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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Nov 02. 2019

뱃멀미와 두통의 콜라보레이션

폭풍우 같았던 신체화 증상을 버텨내다 01

꾸준히 무언가를 해나간다는 것은 참 힘들고 고달픈 일이다. 그만큼의 자기만족과 성취감, 희열감을 동반하겠지만 나라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짧은 텀 혹은 가당찮은 매일매일의 루틴을 만들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게으른 성격도 한 몫하거니와 현재 직업의 불규칙적인 생활 덕분이라고 자위하며 살았지만, 이번엔 또 다른 변수로 인해 한 달 이상의 글쓰기 공백이 생겨버렸다. 그래서 그 일들을 정리할 겸 이렇게 몇 달 만의 근황을 기록하고자 한다.




3월 마지막 주 처음 방문했던 상담이 일주일에 한 번 주기적으로 꾸준히 진행되었고, 작은 고비가 있었지만 한 달을 넘기며 스스로 호전됨을 체감할 정도로 상태가 많이 좋아졌었다.

처음 상담소를 내 발로 찾아갔을 때도 사실 여러 가지 신체화 증상이 계기이긴 했지만, 그런 신체화 증상들도 서서히 미묘하게 사그라들었고, 좋지 않을 것이라 단정 지었던 스스로의 상태도 검사지 검사 결과 약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나쁘지 않았으니 난 이제 늪에 빠져 손 발이 묶인 나를 지독하고 집요하게 삼키던 우울함과 무기력한 기분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곧 그러할 것이라고 자만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태가 좋아진다고 방심하면 안 돼요.

파도의 굴곡처럼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할 것이니까 좋아졌다고 안심할 필요도, 나빠졌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어요. 그저 꾸준하게 상담을 받으러 오고 생활패턴을 조절하려 노력해봅시다.


상담 선생님의 그 말씀은 기우가 아니었나. '난 해당사항 없을 거야.' 하고 넘겨버리면 높은 확률로 내가 그 해당사항에 해당되는 일들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뭐 이제 그까짓 거 하고 의연히 받아들여야 할 판이다 싶을 정도로, 5월은 한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갑작스러운 신체화 증상을 겪어내야 했다.

그래, 겪어 내어야 했다. 방심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고통이었지만.



평화롭다 못해 무슨 일이든 이제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에 바빠진 주말 일정이 더해져 2주 정도 상담을 가지 못하게 되었을 무렵 지속적으로 멀미가 나듯 어지러운 증상이 갑작스럽게 시작되었다.

그 어떤 전조증상도 없이 갑자기 시작된 그 증상은 처음에는 단지 그냥 어지러움증이겠지, 현기증이겠지 하고 치부할 정도로 가벼웠다가 점점 심각해졌다. 평소 어지러워도 2-3일 지나면 괜찮아졌던 경험이 있어서 더 가볍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12시간 이상 일을 해야 하는 날이 매주 있었고, 왕복 1시간 이상 운전을 해서 다녀오는 일도 매주 있었던 5월은 특히 바쁜 달이었다. 프리랜서로 사는 삶은 일하지 않은 만큼 굶어야 하니까. 비수기 때를 위해 물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니까.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스스로 합리화하며 이를 악물고 버티기엔 점점 그 강도가 심해졌다.


나중엔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그 어떤 생활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심해져서, 틈 날 때마다 누워있어도 마치 배 위에 선 선원이 된 마냥, 하루 종일 뱃멀미를 하는 듯 한 미슥거림과 어지러움, 이마가 눈 앞으로 당장이라도 빠질 것 같은 두통에 어떻게 그 많은 일들을 쳐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잠들기 직전까지 이유모를 통증으로 인한 고통의 연속이었다.

정말로 큰 병에 걸린 건 아닌가 스스로 겁이 날 정도로 증상이 심해서 하루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1주일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2주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고 치부해버렸던 과거의 내가 원망스러워질 정도가 되고 나서야 대학병원을 예약하고 뇌 CT촬영을 하게 되었다.


거의 한 달을 꼬박 미련하게 참아내고서야 병원을 찾아갔다. 이런 증상은 어느 과를 예약해되는지도 몰랐던 무지했던 과거의 나는 어지러움증과 두통에는 신경정신과를 예약해야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예약을 하고도 1주일을 기다리고 나서야 겨우 교수님을 만나봴 수 있었다.


신경정신과에 얼마 전에 부임한 젊은 남자 의사 선생님이셨는데, 표정이나 억양이 크게 변화가 없는 무미한 인상의 선생님은 나의 직업, 술, 담배 여부와 불면증, 그리고 어떤 정신과적 증상이나 상담 이력들을 물어보시더니 귀에 이상이 있는지 살펴보자며 이상한 기구를 머리에 끼워 내 고개를 이리저리 사정 없이 돌리고 내 눈을 노려보는 것을 반복했다. 곧 귀 쪽의 이상이 아니라는 설명과 으레 그러하다는 듯한 말투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당부도 함께. 그나마 위로가 되었던 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해하던 나에게,


아마 뇌에 이상은 없을 겁니다. 대부분 환자분 나이에 그런 증상들은 스트레스 때문에 나타나는 신체화 증상이거든요. 일단 많이 아프시니 신경안정제와 구토억제제 처방해드릴게요. CT촬영 결과 때 봅시다.


라고 말씀해주시던 의사 선생님의 마지막 처방이었다. 이제 더 이상 듣지도 않는 두통약을 먹어가며 당장의 고통을 괜찮은 척 참아가며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안도감도 당시엔 위로가 되었다.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리고 난 또 한 번 1주일을 기다린 후 예약된 시간에 보호자와 함께 CT촬영을 하러 갔다.


CT촬영을 하기 전 몇 가지 다른 검사들을 하고, CT촬영을 위한 조영제를 주사하였는데 조영제를 몸에 넣는 과정에서 핏줄이 터져 팔목이 부풀어올랐고, 다시 바늘을 꽂아야 했는데 바늘이 굵어 정말 아팠었다. 그렇게 두 번의 조영제 주삿바늘을 꽂고서 머리부터 사타구니까지 갑자기 뜨거워지는 생소하면서 기분 나쁜 경험을 하고 나서야 길었던 CT촬영이 끝이 났다.


사실 이 날은 다른 의미로 나의 상담 생활에 어떠한 계기가 된 날이기도 했다.

처음 신경과에 갔을 땐 새어머니와 함께 동행했었기에 사실 혹시 힘든 일이 있느냐,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신경을 너무 많이 쓰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었다. 가족들 모두에게 내가 상담을 받고 있는 건 비밀이었고, 앞으로도 알릴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CT촬영을 하러 가는 날은 새어머니가 다른 일이 있어 나와 동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CT촬영을 하는 날엔 보호자 동반을 해야 했으므로 숙모와 함께 가게 되었는데, 숙모는 엄마가 아빠와 헤어진 중3 시절부터-어쩌면-방치되었던 내 고등학교 시절에 그나마 마음적으로 의지가 되어주던 유일한 집안의 어른이었기 때문에 조금 마음이 놓였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CT촬영을 하기 전 숙모와 앉아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먹고 상담을 받는 이야기를 꺼냈는데, 아직도 잊히지 않는 숙모의 대답이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삼촌이나 나나 네가 너무 멀쩡하고, 밝게 생활해서 쟤가 진짜 괜찮아서 괜찮은 건지, 아니면 안 괜찮은데 괜찮은 척하는 건지 조차 헷갈렸어. 그래서 더더욱 네가 그렇게 힘들고 아팠는지 몰랐고.. 그래, 네가 지금 속이 속이 아닐 텐데 참 고생했다. 역시나 마음고생이 참 많았구나.



나에게 일어났던 거의 모든 일들과 가끔씩 꺼냈던 내 속내를 들었던 사람조차도, 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아니, 원래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알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새롭게 와 닿는 감정이었다. 깨달았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런 확신과 비슷한 감정. 알아줄 거라는 기대를 버린지도 오래되어 아무 감흥 없을 것 같았던 내 마음이 한순간 풀어지는 듯한 착각도 드는 듯했다.


그래, 사실 어쩌면 난 내 아픔을 별 것 아닌 일이라고 치부해버릴 까 봐 그게 무서웠던 거다. 내 아픔이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의 그 비참한 기분. 나조차 내 편이 되어주지 못했던 그 시절의 내가 다시 철저하게 혼자 남겨진 기분이 되었던 그때로 돌아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사실을 순간 깨닫고 나서야 누군가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어린 날의 내가 무릎에 파묻혔던 고개를 들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 진심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나 여전히 너무 아프고 괴로워요.

누가 좀 들어줘요, 알아주세요.


여태까지 튕겨져 나갔던 나의 목소리들이 숙모의 그 말에 비로소 다시 내 입술로 제자리를 찾아 다시 읎조려 지는 것 같기도 했다.


참 많은 시간 돌아왔구나, 너 참 고생 많았구나.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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