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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Nov 08. 2019

신경안정제의 효과는 대단했다

폭풍우 같았던 신체화 증상을 버텨내다 02


CT촬영 결과는 일주일 뒤에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과의 시간이 잘 조율되지 않아 2주 뒤에 병원에 가게 되었다.

CT촬영 결과는 정상이었다. 나의 뇌는 깨끗했고, 반듯이 촬영된 나의 뇌 단면들을 보고 있자니 마지막 확답을 받은 듯 마음속에 약간이나마 남아있던 불안이 없어졌다. 결국 그 괴로웠던 증상들은 모두 신체화 증상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뇌에 아무 이상이 없어도 사람이 그 정도로 아프고 괴로울 수 있구나 라는 걸 몸소 느끼게 되던 그 순간이 잊히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 너무 아프고 괴로운데. 난 여전히 이마가 빠질 것 같고, 멀미를 하듯 가만히 서있거나 누워있는 와중에도 계속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서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신경안정제는 먹고 있나요?


곤란한 표정의 나를 가만히 보던 선생님께서 질문하셨다.

그러고 보니 2주 전 CT촬영을 하러 갔을 때 선생님께 처방받았던 신경안정제와, 구토억제제가 있었다. 물론 먹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신경안정제라는 것이 그렇게 독하고 기분 나쁜 약인 줄 몰랐다. 아니면 내가 약이 잘 받는 체질이었나?

사실 신경안정제를 처음 먹고 일어났던 다음 날 아침부터 거의 저녁이 될 때까지-그러니까 약을 먹고 12시간 정도 지날 때까지-난 기압이 낮아진 듯한 느낌, 중력이 두 배 정도로 세진 느낌으로 하루 종일 가라앉은 기분에 수업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주변 지인들이 하는 말이


신경안정제는 웬만하면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나중에는 약에 의존하다가 끊지 못하게 되니 가능한 스스로 극복해봐라.


였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텐션이 바닥 치는  기분 나쁜 증상이 신경안정제 때문인지 확신할  없었다. 약기운에 못이겨 하루 거른   다시 심해지는 증상에  이겨 이튿날 취침 전에 복용했는데, 다음 날 까지 뇌가 무거워지는 그 기분을    겪고나서야 확신할  있었다. 신체화 증상 대신 얻은 신경안정제 효과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해서 제대로 일상생활을 하기가 힘든 하루를 보내야 했다. 눈은 반쯤 감기고 웃음은 고사하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표정을 지을 수도 목소리를  수도 없었다. 복용   번만에 알아챌 정도로 영향력은 강력했다.

결국 몇 봉지 남은 신경안정제 알약은 무서워서 먹지 못하고, 대강 두통약이나 구토억제제만 먹으며 2주를 버텼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면, 이 약보다 약한 약이 있으면 처방해달라고 말씀드려볼 참이었다. 그런데 2주 뒤 찾아간 신경정신과에서는 안타깝게도 별다른 대안을 얻지는 못했다.



선생님, 약을 먹으면 제가 너무 힘들어서 그러는데.. 혹이 이 약 말고 다른 약한 신경안정제는 없나요?


없습니다. 이 약이 시중에 유통되는 가장 약한 신경안정제라서, 이 약보다 약한 약은 없네요.


 아, 네...


일단 뇌에 이상은 없으니,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스스로 관리하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현재로서는 신경안정제 복용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더 심해지면 우울증 약도 함께 복용해야 할 수도 있어요. 일단 이번엔 저번과 같은 약을 처방해드릴까요?


아니요.. 약은 도저히..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래, 의사 선생님이라고 별 수 있으랴. 마음을 비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경안정제의 영향인지, CT촬영 후 약간 안심한 탓인지 뭔지 힘들었던 신체화 증상도 아주 서서히 빈도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전히 힘든 건 변함이 없었지만, 빈도수나 강도를 봤을 때 아주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거의 2주 정도 지난 후 내가 견뎌낼 수 있을 정도만큼 줄어들더니, 한 달이 지나자 그 증상은 옅어지다 사라졌다. 아주 가끔 이유 없이 사람들을 대면하거나 불안함이 느껴질 때, 혹은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그런 증상이 다시 나타났었지만 반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만큼 심한 멀미 증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진 않는다. 하지만, 다른 신체화 증상은 여전히 남아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겪는 이런 증상들이 곧 죽을 것 같이 심하게 10분 이상 지속되며, 주기적으로 발생하면 공황장애라고 하던데 난 주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 걸 보면 공황장애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증상들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난 여전히 불규칙적으로 드문히 발생하는 여러 가지 증상들을 겪고 있다.


처음 상담소를 찾았던 이유는, 가슴 위를 누군가 두 손으로 압박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숨을 쉬는 것이 체감될 정도로 어려워서였다. 일부러 들숨을 크게 들이쉬지 않으면 곧 숨을 쉬지 못해 질식할 것 같은 가슴 압박감을 아침부터 잠들기 전까지 겪기를 한 달째 되던 날 상담소를 찾았다. 그런 증상이 가끔이 아니라 거의 매일매일 있었기에 도저히 이렇게 견디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 긴 시간들을 참기만 하고 혼자 견딜 수 있을 것이라 크게 착각하고 버티다가 결국 상담소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정말 잘 한 선택이었지만, 상담을 받으며 했던 생각과 상담 선생님의 말씀을 종합해 스스로 내린 결론은 마음이 힘든 사람들은 이미 바닥을 양손으로 짚고 있는 상태며, 그 양손 중에 한 손을 떼어내 상담사의 손을 잡고 일어날 의지가 생겨야 비로소 혼자 두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과정 위에 설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 깊은 이들은 한쪽 팔을 떼어낼 의지조차 오래전에 꺼졌거나, 한쪽 팔을 떼면 버티던 다른 손 마저 무너질까 불안한 이들이거나, 이미 바닥에 넘어져 울고 있는 이들이기에 팔을 내밀어 도움을 주고픈 상담사의 의지만으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가장 최근에 상담사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지금 이렇게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가 생기고, 조금씩 괜찮아지는 건 그 누구도 아니고 내담자님이 이루어내신 결과에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난 거에요. 그 누군가 도와준다고 한들 스스로 안에 불씨가 없으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을 스스로 해낸 거에요. 그러니까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해도 돼요.


살아오면서 참 많은 이들에게 신세를 졌지만, 여전히 참 감사한 사람들이 많다. 특히 요즘엔 상담사 선생님께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여전히 난 나 스스로의 마음과 힘겨루기 중이지만 어쩌면 그 싸움 덕분에 요즘은 잊고 있던 내 예쁘고 멋진 구석들을 돌아보고 북돋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나고 있다.




선생님, 결국 이렇게 한 번 마음이 고장이 나버리면 앞으로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던데... 제가 상담을 받아서 완전히 괜찮아지는 게 아니라 죽기 전까지 계속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라면, 저는 너무 불안할 것 같아요. 괜찮은 상태로 살아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또 우울함과 무기력이 나타나면 어떡하죠? 제가 나아졌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보통은 5년 이상 나아진 효과가 지속이 될 경우에 완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담자님이 불안한 것도 이해는 하지만 분명 건강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제가 겪어봤기 때문에 더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제가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도와드릴 거고, 내담자님 안에는 그런 힘이 있으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같이 노력해봐요.




내가 처음 썼던 일기들을 보면, 그때 내가 저런 생각을 했었나? 싶을 정도로 지금의 내가 하지 않았을 생각들이 곳곳에 스며있었다. 반년 전의 나에 비하면 지금의 난 그때보다 조금 나아진 것이겠지. 그렇게 조금씩 나도 모르게 서서히 괜찮아지고 있는 것이라고 그 기록들이 말해주고 있는 것을 보면 다행스럽게도 난 지금 이 과정들을 잘 지나고 잘 버텨내고 있는 것이라, 그리고 난 다시 건강한 마음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그렇게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는 용기가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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