 뜻대로 다루고 밀어붙이는 태도를 말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은 당연히 없고 오히려 무시와 통제와 지배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호구다. 원할 때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인간. 영어로 하면 밀리면 밀리는 대로 넘어진다는 pushover 다. 넘어지기만 하면 괜찮은데 앞으로 나가기 위해 발로 밟고 가는 인간들, 그 인간들에게 '만만하냐?'라고 따지면 이미 늦은 거다. 관계는 회복되기 힘들고 그들의 발자국이 찍힌 몸을 보며 올라오는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관계를 끊어내는 수밖에 없다. 어쩌다 만만한 인간이 되어 버렸는지 이불킥 해봤자, 그 관계의 밸런스는 회복되기 힘들다. 반대로 상대를 호구 잡아 억누르기 전에는 말이다. 억눌린 만큼 되돌려 주고 억누르고 싶은 게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이지만,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가고 싶지 않아 자존감만큼은 지키려 애쓴다. '선하다', '자비롭다'를 주술처럼 중얼거리며 정신줄 잡고 정신 승리했다고 외치며 상대에게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대분분은 이렇게 선하기에 우리 사회가 그래도 유지된다고 나는 믿는다.
살면서 딱 한번 '내가 만만하냐?'를 외친 적이 있다. 끝없는 문제 해결 요구, 멈출 줄 모르는 하소연, 기승전남탓, 과거 속 사건의 편집증적인 해석, 문제 해결 없는 피해자 코스프레 등등등 이러한 것들로 만나기만 하면 나를 호구 삼았던 사람이 있다. 자주 만나지 않았지만, 한번 만나고 나면 근 1주일은 그 사람의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로 시달렸다. 그 역할을 도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나의 상황과 해결할 문제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된 사람. 어른이 되고 반백살 먹고 되돌아보니 상대는 매우 전형적인 나르시시트였고 나는 그에게 에코이스트였다. 늘 불쌍함과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결국 그 감정들이 자신의 현재의 불만족인 상황을 합리화하는 구실이었고 나에게 손 벌리기 위한 도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편으로 다행이고 한편으로 억울하지만, 상황을 인식하고 파악해서 다행 쪽에 마음이 더 많아 정말 다행이다.
아마 그 상대는 또 다른 에코이스트를 찾아 똑같은 패턴으로 자신의 못남을 합리화하면서 찬양받기 위해 온갖 동물적인 계산기를 두들기겠지. 그러다 어느 순간 상대가 만만해지는 순간 받아먹은 손가락 하나에 만족하지 못하고 팔 전체를 뜯어먹으려는 짐승 같은 본능이 나오겠지. 강약약강인 상대는 자신 보다 더 강한 누군가를 만나 호되게 당해야 정신을 차릴까? 하지만 이런 예상 시나리오나 소설, 정말 쓰잘데 없다. 그를 내 삶의 등장인물로 투입시키지 않을 것이기에 내 삶의 등장인물에서 그를 삭제해 버렸다. 마음의 문을 닫는다. '쾅!' 나 INFJ는 그를 향해 '도어 슬램' 했다. 묵은 체증이 훅 내려간다.
먹은 음식이 내려가지 않아 종일 속이 거북했는데, 2km 정도 지나자, 민망할 정도의 소음이 배속에서 밀려 나왔다. 가슴과 배가 뻥 뚫린다. 길게 호흡을 내 쉰다. 도어 슬램한 걸 모르는 그 사람이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나에게 단절은 제법 어려운 일이라 종일 마음이 불편했는지 소화까지 안 돼서 달리기 하기로 옷까지 갈아입고 손바닥으로 배를 살살 문지르고 있다가 걷기라도 하자 생각하고 나왔다. 걷다 보니 속도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뛰고 있었다.
사실 오늘은 아주 만만하고 호기롭게 10KM 도전에 나섰는데 전화 한 통으로 속 시끄러웠다. 그래서 음식물이 위와 장에서 병목현상을 일으켰는지, 이 세상 만만한 게 하나도 없다고 투덜거렸었다. 하지만 뛰기 시작하자 소화가 되면서 순간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달리기가 정말 나와 잘 맞는다고 다시 한번 깨달으며 달린다. 그 생각이 오늘 오전에 했던 결심을 다시 이끌어 낸다. 대회까지 아직 한 달 정도 남았는데, 한 번 정도는 10KM 달려 봐야 되기 않을까? 반평생 살면서 만만한 거 하나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달리기 어때? 이 세상에 만만한 게 하나 있다면 달리기로 삼는 거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