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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Mar 18. 2020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 것들

남자 친구가 생겼으니 좀 괜찮아졌냐고 물으신다면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연한 소리지만 연애를 한다고 해서 우울증이 해결되진 않는다.


참 신기하게도 남자 친구가 생기고 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듣게 된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저 질문이었다. 뜻은 같지만 비슷한 문장들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약속이나 한 듯 흘러나왔는데, 사실 그 질문들을 들었을 때의 나는 조금 당황스럽거나 혹은 불쾌했었다.

하지만 왠지 '내가 우울증을 겪지 못했다면 저런 신중하지 못한 질문은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의 카테고리 안에 드는 말들을 내가 그들의 입장이 된다면 묻지 않을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해보면 높은 확률로 아니라는 답이 나왔기 때문에 차마 그들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들을 탓하긴 커녕 사실 그들의 시선이 무서웠다. 비웃음을 살까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우울증이라는 사람이 연애할 여유가 있나, 저 사람 우울증이 아니지 않을까? 힘든 척만 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질문의 저변에 깔려있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생각의 관성이란 몸의 관성만큼이나 지독해서 아무리 습관을 달리해보려고 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다. 상담치료를 시작한 지 거의 1년이 지났음에도 피해의식들이 가끔 나를 괴롭힐 때면 여전히 자괴감에 빠져버리는 관성의 굴레 위에서 머무니까. 게다가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힘든 시기였으니 저 질문들을 들었을 때 지금보다 더 상처 받았고, 지금보다 더 그들을 원망하다가, 결국 스스로를 원망하고 탓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었다. 가장 공격하기 쉽고 원망하기 편한 사람이 바로 나니까. 그 시절의 난 나에게 가장 지독하고 집요하게 굴었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대체 결혼은 언제 하려고 그러냐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반박하기 위한-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임시방편이기도 했지만 나 역시 약간의 조바심이 난 상태이기도 했다. 소개팅을 정말 싫어하던 내가 평생 소개받았던 약 열 명의 사람들 중에 반 이상이 재작년에 격주로 몇 달간 소개받았던 찰나의 인연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당시의 내가 남자 친구를 만들고 싶어 환장한 사람처럼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말이다. 겨우 나 하나 부지하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주제에, 한 편으로는 연애라는 매개를 통해서 의지할만한 사람을 찾고 싶었나, 그로 인한 안정감이나 사랑받는 느낌을 통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었나 싶은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도 했다. 물론 시기가 시기인 만큼 소개팅이 정말 많이 들어왔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자리가 들어오는 족족 다 받아 만난 것을 보면 그때 약간은 미쳐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스스로를 놓아버리고, 어디 받을 수 있는 만큼 소개받아보자 라는 심정이 었겠지 하고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당시 어떤 마음이었는지 여전히 스스로가 납득되진 않지만 중요한 사실은 결과적으로 투자한 노력 대비 성취가 1도 없었다는 것.

하지만 남들에게 나쁜 시선으로 보이든 말든 뭐 어때.라고 좀 더 나를 위한 멋진 말을 뱉을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의식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에 비하면 1년 만에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칭찬해주고 싶다.


하긴, 나 자신도 돌보고 사랑할 여유가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들어올 마음의 여유가 있었을까 싶다. 여유는 고사하고 스스로가 그렇게 죽도록 싫었던 시기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품어줄 마음이 생길 리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 시기에 소개받았던 사람들의 사소한 점들이 너무 커 보여서 좋은 사람들을 놓쳤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그들 각자 나름대로 좋은 짝들을 만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나와 반대로 그들이 가진 사소한 매력들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듬뿍 예뻐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결국엔 만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전에 스스로를 듬뿍 사랑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슬슬 2018년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 마치 면접과 같은 소개팅을 여러 번 겪다 보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또 다른 자괴감들이 움터 자라났다. 나중엔 내가 들이는 시간과 노력이 아까워지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매주 남자들을 소개받아 주말 약속을 소개팅으로 꽉 채우던 친구들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엄청난 노력이 수반되는 과정이었다.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과 표정으로 꼿꼿이 앉아있기가 힘들고 기가 빨려 집에 가면 녹초가 되어 뻗어버리기 일쑤인데, 어떻게 소개팅을 하루 시간표처럼 줄 새워 턱턱 해내는지 이것도 체력과 정신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못할 짓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이미 거의 두 계절이 지나있었다. 이러다가 소개해준 친구들과 더불어 시간과 금전을 투자한 상대들에게 미안해지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 2018년을 기점으로 마지막 약속을 다녀온 뒤 소개팅은 나랑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고 행복한 솔로가 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했더랬다. 그리고 2019년 3월 말 첫 상담을 받고, 5월의 지독했던 신체화 증상들이 사그라들 무렵 친한 언니에게 지금의 남자 친구를 소개받게 되었다.


망설이는 나에게 그 사람 꽤 괜찮은 사람이라며, 참한 친구 하니 네가 떠오르더라는 예쁜 말에 약간의 자신감이 생겨서 일단 한 번 가볍게 나가볼까 했던 마음이 지금의 남자 친구를 만나게 해 주다니. 그렇게 부지런히 소개받을 때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더니 어디서 뿅 하고 나타났을까. 사람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그리고 참 다행스럽게도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만나 좋은 만남을 이어갔고, 우울감 해소(여전히 진행 중이지만)에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우울증 환자들이 꼭 명심해야 할 점은 절대 그 누구도 나를 그 우울한 감정과 고통에서 대신 꺼내어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옆에 있는 사람으로 인해 ‘경과가 많이 좋아졌어.’ ‘이 사람은 생명의 은인 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당신이 이루어낸  멋진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했으면 좋겠다. 당신 안에 있는 힘으로 당당히 해쳐나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주고 칭찬해주는 일을 먼저 해주길. 그다음이 나를 도와준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일이라는 것을 꼭 마음속에 새겨두기를 바란다.(물론 이 말 또한 상담사 선생님께서 해주신 주옥같은 말이다.)


그분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는 초반 즈음 선생님을 뵙고 만나는 사람이 생겼다고 이야기를 꺼내니 선생님께서는 참 잘되었다 하시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었다. 마치 엄마와 같은 말투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셨는데, 일상적인 엄마와의 대화가 부재되어있던 나로서는 그 대화가 즐겁고 위로가 되었다. 꼭 내놓은 자식 같아서 괜히 걱정이 된다는 상담사 선생님의 말씀도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물론 상담자와 내담자라는 관계는 변함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참 많은 힘이 되어주셨다.




당시 남자 친구와 혹여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난 후 상처를 주거나 혹은 받게 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 초반에 고백했던 몇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이런 고백 조차 자존감이 거의 밑바닥 수준이라는 증거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최선이었다.) 언제 말을 꺼낼지 고민을 하느라 설레는 첫 데이트의 간지러운 분위기를 즐길 새도 없었던 바보 같은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하루 종일 고민한 주제에 당시 마주한 남자 친구의 온화한 표정에 왠지 자신감이 생겨서 현재 상담을 받고 있고, 얼마 전까지 많이 아팠었다 라는 이야기와 또 다른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꺼냈다.

참 신기한 건 약간이라고 당황한 기색을 비추거나,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고민을 하거나, 싫은 내색을 할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과는 달리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 사람이 0.1초 만에 하는 말은,


많이 힘드셨겠네요. 였다.


어쩜 내가 꺼내는 말마다 다 괜찮다고 하는지, 이 사람은 정말 괜찮아서 괜찮다고 하는 건가? 어쩌면 사기꾼일지도 몰라.라는 의심이 들 정도로 당시 그 사람의 대답은 신기할 정도로 포용적이었다.

그리고는, 대학 때 다니던 학교에서 학생들을 위한 상담센터를 운영했었는데 본인도 그때 잠시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며 상담을 받는다는 것은 스스로를 위한 노력 중에 하나가 아니냐고, 그렇게 자신을 폄하하지 말라며 조금씩 좋아질 것이라며 위로해 주었다.


물론 1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남자 친구도 사람인지라 나의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의 모든 것을 포용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나의 치부를 드러내었을 때 변함없이 나의 편에 서서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리라는 신뢰는 여전히 그대로 존재한다. 그때의 그 몇 마디 말들로 말미암아 난 그 사람을 자연스럽게 믿게 되었다.

아주 소중한 경험이자 든든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어쩌면 짧게라도 심리상담 경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 또한 나에게 아주 감사한 일이었다. 혹여 색안경 끼고 나를 바라볼까, 나중에 일어나는 두 사람의 감정적 싸움에 나의 개인사들이 이유가 될까 두려웠었으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신뢰하는 사람이든,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든 간에 어느 누구에게도 결정권을 쥐어줘서는 안 되는 내 고유의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때문에 감정이 바닥을 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대어 스스로의 심리적 중심을 의지한다면 결국 그 사람으로 인해서 힘들어지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두 세배로 힘들어지는 반작용이 생기지 않을까. 마음의 결정권을 수없이 빼앗기던 그 시기의 나를 도와주었던 결정적인 두 사람을 꼽자면 당연한 말이지만 상담사 선생님, 그리고 남자 친구이다. 그 사실은 지금도 거의 변함없이 부동의 1, 2위로 존재한다.

긍정적인 감정들은 듬뿍 취하고 순간을 즐기되 나를 갉아먹는 감정에 주도권을 뺏기지 않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계속적인 훈련과 노력이 필요한 일임을 참 늦게 깨달았다. 머리로 알면서도 마음은 따로 노는 것처럼 스스로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조금씩 스스로 주도권을 잡게끔 바른 해결책을 알려주는 사람이 상담자 선생님이라면 직접 주도권을 잡는 것은 스스로라는 사실 또한 절실히 깨달았다. 물론 옆에서 손을 잡고 기꺼이 존재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없다 해도 스스로 주도권을 잡아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출 수 있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건강한 정체성과 그를 위한 마음의 중심잡기라는 것. 처음에 잘 되지 않더라도 꾸준히 연습할 것.




 남자 친구에게 결정적으로 도움받았던 것은 '정서적 안정감'이었다. 나를 조건 없이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큰 선물이다. 힘든 시기에 사람을 만나면 두 사람 다 힘들어질까 불안해하던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고 괜찮을 거라 다독여주었던 그 말과 행동들도 결국 내가 편안하게 나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한 '안정감'의 거름이 되어준 것이다. 양분이 그득 담긴 흙을 가져와 나를 심어주니 신기하게 또 새순을 틔워 자라나는 과정을 여전히 지나고 있는 중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람에게 마음 깊이 감사한다. 왠지 그 과정의 끝은 예전과는 다를 거라는 기분 좋은 확신이 들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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